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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 670호 억수비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립니다비를 좋아하지만억수비에 심장이 쿵쾅거립니다바짝 숨죽이며 쌕쌕거리는 바람의 소리를 듣습니다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습니다나무 군락들 사이로 어둑한 불빛이 보입니다이 폭우로팍팍한 인심이 도드라질 것 같습니다그리운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갑니다소리 없는 작별에도 세파를 느낍니다비바람에 이른 낙엽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 윤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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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 670호 매복

우직스럽게 보슬비 내리고사방으로 성벽을 쌓은 안개코앞을 가린다40도의 무더위와 35킬로 완전군장에판초까지 둘러쓰고,조명지뢰, 크레모아, 자동화기로 완성된 진지숨막히는 초죽음으로 숲에 섞인다시시각각으로 생명을 노리는전갈, 독거머리, 독거미, 독충, 독사, 말라리아모기 밀림의 적은 총알보다 더 두렵다자신을 이겨 강점을 찾아야전쟁을 이겨낼 수 있다정글에

  • 류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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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 670호 아내의 미소

가을로 향하는 문턱인 백로(白露)의 절기가 지났지만 환경 오염으로 인한 기후 온난화가 불러온 이상 고온 현상으로 낮에는 폭염이 계속되고 아침저녁으로도 후덥지근하다. 추석 연휴를 며칠 앞두고 김치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구입한 지 20년이 지난 오래된 것이라 수리하여 쓸 수가 없게 됐다. 지금까지 사용했던 김치냉장고는 나의 아이가 대학 시절 부두 컨테이너 터미

  • 김형수(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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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 670호 가는 세월의 호숫가

공짜가 아니라는 걸 깨닫기 전에 이미 살아버린단 한 번의 삶과 다시 마주할 수 있다면,닳도록 써먹고 또 써먹은 기억이 아니라지금 여기의 생생한 직관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비탈진 산마루의 비대칭 삶을 꿋꿋이 버텨내는등산길 참나무가 바람을 맞이하듯아무런 표정 없이 환대할 수 있을까사방의 시선을 침묵 속에 담아내며삶의 의미를 향해 사색의 창끝을 겨눠보고 싶은데&

  • 이영철(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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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 670호 그 집 내실

그 집 내실에 나는 없었다현관에 벗어 놓은 신발도 보이지 않았다장맛비 쏟아지던 지난여름잠시 빌려 신었던 목 긴 회색 장화가신발장 풀린 문틈으로 빼꼼히 발뒤꿈치 한 자락내밀며 지각생 같은 인사를 건네 왔다내가 없는 그 집 내실에나의 실존을 증명해 줄 주인장도 출타 중이었다벽에 걸린 그의 갈색 외투도 모자도 보이지 않은 채 지난 겨울 선물한 붉은 벽돌

  • 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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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 670호 바람

바람이 걸어가고그 뒤를 내가 걸어가고슬픔이 따라온다해가 진 후에바람이 슬픔을 지우며내 앞을 걸어간다나는 사람과 헤어져이승의 길목을 돌아서는데바람이 내 팔장을 끼고함께 걷는다비가 내리고어제가 멀어지고 내일도 지나고 옛날이 사라지고오랜 이국생활의 고난이 조국의 하늘에 스미어슬픔을 내려놓고 가는 나에게 늙은 바람이 고난을 지우

  • 왕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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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 670호 잃어버린 나(2)

눈을 떴다. 병원복을 입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한다. 여기가 어딘가? 병원 같은데… 내가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 내가 왜 여기에 누워 있지?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그래! 집에 들어오려는데 집 번호가 생각이 안 났어. 이것, 저것 눌러보아도 아니야. 우리 집이 아닌가 하고 집 밖으로 나가 주변을 살펴보았어. 우리 집이 맞는 것 같은데…. 한참을 그러다가

  • 김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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