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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계절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승애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2월 6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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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에 등이 굽은 팽나무가 처연하다. 쩍 갈라진 가슴은 내장까지 타들어 굴 속 같다. 옹두리와 흉터로 뒤덮이고 한쪽 어깨는 뭉텅 잘려 나갔다. 몇 가닥 남은 가지 끝에서는 생의 끈을 놓지 않은 초록 잎새가 생생하다.
수백 년 살아오며 어찌 평탄하기만 했을까. 단단히 여몄던 껍질을 벗고 여린 새싹을 밀어 올렸지만, 세상은 따뜻하지도 너그럽지도 않았다. 느닷없이 내린 폭우와 태풍에 한창 물오른 가지가 휘어지고 뚝뚝 부러져 나갔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안간힘으로 팔을 뻗었다. 가지에 물이 오르면서 연둣빛 잎이 번성했다.
팽나무가 우람해지자, 딱따구리가 달콤한 수액을 취하기 위해 찾아들고 개미며 벌, 나방, 장수풍뎅이가 시도 때도 없이 파고들었다. 불청객의 헤살에 울퉁불퉁 굳은살이 박히고 여기저기에 혹과 구멍이 생겨 신열을 앓았다. 어느 땐 타는 듯한 불볕더위에 혈맥이 막혔다. 송곳 같은 추위에 살갗이 터져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이 모든 계절을 이겨낸 고목은 초연하다. 허리춤이며 가슴, 어깨에 난 상처를 부끄러워하거나 애써 감추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서서 자기 를 파고드는 뭇 생명들을 가만히 품어준다.
어머니의 봄을 펼쳐본다. 따스한 햇살에 움츠렸던 몸을 일으켜 꽃대를 올렸다. 꽃망울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을 때 증조부와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이 들통이 났다. 시도 때도 없이 꽃샘추위가 앙탈을 부리고 눈발이 날려 집안을 어지럽혔다. 한껏 밀어 올린 꽃숭어리가 맥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할아버지는 시들어 가는 어린 딸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북녘 땅 한 기슭에 사는 벗에게 맡겼다. 어머니는 산 설고 물선 고장에서 새 꽃대를 올렸다. 그러나 거기서도 비바람을 온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발을 뻗을라치면 바윗돌이 길을 막고, 숨통을 막고 있던 바위를 피해 길을 내면 차가운 냉기가 살을 파고들었다.
어머니의 초여름은 웃음꽃이 만발했다. 헤어진 가족과 다시 만나 알콩달콩 정을 쌓고 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초록으로 옴팡 물들어 갈 무렵 남과 북의 화약고 뇌관이 터졌다. 부부의 뜰에 불똥이 튀었다. 전란은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뒤엎었다. 부모·형제를 비롯해 모든 것을 잃고 벌거숭이가 되었다.
까맣게 타버린 탓일까. 어머니의 자궁은 좀처럼 생명을 잉태하지 못했다. 십여 년을 비손한 끝에 어렵사리 아이를 품었다. 여름이 깊어질수록 어머니의 혈맥엔 푸른 물이 넘실댔다. 따가운 뙤약볕도, 폭우도, 태풍도 두렵지 않았다. 어머니는 우리가 아무 걱정 없이 무탈하게 자랄 수 있도록 촘촘하게 그물을 짰다. 우리는 그 그물 위에서 마음껏 뒹구며 꿈을 꾸었다.
어머니의 가을을 들추다 목이 멘다. 이만하면 살만하다 싶었는데 믿었던 아버지의 벗이 발등을 찍었다. 먹구름이 오래오래 머무르는 와중에 난데없이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졌다. 건강하던 지아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가을 태풍에 가족이 모두 내동댕이쳐졌다. 지아비에 이어 큰딸까지 잃자, 생가지가 뚝뚝 부러져 나갔다. 벗들은 태평가를 부르는데 어머니는 애도가를 불렀다.
어느새 어머니의 계절도 겨울에 들었다. 겨울을 맞이한 어머니는 쉼 없이 달려온 걸음을 멈추고 헛가지를 잘라냈다. 푸름을 모두 잃고 몸과 마음은 삭정이처럼 말랐다. 뼈마디를 파고드는 한기, 오락가락 붙잡을 수 없는 기억, 모든 것이 어머니를 괴롭혔다. 당신 화폭에 그려졌던 선과 색이 하나둘 지워질수록 늘 젖어 있던 눈가가 보송해졌다.
어머니가 겨울의 끝자락에서 서성인다. 질곡의 여정이 끝난 어머니는 고요하다. 체면 차릴 일도, 시계를 쫓아갈 일도 없다. 계절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한 평 남짓한 바닥을 베고 누워 더딘 하루를 보낸다.
어머니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휘어지고 뒤틀린 자리에 울퉁불퉁한 옹두리가 만져진다. 살아온 흔적들이다. 불각시에 기둥 뿌리 뽑히고 주춧돌마저 와르르 무너졌으니 그 마음 오죽했을까. 어느 날 한밤중에 눈을 떴을 때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은 어머니의 어깨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나는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돌아누웠다. 그때 알았다. 어머니의 속이 썩어 뭉그러지다 못해 시커멓게 타버렸다는 것을.
팽나무 갈피갈피 새겨진 문장이 장중하다. 다람쥐가 쪼르르 달려와 한 장 들추고 가고, 나비가 살포시 내려앉아 한 구절을 읽고 간다. 바람이 다가와 몇 장 들추고는 화들짝 놀란다. 구름도 한 소절 읽다가 멈칫거린다.
팽나무의 생도 머지않아 멈출 것 같다. 쉴 새 없이 물을 길어 올리던 수관부는 물기가 말라가고 심장박동은 이미 느려졌다. 아직은 내가 목숨 붙이라는 걸 하소연하듯 가지를 뻗어 마지막 잎을 벌렸다. 어쩌면 올가을에 떨구는 잎이 생애 마지막 잎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심장박동도 점점 느려진다. 밤사이 그 심장이 멎을까 봐 벌떡 일어나 확인하곤 한다. 눈에는 백태가 끼고 귀는 세상 이야기를 담지 못하고 몸은 다 말라 버석거리는데도 사랑만은 여전히 우리에게 닿아 있다.
어머니도 팽나무도 언젠가는 모두 떠날 테지. 그러면 나는 고주박이가 된 팽나무를 보며 어머니를 떠올릴 것이다. 우리는 나무의 연대기를 되새기며 참는 법을, 품는 법을 알아 가리라.
느슨한 하루가 또 속절없이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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