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5년 9월 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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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인 막내아들이 자서전 쓰기 동아리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작가가 되고 싶어서란다. 열심히 해보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는데 녀석이 되물었다.
“엄마도 작가가 꿈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되면 저도 따라갈게요.”
아이의 진지한 대답에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넘어져 골반에 골절이 생긴 건 어느 명절날이었다. 이후 2년 정도 자리에 누워 계셨다. 아버지는 원래도 건강한 몸이 아니었다. 갓 돌이 지났을 때 소아마비를 앓은 게 원인이 되어 평생 두 다리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사고까지 당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사고 이후로는 24시간 보살핌이 필요했다. 엄마와 매일 방문하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세 딸도 매주 번갈아 방문했다.
그날은 아버지의 목욕 서비스가 있는 금요일이었다. 아침 일찍 친정으로 가서 목욕을 도와드렸다. 씻은 후 나른한지 아버지는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불쑥 내 이름을 불렀다. 방을 치우고 있던 나는 아버지께 다가갔다.
“인경아, 내가 지금껏 살면서 제일 후회한 게 뭔지 아니?”
뜬금없는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아버지 눈만 바라보았다.
“작가의 꿈을 포기한 거야.”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아빠, 작가가 꿈이었어요? 그런데 왜 포기했어요?”
“응. 네 할아버지가 반대했단다. 몸이 불편한 아빠가 자리에 앉아 글만 쓰면 건강이 더 나빠진다고 판단한 거야. 그래서 할아버지가 아빠의 글과 책을 마당에 모아 모두 태워 버렸어. 소방차가 출동할 정도로 큰 불이었지. 내가 작가 포기할 테니까 책은 태우지 말라고 할아버지께 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단다. 그 뒤 꿈을 접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막심하구나.”
아버지의 야윈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국전쟁 중 1·4 후퇴 때,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등에 업고 남한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는 당시 8살로 소아마비를 앓아 몸이 불편했다. 할아버지는 걷지 못하는 막내아들을 각별하게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사랑으로 아버지는 낙천적이고 넉넉한 인품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했다. 당시 장애인으로는 드물게 대학을 나온 뒤 건설회사에 취직했다.
이후 엄마를 만나 결혼하고 세 딸을 둔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런 아버지의 원래 꿈이 작가였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쓴 글이 라디오에 나오거나 신문에 실렸다고 좋아하던 모습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그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께 약속했다.
“아빠, 제가 작가가 돼서 아빠 꿈 이뤄 드릴게요.”
아버지의 얼굴에 잔잔하고 엷은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 주겠니? 고맙다. 우리 딸.”
나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필사적으로 글쓰기에 매달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마음이 급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 작가가 된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다. 공모전에 지원한다는 소식을 알리던 날, 아버지는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모처럼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로 고목 같던 얼굴에 생기가 햇살처럼 번졌다. 부족한 글이지만 퇴고를 거듭한 끝에 원고를 접수했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이후 몇 군데 더 지원했지만, 매번 떨어졌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세 아이를 돌보는 일상의 굴레가 글에 전념할 수 없게 했다. 재능 부족을 탓하느라 책상 앞에는 한숨만 쌓여 갔다. 나는 육체의 감옥에 갇혀 낙이 없다던 아버지의 기쁨이 되길 간절히 원했다. 당신 생의 후회를 만회하고도 남을 희열을 선사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작년 5월 5일 아버지는 결국 천국으로 가셨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만 하루 동안 가족들과 이별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내 마지막 인사는 사과로 시작했다.
“아빠,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해요. 최선을 다했는데 잘 되지 않았어요.”
점점 몸의 기능을 잃어 목소리까지 상실한 아버지가 나를 촉촉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울먹이는 딸의 목소리를 듣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괜...찮...아.”
당신께 최고의 선물을 드리고자 했던 나의 소망과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의 아픈 마음을 오히려 위로하고 보듬어주었다. 나는 다시 아버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빠, 제가 꼭 작가가 돼서 영정에 바칠게요. 천국에서 봐주세요. 약속해 주시는 거죠?”
그때 굳어 가는 목을 가누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의 뺨 위로 또르르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애도와 슬픔의 강을 건너기까지 수개월이 걸렸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로 공모전에 응모했지만, 떨어졌다. 의기소침해 있는 내게 가족들은 뜬구름 그만 잡으라고 충고했다. 정말 뜬구름을 잡는 것이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한계의 벽에 부딪히며 도전하느라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여정을 혼자 조용히 끝내기로 했다.
꿈을 접은 채 하루하루 밀려오는 삶의 파고를 감당하기도 버거웠다. 그런 때에 막내아들이 작가의 꿈을 상기시켜 주었다. 왜 그날 아버지는 내게 ‘후회’의 경험을 말해줬을까. 장례식을 치른 지 일 년이 넘은 지금에서야 아버지의 표정과 말이 해석되었다.
‘네가 힘들게 사는 거 다 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써도 보이지 않는 너의 한숨을 아빠는 이미 알고 있었단다. 넌 아빠처럼 후회를 남기지 말아라. 아빠와의 약속을 생각하며 글을 쓰다 보면 지금 네가 겪는 삶의 문제들이 언젠가 사라질 거야. 작가가 되기 위한 분투 자체가 삶을 사랑하고 살아내는 위대한 과정임을 기억해라. 딸아. 내가 너에게 한 말은 바로 널 위한 것이었단다.’
인생이 이렇게 힘든데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글 따위가 무슨 소용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막내아들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상기하며 다시 쓰기로 했다. 먼 훗날, 아들에게 엄마가 가장 후회하는 일이라는 말 대신, 가장 잘한 일이라는 말을 전해 주기 위해 백지를 마주한다. 언젠가 천국에서 아버지를 만나는 날, 그날의 약속을 마침내 지켰다고 말해주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