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6년 9월 1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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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을 만나도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때로는 땅이 꺼질 듯한 절망을 느낄 때도 있다. 그래서일까. 손익 계산을 따지지 않고 외로운 마음을 채워주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2000만 시대가 되고 있다. 온갖 가면으로 무장하고 견뎌낸 세상에서 녹초가 되어 귀가했을 때, 오직 나를 향해 있는 힘껏 달려와서 위로해 주는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릴 때 집에서 ‘메리’라는 흔한 이름을 가진 개 한 마리를 키운 적이 있었다. 그 당시 1970년대의 하수시설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담벼락에는 흉측한 구멍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 통로로 쥐들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대범하게 돌아다녔다. 그래서 나라에서 배급받은 쥐약을 밥에 섞어 출몰 지점에 밀어 넣고는 제발 쥐가 사라지길 소망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개 메리가 거품을 뿜으며 바닥에 나뒹구는 게 아닌가! 쥐약을 삼켰던 것이다. 메리는 이리저리 몸을 뒤틀다 결국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고통스러워하는 메리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또 어느 날에는 동네 어른들이 모여 고약한 냄새와 함께 불을 피우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가까이 가기를 꺼렸는데, 개를 도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부터 이 끔찍한 기억은 오랫동안 내 안에서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바짝 눌어붙었다.
주인과 함께 목줄을 하고 있는 개와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칠 때면, 맹렬한 두려움이 나를 구석으로 내몰았다. 개가 짖기 전부터 내 목덜미가 먼저 긴장감으로 굳었다. 머리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몸은 이미 어린 시절로 달려가 있었다. 개도 그것을 눈치채고는 내게 더 짖었다. 친구나 지인 집에 개나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면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철벽같았던 증상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13년 전쯤, 아들이 생후 2주일 된 기니피그를 대형마트에서 사 왔다. 내가 동물 키우는 것에 무조건 반대해 온 터라, 아들은 꾀를 내어 자기 힘으로 키울 수 있는 작은 동물을 데려온 것이다.
나는 동물을 눈으로만 볼 뿐 만지지 못했다. 물렁물렁한 느낌이 싫었다. 그런데 한두 달이 지나는 동안, 딸이 기니피그를 내 무릎이나 팔에 살그머니 올려놓곤 했다. 그럴 때면 깜짝 놀랐지만 기니피그도 덩달아 놀랄까 봐 꾹 참고 숨죽이고 있었다. 며칠 후에는 딸이 내 팔을 가져다가 기니피그를 쓰다듬게도 하고, 내 품에 올려놓고 안아보게도 했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닫혀 있던 내 감각의 문이 나도 모르게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기니피그가 내 품에서 안정감을 찾게 되면서, 내가 주 양육자가 되어 갔다. 가끔씩 “설봉아” 하고 이름도 불러주었다. 나를 포함해서 남편이나 아이들은 집에만 오면 설봉이에게 먼저 갔다. 언제 영양제를 줬는지, 먹이는 얼마나 먹었는지 점검하는 것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족 간에 소통이 되고, 웃음이 피어났다.
사실 설봉이는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았다. 그때마다 병원에 가서 치료했는데, 거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여러 번 넘겼다. 그런데 키운 지 6년이 지난 어느 날, 의사가 설봉이가 더는 살기 어렵다고 말했다. “추억을 많이 만드세요”라는 말과 함께 5일치 진통제만 주었는데, 사흘 만에 우리 곁을 영영 떠났다. 딸의 슬픔이 말이 아니었다. 딸과 남편은 설봉이를 시어머님의 밭 한 귀퉁이에 정성스럽게 묻어주었다.
난 딸이 또다시 동물을 데려올까 봐 밤늦도록 설봉이 짐을 정리했다. 집, 건초, 영양제, 배변 패드, 울타리 등등. 아이 하나 키우는 것처럼 그동안 많이도 사들였다. 그런데 핸드폰의 사진들은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 사진들을 보며 딸은 가끔 심각하게 “오늘 설봉이 친구 하나 데려올 거야”, 또 유기동물보호센터에서 사진들이 올라오면 “엄마, 이 아이 예쁘지? 귀엽지!” 하며 내 눈치를 보곤 했다. 키울 때는 좋고 행복하지만, 떠나보내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기에 반대했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상실을 넘어 내가 다시 열어야 할 마음의 자리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딸이 5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로 독립을 하고 나서 버려진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내 반대 따위는 순위에서 밀려 좀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딸의 집에 안 갈 수도 없었다. 발소리도 안 나게 쓰윽 거실로 나오던 고양이와 처음 마주치던 날, 내가 깜짝 놀라자 고양이도 커튼 뒤에 숨어서 나오지 않는다. 이름은 ‘고영’이다. 딸의 집에 가는 횟수가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었다.
어느 날 딸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고영이 밥 좀 줘. 오늘 회식이 있어. 부탁해!”
처음엔 아무것도 안 하고 밥만 주고 나왔다. 내가 가면, 고양이가 거실에 나와 있다가도 어느 구석에 숨어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딸이 “엄마 손등을 고영이 코 밑에 대 봐, 볼에 대 봐. 냄새 맡게”, “엄마, 고양이 머리에서부터 살살 쓰다듬어 봐” 하며 내 손을 잡아 끌어댄다.
고양이가 나를 물까 봐 조심조심 갖다 대보지만,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 고양이는 냄새 한 번 맡더니 고개를 홱 돌린다. 나도 큰 진전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는 고양이가 나를 봐도 숨어들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더 이상 두려움의 냄새를 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나 고양이도 예전처럼 무섭지 않다. 무섭다기보다 안쓰럽고 불쌍하다. 특히 추운 겨울이면 어린 고양이들이 눈에 밟힌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있는 이웃 주민에게, 대형마트에서 고양이 사료를 사다가 줄 정도로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그러고 보면 아들과 딸이 병아리, 햄스터, 기니피그 등의 작은 동물부터 고양이까지 키우는 과정을 고마워해야 할 듯싶다. 그들 곁에서 자연스럽게 부대끼는 그 시간 속에서 오랫동안 트라우마에 갇혀 웅크리고 있던 나를 온전하게 다독여 일으켜주는 시간이 되었다.
상처는 새로운 손길을 만나면서 조금씩 다른 기억으로 바뀌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여행 간 딸을 대신해 고양이 밥을 주고 있고, 고양이 옆에서 오랫동안 굳어 있던 내 마음도 다정하게 쓰다듬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