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5년 9월 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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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은 로버트, 6살 수컷 똥개입니다.
사람 나이로 치자면 어언 마흔에 접어들었고요, 어깨너머로 배운 걸 들이대자면 불혹입니다. 이제 막판을 겸허히 받아들일 처지가 되었습니다. 글쎄 인간들이 불혹을,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고 떠들면서도, 제가 습관적으로 꼬리를 치는 것처럼 흔들리는 모습을 보자면, 대체 불혹을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해집니다. 아마도 우리 심술궂은 불독을 잘못 적었을 수도.
어제는 종일 잠을 설쳤습니다만 이젠 담담합니다.
고스란히 운명을 감내하자, 이런 턱도 없는 생각일랑 없습니다. 운명이 있기에 똥개가 있었던 게 아니라, 내가 있기에 운명이 악귀처럼 따라붙어 귀찮게 했다는 편이 맞겠군요. 지금까지 똥개에게 있어서 운명은, 밥그릇에서 먹음직했던 뼈다귀 하나만 못했습니다. 그러니 운명보다는 곧 들이닥칠 상황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저는 당당히 상황을 직시할 것이고 거기에 맞게 처신하려 합니다. 어차피 우리 종자들은 인간보다 몰염치하고 사나우며 열등하다고 무시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귀동냥으로 배운 바, 『열반경』의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부처님 말씀처럼 동물과 사람은 다르지 않습니다. 죽음만큼은 차별이 없는 하늘의 은총이며 선물입니다. 죽은 사자보다 살아 있는 똥강아지가 백 번 낫다, 기억하시지요? 그러나 뒤집자면, 죽은 인간이나 사자나 똥강아지에 무슨 나뉨이나 차별이 있겠어요.
태어나면서 저는 메리라고 불렸습니다. 늘 눈곱이 덕지덕지한 대다, 콧물과 설사를 달고 살았지요. 퍽퍽 대는 물똥을 갈기면, 똥보다는 기다란 기생충이 태반이었지요. 부모님은 누구인지 기억에 없습니다.
그때 제 주인은 은석이라는 아이였습니다. 툭하면 저와 밥그릇을 걷어차거나 머리통을 쥐어박았습니다. 은석이 엄마는 늘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분이셨죠. 그분은 사람이나 개나 사물이나 상관없이 늘 불만이 가득했고, 그것조차 여의찮으면 자기 앙가슴을 탕탕 두드리거나 죄 없는 접시를 막무가내 패대기쳤습니다. 부아가 치밀면 애꿎은 제게 막대기를 사정없이 휘둘렀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강아지 치고는 일찍 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철이 든다는 일은 한낱 괴로움에 불과했지요. 병약한 몸이 무거워진 혼까지 짊어지느라 더욱 비실거렸으니까요. 자연스럽게 어둠이 제 몸을 감싸면, 큰개자리와 작은개자리를 통틀어 이르는 견성(犬星)을 찾으며, 현재 이루어진 사실을 뜻하는 견성(見成), 즉 제 처지를 심히 비관했습니다. 천지개벽 또 다른 견성(見性)이 있다는 건 전혀 몰랐습니다.
수컷인데도 토속적이지 못한 메리라는 이름은 거추장스러웠습니다. 나중에 제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메리--스펠링은 넘어가고요--는 즐겁거나 명랑한 상태를 말하더군요. 세상에나 멍멍! 그럴 수는 없는 법이지요, 암. 차라리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면 이해를 하겠습니다. 비참하고 거기다 병든 몸과 혼을 찌그러진 밥그릇과 함께 끌어안고 버팅기는데 밤낮 메리, 메리, 메리, 메리라니요. 물론 뒤에 기적적으로 제 이름은 로버트로 바뀌었습니다만.
생뚱맞은 이름이었지만, 쫑이나 워리, 메리, 순덕이, 순실이, 멍멍이, 바둑이가 판치는 촌동네에서 로버트는 그런대로 존재감을 발휘하는 이름이 되었지요. 원어민들은 로버트 대신 ‘롸벗’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만 뭐 로버트만 해도 촌에선 있어 보이니까 상관없었습니다. 하긴 제대로 된 존재가 아니라면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만.
그날이 가물가물 기억납니다. 대체 몇 끼를 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실 물조차 챙겨주지 않아서 기진맥진했습니다. 차라리 이대로 떠났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인간은 전생을 떠듭니다만, 전생 따윈 믿고 싶진 않더군요. 내가 전혀 모르는 그 전생이란 놈 때문에, 왜 왜 왜 똥강아지로 세상에 툭 떨어진 제가 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요?
