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5년 9월 175호
65
1
지난해부터 공공도서관에 거의 매일 다니고 있다. 은퇴하고 난 뒤 딱히 갈 곳도 마땅하지 않아, 독서와 사색의 공간에 온전히 맡기고 있다. 도서관 문이 열리는 오전 9시 전에 도착해 가방을 정문 앞에 세워두고 가벼운 산책을 한다. 오전 시간에 독서하고 글을 쓰다 보면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가온다. 집에서 아침에 무엇을 먹고 나왔는지, 그날의 날씨, 가게들의 당일 분위기 등을 고려해 식당을 정한다. 그리고 가급적 식당이 붐비는 시간대는 피한다. 어차피 혼밥을 하는데, 혼자 줄을 서서 먹는다는 것은 어색하기 때문이다.
점심을 혼자 먹고 소화를 할 겸 산책에 나선다. 베토벤과 칸트가 산책을 즐겨했다고 하는데, 그들도 산책할 때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집에서 도서관에 오가는 시간과 산책하는 시간들을 합치면 하루에 3시간 이상을 산책한다. 최근에는 인근 실개천을 따라 좀 더 먼 거리로 코스를 정해서 걷고 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자전거를 타는 젊은 사람들, 산책하는 노인들, 작은 물고기와 오리 떼, 철마다 색깔이 바뀌는 나무들을 마주한다. 이 모든 것들이 매일 색다른 감동을 소소하게 느끼게 해준다.
유난히 더웠던 2024년 여름 어느 날, 책을 골라서 열람석에 돌아가는 도중에 도서관 복도에서 작은 입간판을 보았다. 도서관에서 자체적으로 기획한 과학 강좌 프로그램 안내였다. 마침 그날부터 강좌가 시작된다고 표시되어 있어, 강의장에 직접 가서 준비 중인 도서관 직원에게 혹시 수강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오래전에 사전 예약이 완료되었지만, 일단 오늘 한번 들어 보시고 예약 취소자가 있으면 확인 후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주 2회, 총 12회의 교양 과학 강의를 듣게 되었다. 밋밋하던 도서관 라이프에서 작은 변화의 모멘텀이 마련되었다. 강의가 오전 시간이어서 그런지, 수강생 대부분은 중년 이후의 여성들이었다. 강사는 40대 초반의 남자였고, 유체역학을 전공한 공학박사였다. 강의 마지막 날, 수강생들이 강사와 그동안 수강 소감을 나누는 시간이 주어졌다. 수강생 대부분이 강사에게 수고하셨다, 강의 준비에 고생하셨다 등 좋은 말을 주로 했다.
강사가 그동안 강의 중에 인문사회 분야의 사례를 잘못 설명할 때,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사실관계를 바로잡아 주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강사가 향후 다른 곳에서 강의할 때, 무의식적으로 똑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을 잡아주기 위해서였다. 내가 코멘트하기 위해 손을 들었을 때 강사는 살짝 긴장한 듯한 미소를 나에게 보냈다. “과학 지식을 단순히 나열식으로 전달하지 말고, 본인의 지향점을 좀 더 구체화하고 스토리라인을 강화해 강의하면 수강생들의 지성과 지혜에 큰 자극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강사에게 좀 더 욕심을 보탠 것이다. 이 강좌는 도서관의 자체 기획 프로그램인 지혜학교의 한 과목으로 개설되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지혜·지성·지식이라는 세 가지를 엮어서 강사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회사를 다닐 때는 직원들에게 강의도 하고, 회의를 주관하면서 제법 말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말할 시간이 거의 없다. 얼마 전 술자리를 같이 했던 선배가 살짝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집에서 매일 반 페이지가량의 글을 쓰고 난 뒤, 그것을 읽는 연습을 한다.”
나 역시 그 선배의 말에 100% 공감한다. 이제 퇴임한 내 이야기에 귀담아 들어줄 사람도 없고, 진짜 하루 중에 단 몇 분도 제대로 된 말할 시간과 공간이 없다. 비록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쓰고, 영상 콘텐츠를 시청한다고 하더라도 말하는 것 역시 중요한데 그 부분이 늘 아쉬웠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뜸한 산책길 구간에서 노래도 부르고, 가급적 소리 내어 말하려고 노력한다.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렸던 지난겨울 동안, 산책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유쾌하게 다니다 보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추위도 훨씬 덜 느꼈다. 나는 외부에서 강의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기회가 된다면 그동안 내가 썼던 글과 책을 기초로 해서 멋진 강연을 재능 기부식으로 할 계획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좀 더 콘텐츠의 전문성과 밀도를 쌓을 것이다. 내 강의를 듣는 누군가로부터, 내가 강사에게 코멘트했던 말을 똑같이 들으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공공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전문가들의 강의도 들으면서 다양한 지식들을 접하고 있다. 이제 나의 학습은 회사의 승진이나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지적 세계의 외연을 넓히는 긴 여정이다. 이런 공부를 하면서 머릿속에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강한 스파크가 일어나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때로는 감동해 눈물이 맺힐 때도 있다. 그러면서 스스로, 지성을 뛰어넘어 지혜의 세계에 들어선 것 같은 나르시시즘에 가끔 빠진다.
오늘도 공공도서관에 간다. 이 길이 지금 당장은 비록 외롭더라도, 도서관 속에서 나를 격려하고 더 멋지게 가꾸고 싶다. 나는 도서관에서 지식을 얻고, 산책하며, 지성과 지혜의 근력을 키우고 있다. 덕분에 회사에서 퇴임했지만 아직 항상 꿈을 꾸며, 그래서 청춘이라고 자부한다. 공공도서관에는 오늘도 입시, 취업 준비, 자격증 준비, 여가 활동을 하는 다양한 연령대의 분들이 많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마무리되고, 이제 나를 포함한 X세대들의 본격적인 은퇴가 시작되었다. 나처럼 전문 자격증 없이 은퇴한 사람들이, 공공도서관에서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버드대 로스쿨의 석지영 종신교수와 소설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이 자신들이 어렸을 때 미국의 공공도서관에서 이루어낸 멋진 드라마처럼, 도서관에서 노력하는 그분들도 머지않아 큰 성취를 이루면 좋겠다. 공공도서관 덕분에, 매일 성숙해지고 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