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6년 9월 179호
5
0
하얗게 쌓인 어둠을 저벅저벅 밟는다. 구상나무 옆구리에 침묵하는 시간을 찾아 나선다. 목놓아 외친 메아리조차 현무암에 스며 돌아오지 않을 길을 걷는다. 성판악에서 출발하여 출입 허가를 받고 스틱과 아이젠 등 안전장구를 착용했다. 꽁꽁 싸맨 몸속으로 한라의 거친 바람이 스며들고 시작부터 생각이 가파르다. 숲 사이로 보이는 초승달이 길 안내라도 하듯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새벽하늘을 밝힌다.
삼나무 은은한 향을 들이마신다. 폐부 깊숙이 한라의 기운이 들어찬다. 머리에 두른 랜턴과 스틱으로 어둠의 깊이를 가늠한다. 숲 사이로 엎치락뒤치락 하늘이 열리고 닫힌다. 제주의 섬을 만들고 한라산을 세운 거대한 어머니 설문대할망의 숨결을 더듬는다.
바람의 밀서를 숨기는 하늘과 그 뒤를 밟는 추적대 같달까. 잠깐씩 나타나는 초승달과 힐끗힐끗 바라보는 내 시선이 맞닥뜨릴 때마다 명치 끝이 시큰하다. 한때 은신처이자 무덤이었던 이곳, 숲을 헤매던 삼춘과 우는 아이 입을 틀어막던 어미, 그 위로 총구가 겨눠졌던 숨막히는 그날을 차마 덮는 눈길 속 어둠을 밀며 걷는다.
두려움이 화산처럼 들끓었을, 그들에게 이 길은 마지막 보루였다. 살기 위해 숨어들었고 지도 위의 선 하나가 생과 사를 갈랐다.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눈은 발자국을 지우지만, 그때의 총성과 군홧발에 짓밟히던 비명까지 덮지는 못했을 것이다. 바람에 쓸리는 마른 조릿대가 먼 흐느낌처럼 앞서간다.
바다가 밀어 올린 여명에 능선이 깨어난다. 눈꽃을 매단 산은 장엄하다. 키 작은 나무는 작은 만큼의 무게로, 꺾인 나무는 꺾인 대로 짊어진 산을 꽃으로 피운다. 햇살 몇 줌이면 이내 벗겨질 화려함이지만 산의 명성만큼이나 아름답다.
진달래밭대피소까지만 탐방이 가능하다는 안내를 받았다. 긴장이 풀린 때문일까, 뒤꿈치에 통증이 밀려온다. 휴지를 덧대고 신발끈을 느슨하게 풀지만 새로 장만한 등산화가 물집을 키우는 모양이다. 배낭의 무게가 걸음에 매달린다. 춥던 몸은 흥건히 땀에 젖고 중간중간 고도를 알리는 안내판이 가파른 계단과 험한 돌길을 실감나게 한다.
속밭대피소와 진달래밭대피소 사이 사라오름이 있다. 오름 정상에서 제주 중산간과 서귀포 쪽 풍경을 볼 수 있고, 비 온 뒤엔 물이 차면 하늘과 구름이 그대로 산정호수에 담긴다고 했다. 한라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말에 짝꿍은 오름으로 향했고, 나는 진달래밭대피소로 발길을 재촉했다.
오를수록 숲은 낮아지고 바람은 거칠다. 순한 듯 가파르고 숨이 턱에 걸릴 즈음 한숨 돌릴 여유를 준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숲의 소리를 듣는다. 겉잎과 속잎의 수런거림처럼 사람살이도 마찬가지다. 벼랑 끝에서 올려다본 하늘에서 살아낼 희망을 찾고 그 빛 하나로 다시 행장을 꾸린다. 입 밖에 낼 수 없던 사건을 침묵으로 장전하고 이 산을 품고 살아간 사람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진달래밭대피소에 도착하니 백록담 탐방로가 열렸다.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산을 올려다본다. 허옇게 쌓인 눈을 두른 채 백록담이 뒤태를 보여준다. 정상까지 2.3km, 가파른 돌길과 눈 덮인 나무계단이 이어진다.
잎도 껍질도 벗겨진 채 혹독함을 견디는 구상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거센 바람 속에서도 풍경을 지탱하는 모습이 한라산의 수호신 같다. 바람을 먹고 피어나는 눈꽃이 절정이다. 비어 있어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능선과 멀리 펼쳐진 제주가 눈부시다.
막바지에 다다르자 바람은 더 거칠다. 난간을 붙잡지 않으면 날아갈 것 같다. 녹슨 경첩처럼 삐걱대는 무릎을 다독이며 바람이 몰아칠 땐 몸을 뒤로 돌리고, 쌓인 눈이 비처럼 흩날릴 때는 몸을 낮춰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어쩌면 이 산 아래 누군가도 이렇게 견뎌냈을 것이다. 순간순간이 살얼음판이었을 테고 한 고비 넘겼는가 싶으면 또 다른 능선이 가로막았을 것이고 수시로 마주하는 길 끝에서 뚝심 하나로 버텼을 테니 이 또한 삶의 밑천이고 근본이었을 게다. 이런저런 생각이 나를 몰아친다. 너덜너덜해진 다리와 발뒤꿈치의 통증도 정상을 향한 열정과 바꿀 수는 없다.
정상에 도착해 처음 마주한 백록담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넓디넓은 안개바다였다. 이내 큰 바람이 몰아치고 하늘이 열리더니 분화구가 웅장한 속살을 드러냈다. 화강암과 흩어진 눈, 물결치듯 섬세한 돌이 속내를 드러낸다.
격렬하게 요동치는 구름 사이로 잠깐씩 보여주는 백록담의 신비를 말로 담기는 턱없이 부족하다. 경험하지 않고서는 형언할 수 없다. 안개에 덮인 분화구는 깊었다. 오래 참아 온 속울음인 듯, 잔뜩 화난 침묵 같았다.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세상을 버텨냈듯, 백록담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라산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표지석 앞에서 두 팔을 번쩍 들어 사진을 찍는다. 벅찬 감동과 그날의 아픔이 교차한다.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생명의 요람이자 터전이 되어준 산. 잊힌 기억 속에서도 생명은 피어나고,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 이름을 살아남은 숨들이 품고 있다.
왜 이곳이 피난처이자 무덤이 되었는지
이름 없는 죽음은 왜 침묵했는지
바람은 온 힘으로 백록담을 열고 닫으며 묻고 또 묻는다.
바람과 돌담 아래 묻힌 숨들, 시간이 흘러도 둥글게 깎이지 않는 모서리들
나무는 죽어서도 재갈을 문 채 한라산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상에 오래 머물 수 없음이 못내 아쉽다. 내려오는 길에 몇 번이나 돌아선다. 나무는 무겁고 능선은 말이 없다. 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철쭉을 밀어 올릴 테고 돌 아래 묻힌 숨은 바람으로 떠돌 것이다.
백록담에서 성판악으로 내려오는 길은 제주의 그날을 가슴에 내려놓는 거리다. 물에 젖은 솜뭉치보다 무거운 몸, 말보다 오래 남을 다짐을 발밑에 새기며 걷는다. 자박자박 따라오는 저녁놀, 속절없이 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