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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에 실린 짐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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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은

책 제목제174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5년 6월 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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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이른 아침이다. 서쪽 창을 활짝 연다. 창문 밖은 쌀뜨물 같은 안개가 엷은 이불처럼 거리를 덮고 있다. 안개 너머로 희미한 물체가 보인다. 누군가 수레에다 산더미 같은 폐지를 싣고 온다. 처음에는 수레를 혼자서 끌고 오는 줄 알았다. 얼마나 힘들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가까이 오니 뒤에는 체격이 자그마한 여자 한 분이 뒤에서 밀어 주고 있다. 창에서 바라본 두 사람은 어깨가 구부정하고 나이 든 초로의 부부처럼 보였다.
부부는 얼마나 일찍 나왔기에 폐지를 가득 싣고 숨이 차도록 가는 부지런함인가. 아니면 밤에 나온 것일까. 밤새 휘청거리는 길 위에서 마시고 버린 소주병들을 줍고 다녔을까. 부부의 젊은 시절은 어땠을까? 가난을 벗어나기 위하여 배고픔을 참으며 황소처럼 묵묵한 삶이었을 것이다.
안개 속 수레를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 모습이 아린 기억 속으로 들어온다. 나무에 달린 열매들처럼 자식이 많았다. 팔남매가 먹어야 하는 많은 양식과 배움을 오로지 혼자서 감당하셨던 아버지. 새벽이면 아버지의 하얀 두 다리는 커다란 무같이 퉁퉁 부어 있었다. 부은 다리로 끙끙대는 신음소리를 내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어나 첫차를 타고 일터로 나가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일요일이면 아버지 일터로 따라 나가고 싶어했다. 아버지를 유난히 좋아했던 어린 마음에 아버지를 도와드리고 싶었다.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조그만 손이라도 겨울에는 힘이 되어 주었는지 아주 가끔씩 데리고 나가 주었다.
아버지를 태운 첫차는 서울역 못 가서 갈월동 버스 정거장에다 내려놓고 떠난다.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차디찬 겨울 새벽녘이다. 쓸쓸하고 휑한 거리에서 아버지 작업은 시작된다. 아버지 직업은 요즘 말로 ‘환경미화원’이다. 밤사이 널브러진 거리를 청소하면서 틈틈이 가정집에서 내놓은 하얀 연탄들을 치운다. 그러면 한 달에 얼마씩 수고비를 받았다. 수레에 연탄재를 가득 싣고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뒤에서 젖 먹던 힘까지 합쳐 밀었다. 또 내리막에서는 수레에 끌려가면서도 앉아서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땅이 얼어서 미끄러운 날은 수레가 앞으로 밀려 연탄재가 쏟아지면 어린 마음에도 울어버리고 싶을 만큼 속상했다.
우리 집은 후암동에서 ‘마누라 없이 살아도 장화 없이 못 산다’는 구로동으로 이사했다. 나는 전학을 가지 않고 후암동으로 초등학교를 다녔다. 가끔 방과 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버지 일터로 가서 기다렸다. 그리고 하루 종일 실은 쓰레기더미 모퉁이에다 책가방을 올려놓고, 수레 뒤에서 어린아이가 밀고 가면 사람들이 쳐다보았지만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서울역에 있는 하치장까지 가면 밤이 되어서야 아버지 고단한 하루가 끝난다. 그때서야 먼지 때가 잔뜩 묻은 얼굴에 비누칠을 하고 나면, 윤곽이 뚜렷한 아버지의 잘생긴 얼굴이 보인다. 늦은 밤, 버스에서 내려 긴 거리를 아버지 손잡고, 집에 오던 기쁨은 어린 마음에도 뿌듯했다.
처음 안개 속에서 부부를 본 후에도 이른 아침이면 보았다. 그날은 은행에서 볼일을 보고 집으로 오던 한낮이다. 도시는 무더위로 펄펄 끓고 있다.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힘에 부칠 만큼 폐지를 실은 수레를 보았다. 안개 속에서 자주 보던 부부다. 한여름의 햇볕은 두 사람 어깨에도 등에도 비 오듯이 쏟아지고 있다. 새벽에도, 낮에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백합꽃같이 향기롭고 존경심마저 든다.
근래 신문과 TV에서 삶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기사를 자주 접했다. 하물며 아이들을 데리고 동반 자살을 하는 부모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힘들어도 저 부부가 미는 수레처럼 힘을 모아 앞으로 나간다면 두려울 것 없는 세상이다. 폐지가 잔뜩 실린 수레를 끌고 밀고 가는 두 사람의 표정은 밝다. 힘겨운 현실을 이겨 나가겠다는 의지가 보석처럼 빛나 보인다.
아버지의 힘든 삶 속에는 엄마가 늘 같이 있었다. 엄마의 활달함으로 가정에는 항상 웃음이 넘쳤다. 그랬던 엄마가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그 뒤로 아버지의 고단한 삶은 황량한 들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처럼 외로웠다. 아버지와 어린 우리들의 삶도 햇볕 없는 그늘처럼 하루하루 어두워갔다. 아버지는 엄마 없는 가정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아내의 빈자리가 동굴처럼 어둡고 추웠을 것이다. 한 가정의 힘은 부부가 함께할 때 빛이 나고 살아가는 용기가 샘솟는 것 같다.
수레를 밀고 가는 부부는 가난하지만 서로를 위하는 애틋함이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삶의 가치와 보이지 않는 가치는 다르다. 소중하고 귀한 것은 서로에 대한 ‘정’이 아닐까.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뒤에서 밀어주는 수고를 할 수 있을까. 저 부부는 수레바퀴처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지금 가고 있다. 아버지도 엄마만 곁에 있었다면 비틀대며 방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힘든 하루하루를 버틴 것도 결국 사랑의 힘이란 것을 나이 들어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감당 못할 만큼 버거운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그 무게를 나누어 질 만큼 우리 부부의 정이 변함없을까? 집으로 가는 길목, 생각이 깊어지는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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