뒷산 너머 사찰에서 우릉우릉 스피커를 통해 흘러드는 풍경 소리나 법문마저 짜증났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과 운수를 띠와 관련시키더군요. 개를 포함해서 12종 짐승은 무지한 중생을 깨우치려는 열두 보살이라고 떠들더군요. 매년 열두 달에 걸쳐 서로 교대로 인간계와 천상계 중생을 두루 교화시키려 애를 쓴다더군요.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지요. 개 처지에서 바라보는 인간과, 인간이 바라보는 개는 과연 무엇을 교화시키며, 불성은 어떤 의미가 있을런지요.
어느 날, 거의 실성한 저를 걷어차다가 은석이는 노끈으로 제 목을 묶었습니다. 저는 힘없이 질질 끌려갔습니다. 마을 공터는 쓸쓸했고요 새의 지저귐마저 없었습니다. 은석이를 따르는 조무래기 몇이 돌아가며 삽질을 했습니다. 딱 제 몸에 맞는 구덩이 하나를 파더군요. 저는 나름 감사했습니다. 멍멍탕집이나 복날 몽둥이 세례를 받고 쫑치는 견생들에 비해 개무덤 하나는 건질 테니까요. 인정하고 싶진 않으나 포기가 허락하는 평온은 최대한 누리고 싶었습니다.
몸뚱이를 감싼 흙은 선뜩했으나 이내 푸근해졌습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엄마 품에 매달려 형제들과 젖꼭지를 빨던 그때처럼 넉넉해졌습니다. 아이들은 제 머리통만 지상으로 꺼내놓고 낄낄댔습니다. 한 아이가 고추를 꺼내어 저를 정조준했습니다. 허리를 꺾던 다른 아이도 자기 고추를 꺼내었습니다. 그때 은석이가 외쳤습니다.
“개새끼를 향해 발사!”
저는, 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모욕을 치욕을 고문을 감내했습니다. 우리에 비해 지독한 인간의 지린내와 물줄기를 말입니다. 개존심에 입을 꼭 다물었습니다. 목이 타들어 가는 통에 핥아 먹고 싶다, 란 생각도 들었으나 저는 그 고비를 당당히 이겨냈습니다. 목덜미를 타고 오줌은 땅속에 묻힌 몸통까지 푹 적셨습니다. 서서히 가렵고 따끔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죽어, 죽어, 똥강아지 메리 죽어랏!’ 막대기로 제 머리통을 사정없이 휘갈겼습니다. 아마도 그때, 정신을… 잃었던 모양입니다. 나중에야 눈을 뜨고 나서야 개생에도 기적이 있구나, 감격했습니다. 소나무 숲을 휘돌아 날아오는 법문 한 토막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인간처럼 개에게도 불성이 있냐 없냐를 따지더군요.
당나라 때, 조주라는 고승의 선문답이었습니다. 제자가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묻자 스승은 ‘있다’ 했다가도 ‘없다’ 말을 뒤집었답니다. 이 문답을 개와 불성에 관한 것이라고 해서,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라고 하더군요. 뜻은 모르겠으나 저는 숙연해졌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고, 사람이 개를 괴롭히고, 개가 사람이나 다른 개를 괴롭힌다면 그야말로 12보살뿐 아니라 대명천지 모든 보살들이 뛰쳐나와 외쳐야 맞겠지요. 불성이 없는 인간이나 개나 같은 짐승이라면, 반대로 불성을 깨우친 인간이나 개는 똑같은 보살이라고 말입니다.
제 두 번째 주인, 아니 친구는 영옥이라는 머스마였습니다. 은석이와 3학년 같은 반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영옥이가 공터를 지나가다가 소란스러운 광경을 마주한 모양입니다. 강아지라면 환장하는 영옥이는 얼마 전, 세 살배기 친구인 쫑과 이별을 했답니다. 언덕에서 경운기가 탈탈거리자, 호기심 많은 쫑은 ‘대체 뭔 일 이래?’ 멍멍대다가 순식간에 굴러 떨어진 경운기에 그대로 깔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쫑은 다음 날 숨이 끊어진 후, 개장수가 냄새를 맡고 찾아와 사겠다고 감언이설을 늘어놓는데도, 영옥이가 울고불고 날뛰는 통에 넘기지 않으려고 하다가, 머릿속으로 지폐를 셈하던 아버지에 의해서 확실한 인수인계 후, 결국 솥단지 운명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삼가 애도를 표하나이다.)
