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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이면

한국문인협회 로고 정명숙(청주)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2월 6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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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란 대체로 진을 빼는 일이다. 오지 않을 사람을 위해 먼 길을 하염없이 내다보는 일은 참으로 쓸쓸하다. 강물이 흘러가면 그뿐이듯 기다려도 오지 않을 사람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진 사별이라면 더욱 쓰디쓴 슬픔이다.
계절은 가을 문턱을 훌쩍 넘어 제대로 익어 가는 중이다. 단풍의 전령사이기도 한 화살나무잎은 이미 곱게 물들어 반쯤 잎을 떨구었다. 나이가 늘어 갈수록 구태여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야 마는 계절이 제 스스로 여울져 흐르는 게 얄궂다.
가을이면 마음 지층 깊은 곳에 묻혀 있는 화석 같은 그리움을 건져 올린다. 많은 날이 흘러갔어도 추억은 갈수록 선명해 문득문득 가슴이 저려 온다. 단풍이 절정에 다다르면 그리움도 절정으로 치닫고 만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면 홀연히 떠난 분을 만나러 간다. 10월이면 연례행사처럼 돋아나는 아픔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6학년 늦가을이었다. 중학교 시험을 보던 때여서 진학하는 아이들은 방과 후 늦은 밤까지 학교에서 단체로 과외수업을 받았다. 전기가 없었으니, 촛불을 켰다. 저녁밥은 집에서 가져다주었다. 어느 날, 엄마가 이모의 혼례식 준비로 외가에 다니러 가셨다. 그날 저녁밥을 아버지가 지어서 자전거를 타고 가져오셨다. 햅쌀밥을 놋주발에 고봉으로 담고 새로 담근 배추김치와 고추장으로 양념한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찬합에 담아 식지 않게 수건으로 겹겹이 둘러, 보자기에 싸서 오셨다. 평소에는 말수 적으시고 조용하기만 한 분이셨기에 어린 나이에도 어렵기만 한 아버지셨다. 그날 저녁밥을 먹으면서 어린 마음이 뭉클했던가.
첫 직장에 출근하면서 내가 배정받은 부서는 회계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곳이었다. 계산기도 없던 시절이어서 주판알을 튕기거나 암산해야 했다. 종일 숫자와 씨름해야 하는 일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어느 날 퇴근하면서 위경련이 왔다. 밤새 고통으로 몸부림치다 새벽녘에 아버지 등에 업혀 병원으로 향했다. 택시나 버스를 타려면 족히 20여 분을 걸어야 한다. 머리 큰 여식을 등에 업고 산길을 걸어 찻길에 다다랐을 때 한겨울임에도 아버지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자식이 아픈 게 당신 탓인 양 의사 앞에서 연신 머리를 조아리던 아버지. 병원에서 진통제를 맡고 나서야 아픔이 잦아들었지만, 병원문을 나서면서 아버지는 내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안고 행여 넘어지기라도 할까 노심초사하셨다.
내가 늦은 나이에 결혼하면서 아버지의 마음은 한시도 편한 날이 없었다. 수심 가득한 딸을 대할 때마다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올 테니 몸 상하게 너무 속끓이지 말라고, 너는 잘 살아낼 수 있다고 늘 용기를 주시면서 당신께서는 돌아서서 등으로 우셨던 걸 안다. 내 딸을 시집보내고 지켜보면서 부모로서 얼마나 애태우셨는지 알게 되었지만 돌아보니 이미 너무 먼 곳에 계신다.
아버지는 가르치는 게 아니라 몸소 실천으로 보여 자식이 스스로 배우게 했다. 나도 내 딸들이 겪어야 할 삶의 고비를 넘을 때마다 아픈 속내를 감추고 말한다.
“좋은 날이 더 많을 테니 속끓이지 말아라. 잘할 수 있어. 너는 복 있는 사람이라 다 잘될 거야. 걱정하지 마!”
아마도 아버지처럼 내가 그랬듯이 내 딸들도 제 자식에게 그렇게 용기와 희망을 주지 않을까.
아버지께서 산으로 거처를 옮긴 지 십 년이 되었다. 10월이면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립다. 그렇게 진하고 진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만 했을 뿐 내 사랑을 드릴 수 없다는 게 막막해서 마음속에 선혈이 흐르고 서러움마저 붉다. 우연이라도 이승의 어느 곳에서 한순간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면 숱한 그리움이 무에 아까우랴. 그리운 사람이 더 그리워지는 계절이라서 이토록 애달픈 것이리라. 시월은 나에게 그리움의 한계를 비로소 한계로 인식하게 한다.
저녁 안개를 뚫고 산마루에 몸을 누이는 햇살이 힘겹다. 가을 저녁의 황혼은 짧아서 숲은 순식간에 지상의 모든 빛을 흡수해 버린다. 새들도 깃을 접는 시간, 아버지를 만나고 내려오는 산길에 유적한 한기가 담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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