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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자

책 제목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6년 3월 1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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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서 ‘방 4호’는 공부방이다. 작가들의 서재처럼 책장에 책들을 빽빽하게 채워 넣었다. 처음 이 방을 서재로 꾸밀 때만 해도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기에 학위논문도 쓰고 책도 읽겠다는 오진 꿈이 있었다.
어느 날 교수님이 강의 중에 “집에 책이 1천 권이 되지 않으면 책을 사서 모으고 읽어라”라는 말씀을 새겼다. 우리 집 빈약한 서고가 부끄러웠다. 그때부터 책을 즐겨 사 모았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을 주문하고 배송을 기다리는 시간은 설렘 그 자체였다.
주문해서 받은 책 중에는 『백석 전집』도 있다. 백석 시인에 대해 무지했는데 시인의 시와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공감하였고 나에게는 신세계였다. 백석 시인의 동시는 동화시로도 불리는데 이것은 시의 형식을 빌어 동화의 요소를 가미했다.
“옛날 어느 곳에 개구리 하나 살았네/ 가난하나 마음 착한 개구리 하나 살았네.// 하루는 이 개구리 쌀 한 말을 얻어 오려/ 벌 건너 형을 찾아 길을 나섰네// 개구리 덥적덥적 길을 가노라니/ 길가 봇도랑에 우는 소리 들리네// 개구리 큼 뛰어 도랑으로 가 보니/ 소시랑게 한 마리 엉엉 우네”(동화시 「개구리네 한솥밥」)라는 시에 특히 매료되었다.
이렇게 시 세계에 빠지게 되어 정지용, 김수영 시인의 시집 등 수많은 시집을 닥치는 대로 사서 읽으며 그들의 시의 세계에 몰입하였으며 내 서재에도 1천여 권의 책이 모아졌다.
그런데 코로나19라는 이상한 세계가 되어버렸고 나의 일상마저 바뀌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책과 멀어졌고 방 4호도 서서히 나에게 외면받았다.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방 4호는 공부방에서 여행용 가방 등, 자질구레한 물건들로 방이 가득 채워져 있는 창고가 되어 있었다.
방 4호는 이따금 시어머니나 친정엄마가 오면 묵기도 했다. 그러더니 서서히 둘째 아들의 체력단련장이 되어서 운동기구가 그 방을 차지했다. 내가 방 4호에 들어가는 건 운동하러 가기 위한 준비물을 챙길 때뿐이었다.
어느 날 남편이 큰 결심을 한 듯 가족들에게 의견을 말했다.
“방 4호를 엄마에게 서재로 돌려주자. 자기의 운동기구는 자기 방으로 옮겨라.”
우리 집 세 남자, 남편과 두 아들이 자신의 운동기구를 자기들 방으로 옮겼다. 그래도 여전히 잡동사니 물건과 책이 동거하는 창고 방이었다. 남자들이 부지런히 움직여 잡동사니들을 들어냈다. 나도 그들을 도와 버려도 되는 것과 버리면 안 될 것만 선별해 주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해결되는 것이 없었다. 참 많은 것이 버려졌는데 그동안 버려도 되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끼고 산 것이 많았다. 버림과 남김의 선별 과정에서 20년 전의 나를 만날 수 있는 물건들이 있었다. 지금은 메모를 핸드폰에 주로 하고 있지만, 그때는 메모나 일정 등은 수첩에 기록했었다. 쌓여 있는 여러 권의 수첩을 발견했다. 그 수첩에는 공부하러 다니는 일정이 적힌 수첩 등과 함께 20년 전의 일기도 있었다.
20년 전 써놓았던 일기를 펼쳐 읽어 내려갔다. 나의 20대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서 다가왔다. 참 열정적으로 살았던 20대의 내가 그리웠다. 그렇게 치열했던 20대를 보냈는데 지금의 나는 그 무엇이 내 가슴을 이렇듯 삭막하게 했는가. 내가 안쓰러웠고 애절함과 아쉬움이 밀려왔다.
방 4호는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다시 책상이 놓였다. 없어도 될 많은 것들이 버려지자 새 옷을 입은 것 같이 깔끔해졌다. 그야말로 명창정궤 (明窓淨几)다. 방 4호에 있는 책들이 책장에서 꺼내 달라고 간절히 원하는 듯, 나와 눈맞춤을 하는 것 같다.
다시 공부방이 된 방 4호에 들어가서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둘러본다. 그 중 읽으면서 감동하고 공감한 책들도 있지만, 한 번도 읽지 않은 책들도 꽤 있다. 읽었지만 어떤 내용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책도 있다. 그동안 외면했던 책들에 미안했다. 읽지 않은 책들은 읽고, 읽은 책들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먼저 『읽는다는 것의 역사』(로제샤르띠에, 굴리엘모 카발로 엮음)을 읽으리라. 구입할 때만 해도 독서에 목말라 있었는데 막상 읽으려니 두터운 페이지에 압도되어 덮어두었던 책이다.
방 4호의 변화는 나를 변하게 했다. 책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지난 5년, 이제 조금씩 눈길을 주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내 눈은 핸드폰으로 향하고 있다. 책으로 눈길을 옮겨 오는 데 방 4호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방 4호는 이제 ‘서재’로 재탄생했다. 시, 소설 그리고 수필 등 다양한 글들이 와글와글 수다를 떨고 어려운 전문 서적이 슬며시 다리를 들이밀고 있다.
내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방 4호에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 집 고양이 ‘까미’가 나를 방 4호로 유인한다. 은근히 나를 압박하는 것 같지만 싫지 않다. ‘까미’로 인해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쓰기도 한다. 두 시간 정도 책상 앞에 앉아 있게 된다. 그동안‘까미’는 옆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다. 예쁜 얼굴로….
온종일 휴대폰을 들고 검색하는 것보다 하루 한 시간이라도 책을 보며 사색하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는 생각을 늘 해 왔지만, 실천에 옮기진 못했다. 이제 사랑하는 가족들, 심지어 까미까지 서재를 꾸며주었으니 남편과 아들 앞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은 책을 읽어야겠다. 검색은 단순히 궁금증을 풀게 하지만 사색은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따지게 한다.
이번에 방 4호를 정리하면서 방만 정리한 것이 아니라 무디어진 감성을 다시 되살리게 되는 계기가 된 거 같아서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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