그런 영옥이가 머리통만 밖에 내놓고 온갖 수모를 겪는 저를 보고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나 봅니다. 나름 은석이 취향을 알기에, 영옥이는 화려한 제스처를 써가면서 주머니에서 꺼낸 일자형 갈릴레이 망원경과 지프차 미니어처를 흔들자마자 은석이는 0.1초 만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조무래기들은 우르르 은석이 곁으로 몰려가 붕붕댔습니다.
“물리기 없기다!”
“당연하지! 여기 얘네들두 전부 봤으니깐, 너야말로 죽었다고 물리 지나 마라!”
영옥이는 굳게 다짐을 받고서야, 막대기로 흙을 파낸 다음, 저를 구덩이에서 꺼냈습니다. 얼굴과 코를 잔뜩 찡그리며, 지저분한 제 몸을 신문지로 감싼 후, 양팔로 떠받치고 자기 집으로 바삐 뛰었습니다.
저는 부뚜막 자연치료 요법을 통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영옥이 엄마는 ‘짐승 밥그릇이 지저분하면 집 안이 지저분해지는 거다’ 란 첨 듣는 요설을 내세우며, 인간들 밥그릇처럼 제 밥그릇을 깨끗하게 씻은 다음, 정갈스러운 음식을 내놓았습니다. 그렇게 저를 우대했기에 감격했습니다. 물론 영옥이 누이동생, 부모님의 헌신 또한 한몫을 했습니다. 영옥이는 밤에 제가 끄응 한 소절만 내뱉으면 부모님 모르게 저를 품에 안고 자기 이불 속에 끌어들이고는 같이 잠을 잤습니다. (쉬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쉬잇!)
얼마 후, 제가 기력을 회복해서 영옥이와 같이 사방을 뛰어다니자 영옥이 아버지가 넌지시 엄마에게 눈짓을 한 모양입니다. 행여 훔쳤다는 말 듣기 싫으니까, 은석이네 집에 저를 다시 돌려주라고 말입니다. 당연히 영옥이와 누이는 울상이 되어 아버지 허리춤에 매달렸습니다. 엄마가 한숨을 폭폭 내쉬면서 혀를 끌끌 차니까 그럼 알아서 하라고, 아버지는 점잖게 한발 물러섰습니다.
은석이 집에 다녀온 엄마는 얼굴이 달덩이가 됐습니다.
‘일 없다고 하니 이제 진짜 네 것이다.’
그러면서 좀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왜냐면 은석이 엄마는 내다 버린 강아지가 보란 듯이 회복되어서, 꽤 의젓하게 커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자기 개라면서 돌려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에이, 어른들이 그럴 리가. 저 또한 일말의 불안감은 있었으나 금세 잊었습니다.
어차피 떠나야 할 판에, 확실하게 밝히고픈 얘기가 있습니다.
영옥이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 제 이름은 짝퉁 ‘쫑’에서 ‘로버트’가 됐습니다. 영어 시간에 그 이름이 맘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늠름하게 자랐고, 저를 흠모하던 동네 암컷들 몇을 통해 자손 번창의 축복을 꽤나 누렸습니다. 후미진 구석이나 확 트인 벌판에서 불타오르던 뜨겁고 화려한 시간에 대해서는 인간들이 더 잘 알 테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오합지졸이 판치는 동네에서 저를 당할 위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견성(堅城), 즉 침입이나 피해 따위를 미리 막는, 튼튼하게 쌓은 성을 말합니다. 우습겠지만 사찰에서 매일 건너오는 풍경 소리와 법문은 저를 어느새 든든한 성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견성(堅城)은 그대로 견성(犬城)이 되었지요.
워리라는 수컷은 근심 걱정이라는 워리——스펠링은 넘어갈게요——처럼 늘 불알이 축 늘어진 데다 꼬리를 사리고 짖어 대기만 해서 제 상대가 못 되었습니다. 그렇지요. 인간 또한 목청만 높이며 오두방정을 떠는 자들은, 막상 불의에 맞설 상황이 닥치면 내빼느라 정신이 없지 않나요?
여타의 잡종들 순실이나 순덕이와 전통스러운 바둑이마저 제 곁에 얼씬조차 못 했습니다. 제가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눈을 부라리면 사방으로 내빼기 바빴습니다.
