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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의 처방전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경람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2월 6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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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참네. 엄마가 맛있는 거 사주실 거야.”
아이 팔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가 떼면서 엄마에게 눈을 찡긋했다. 아이 엄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상냥하게 아들 손을 잡아 일으켰다.
“우리 길 건너 빕스 갈까?”
뾰로통하던 아이가 책상다리를 내리며 천천히 일어섰다. 
<고잉홈 더 갈라> 콘서트는 고양문화재단 상주단체 ‘고잉홈’의 두 번째 공연이었다. ‘Who else is celebrating 2025?’라는 주제로 2025년이 탄생과 서거 100주년, 150주년, 200주년이 되는 쇼스타코비치, 라벨, 비제,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등 일곱 명의 특별한 작곡가들 음악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공연이었다. 짧으면서 친숙한 곡들이 많아서인지, 엄마와 함께 온 어린이 관객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내 옆에도 젊은 엄마와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나란히 앉았다. 아이는 두 번째 곡까지는 얌전히 듣다가 지루한지, 책상다리로 의자에 올라앉아 몸을 흔들며 긴 시간을 견뎠다.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엄마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인터미션 시간에 아이가 엄마에게 “말을 할 수 없어서 힘든 거야”라고 했다. 어린아이가 얼마나 지루할까 생각하다 문득 지난날의 일들이 떠올랐다.

 

산골 마을에서 자란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대전에서 전근 오신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우리 학교 학생들이 문화실조에 걸렸다는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다. 선생님은 “방송국 어린이합창단을 지휘한 경험이 있다”고 하시며, 음악, 미술,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해주셨다. 라디오로 듣는 동요나 가요로도 충분했지만,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가 또 있구나’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 팝송을 좋아하던 먼 친척 덕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샹송 가수 아다모의 실제 공연을 보게 되었다. 빛이 흐르는 환상의 무대, <눈이 내리네>를 부르던 애수 어린 목소리가 오랫동안 귀에서 맴돌았다. 청주에서 대학을 다니며 축제 때 이웃 대학에서 게스트로 초청된 연주가의 브람스 <헝가리 무곡>도 경이롭기만 하였다. 청주의 모 방송국에서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음악 감상회는 매번 설레는 경험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기자 한풀이하듯 동네 소극장을 비롯하여, 어린이가 볼 수 있는 공연들을 부지런히 찾았고,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열심히 끌고 다녔다. 욕심이 앞서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았다.
동네 근처에 ‘돌체’라는 작은 음악 감상실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은 레코드 음악이 아닌 실제 공연이 열렸는데, 다양한 장르의 연주가들이 초청되어 풍성한 무대를 펼쳤다. 친구와 동행하거나 연주에 따라 아이들을 데려가기도 하였는데, 일상을 벗어난 감미로운 휴가가 정말 좋았다. 처음에 낯설어하던 아이들은 맛있는 주스를 마시고, 바로 앞에서 열리는 생생한 축제를 차차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두 아이가 여덟 살, 일곱 살 되던 해 연말이었다. 테너와 바리톤 원로 성악가 두 분이 초청되었다. 주인은 허락했지만, 성악가가 고개를 저으셨다. 성공적인 공연을 위해서 아이들 입장을 제한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 조용히 할 수 있는데. 그치?”
아쉬워하며 고개를 늘어뜨린 아이들을 데리고 평소에는 지나쳤던 근처 P레스토랑에 갔다. 스파게티와 피자를 푸짐하게 먹고, 달빛과 눈빛이 어우러져 동화 속 같은 근처 공원에서 땀이 나도록 눈을 뭉치며 놀았다. 어쩌다 보니 더 이상 음악 감상실을 찾지 못했지만, 아이들이 그날의 음식과 눈사람 만들기를 특별한 기억으로 떠올리니, 공연을 못 본 아쉬움은 상쇄된 듯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동네 ‘책 읽어주는 엄마’ 모임에서 미술관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때마침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소장 인상주의 작품들과 스페인의 화가 고야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1층에서는 밝고 따뜻한 느낌, 특히 르느와르의 작품들을 잠시 보는 듯했지만, 2층의 고야 작품으로 넘어가자 딸아이가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어른들도 이해가 쉽지 않은, 괴기한 그림들을 빠짐없이 보여주려고 했다니! 초등학교 저학년 딸아이 얼굴에는 지루함과 그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상황이어서 “마당에 나가서 시끄럽지 않게 놀아라” 하였더니, 펄쩍 뛰듯 미술관을 벗어나 앞마당에서 낙엽을 긁어 모아 성을 만들며 놀았다고 한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발그레한 뺨이 아주 신났던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미술관 나들이가 정말 재미있다”고 하니, 끝까지 붙잡지 않은 건 어리석은 엄마의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었다.
나의 결핍에 대한 보상 심리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끌려 다닌 아이들은 때때로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나들이가 늘어날수록 작품에 눈을 두는 시간도 조금씩 길어진다는 확신이었다. 작은아이가 사춘기를 힘겹게 넘기면서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을 정한 것에, 엄마의 갈증과 열의가 조금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위로해 본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주고,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에리히 프롬은 말하였다. 재창조를 통하여 자연의 섭리와 세상의 이치를 되짚어 보고,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주는 것이 예술의 힘이다. 삶이 힘들고 지쳤을 때 쉬어 갈 수 있는 용기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을 이어갈 수 있는 회복 탄력성에도 도움을 준다. 또한 신념이나 욕구가 달라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고 새살이 돋도록 기운을 불어넣기도 한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예술가들이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 등 클래식 음악가들은 물론, K팝 스타들이 세계를 누빈다. 우리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차지하고, 뮤지컬에서 토니상을 수상하는 등, 한국인의 재능과 노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일들이 많다. 예술은 치우친 마음에도 균형을 잡아주어, 용서와 화해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디딤돌 역할을 할 것이다. 갈라 콘서트에서 만난 어린아이도 예술 경험을 통하여 점차 풍요와 기쁨을 마음에 담고, 함께 살아갈 넓은 세상의 주역으로 성장할 것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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