물론 저는 제 보잘것없는 기운 하나를 의지하고 행패를 부리는 양아치 개는 아닙니다. 세상은 넓어서 호랑이나 사자 버금가는 명품 개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들었기에 건방을 떨 의도는 추호도 없답니다. 누가 봐도 저를 진돗개라든가 풍산개로 불러 준 적은 없으나, 기가 죽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다만 이유 없이 주변에 행패를 부리거나 어린 강아지를 괴롭히는 개라면 으름장을 놓았을 뿐이지요.
특히 약삭빠르기로 소문난 순덕이는 남의 떡이나 뼈다귀를 강탈해서 제 앞에 내려놓고, 2인자가 되레 온갖 아양을 떨었지만 구역질이 났습니다. 아시지요? 인간 세상에서도 지도자라면 먼저 개끈, 아니 가방끈을 떠나서 기본 매너와 품성이 리더십보다 먼저 아니던가요?
사실 순덕이는 손을 볼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제가 나서지 않아도 혼자서 붕붕대다가 강물에 뛰어들더니 그만 하구로 떠내려가고 말았으니까요. 욕심이 뒷산보다 더 높은 그 녀석은 하필 전우들을 외면하고, 누군가 던져 주는 허연 통닭을 통째로 낚아채서 삼키고 말았는데요, 아뿔싸, 불구덩이에서 갓 꺼낸 통무우였다지요. 사나운 개를 유순하게 만든다는 근거 없는 처방이었지요. 사자교인(獅子咬人)이랄 수도. ‘돌을 던지면 개는 돌을 물지만, 사자는 돌을 던진 사람을 문다’고 들었습니다. 현상에 집착하는 인간을 개와 비교하더군요. 경전에서는 애욕의 결박을 끊지 못하는 무지한 중생을 ‘기둥에 묶인 개’라고도 하고요. 뭐 어찌 보면 순덕이나 저나….
조금 씁쓸하긴 하네요. 그런 개죽음은 누구에게든 닥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앞에서 떠들었던 이런저런 견성이 아니라, 진짜 부처가 원하는 견성(見性)을 고뇌하기 시작했습니다. 귀가 닳도록 듣다 보니까 자연스레 무얼 말하는지는 알았습니다. 헛된 생각과 정신을 홀려 생각을 흐리게 하는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자기 본래의 천성을 깨우쳐 앎. 자기가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기. 말이 그렇지 그게 어디 쉬운가요? 제 사타구니에 들붙어 같이 고뇌하는 똥파리를 꼬리로 칠까 말까 역시 고뇌하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개목줄 탓에 그만 견성(堅城) 정도로 만족하자, 나름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속에서 치미는 근본적인 갈증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한 양동이 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속살의 갈증. 쓸쓸하거나 슬픈 시간이 조금씩 늘어갔습니다.
저는 강탈, 강간, 성희롱, 폭행이나 심술을 부리지 않았으며, 제 영역을 벗어난 소나무나 전봇대에 한쪽 다리를 걸친 채 폼 나게 쉬를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반대로 내 구역에 어떤 개라도 침입해서 한 방울이라도 오줌을 흘렸다면 녀석의 목덜미를 물자마자 한 바퀴 돌려 팽개쳤습니다. 네, 심히 못난 짓거리였습니다. 저라고 왜 약점이 없겠어요. 아마도 그건 트라우마의 일종이겠지요. 어둠 속에서 제 몸을 관통하던 오줌줄기와 그 비참함, 추위, 고독, 슬픔, 저주, 증오, 자포자기 등등 말입니다.
아, 그 얘기를 하려던 참에… 죄송합니다. 인간은 살 냄새 풍기는 얘기를 에로틱하다고 표현을 하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사지를 벌벌대는, 이 표현이 어울린다고 봅니다만. 글쎄 어느 정도인지는 읽어 가며 판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날은 영옥이, 아니 도련님? 아니 제 친구가 참고서와 씨름하다가 골이 아팠는지 제 목줄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뒤편 야산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저는 별 볼 일 없는 ‘나 잡아 봐라’에 식상했으면서도 간만에 늠름한 가슴으로 바람을 밀어내며 질주했습니다. 나지막한 야산을 지나고, 호젓한 저수지 둘레길로 같이 달음박질을 쳤습니다. 코끝을 스치는 미풍에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뒤로 물러나는 바람처럼, 은석이와 그 조무래기들의 포악질을 너끈히 뒤로 흘려보내고 흘려보냈습니다. 어쩌면 그 포악질 때문에 구원자 영옥이 도련님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의 살랑살랑 꼬리란 결국 용서와 화해의 표시 아니던가요.
도련님을 한참 앞서가던 저는 급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인간의 욕정 냄새. 그렇습니다. 인간이 사랑을 나눌 때, 그 묘하고 당혹스러우며 달뜬 동시에 켕기면서도 음란하며 엉큼한 냄새. 뒤를 돌아보니까 친구는 저를 쫓아오다가 숨이 가빠서 저 멀리에서 멈춘 채 헐떡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순간 망설였습니다. 돌아갈까? 아니면 저 불온한 향기를 향해 좀 더 나아갈까?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몸을 낮추고 냄새의 진원지를 향해 기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뜨악한 장면과 딱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수풀이 우거진 곳, 살짝 옴팍진 곳에서 허공을 향해 솟구치던 시커먼 볼기짝 하나. 그건 숨소리 거친 사내의 엉덩이였으며, 그 아래에서 사지를 벌벌대는 여자는 다름 아닌, 아주 익숙한 여자의 냄새로 미루건대 낯익은 여자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커엉’ 헛기침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그때 저를 뒤돌아보며 허리를 세우던, 사내의 핏발 선 눈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간간이 뒷산을 넘어오던 설법 속의 ‘아수라’가 바로 그 사내의 얼굴이 아니었을까, 직감적으로 알아챘습니다. 아무리 난폭하거나 흉악한 개라 할지라도 그런 모습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마군(魔軍), 마구니(魔仇尼)였습니다.
사내의 목덜미에 깍지를 낀 채 드러난 여자의 눈은 잔뜩 풀어져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사내와 달리, 펑퍼짐한 여자는, 바로 제가 어렸을 때 무지막지 막대기를 휘두르던 그 여자였습니다. 저는 바로 뒤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숨을 고르던 도련님도 영문을 모른 채, 저를 뒤쫓으며 집을 향해 부리나케 내달렸습니다.
그 아름다운 날을 기억합니다.
제 첫사랑 귀요미와의 만남과, 영옥이 도련님을 따라서 처음 예배당에 갔을 때 그 엄숙과 고요와 순결을 말입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된 친구는 그때 S라는 여학생과 예배당 돌계단에서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더니 심히 요란스러운 꽃편지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때 코웃음을 살짝 치기도 했습니다. 꽤 자손을 사방에 퍼뜨린 제 입장에서는 소년과 소녀는 내숭 떠는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요. 고추도 덜 여문 인간의 풋사랑이 참 싱거워 보였습니다.
S는 저희 마을에서 오 리 정도 떨어진 동네에 사는, 영옥이와 같은 학년 얌전한 소녀였습니다. 글쎄,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S 동네에 사는 영옥이의 친구가, 소개를 해 준 것으로 압니다만, 저는 다만 어느 날 해질녘 둘이 만나서 철길을 한참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없이 데이트를 즐길 때, 경호원 노릇에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논밭을 가로질러 길게 뱀허리로 이어진 철길은 그대로 개생이며 인생이었습니다. 상상이 되시나요? 아무런 대화도 없이, 소년은 앞에서 똥폼을 잡으며 걸어가고, 소녀는 다소곳이 미소를 지으며 몇 걸음 뒤에서 소년의 발자국을 찾는 듯, 바닥에만 눈을 박으며 사뿐사뿐 걸어가던 모습을요. 그러다가 주변이 점점 형태를 잃어가며 무너질 때 즈음, 소년이 뒤돌아서자, 소녀 또한 서운한 눈빛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렇지요. 소녀를 집에까지 다시 배웅해 주어야 했지요.
저는 그때 문득 어디론가 팔려간 귀요미, 개존심 꽤나 세서 저를 애먹였던 귀요미가 무척 그립곤 했습니다. 잘 빠진 몸매에, 요염한 속눈썹과 칠흑단 꼬리는 우아했으며, 긴 혀로 자기 입술을 쓰윽 핥을 때면 저는, 저는 정말이지 자지러지곤 했으니까요.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넘어서 십고초려를 한 끝에, 그녀를 품에 안았을 때, 아니 뒤에서 그녀를 허겁지겁 껴안았을 때, 저는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란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눈이 뒤집힌 상태에서 헐떡이며 격하게 발버둥을 친 결과, 그녀는 주인 댁에 다섯 마리의 제 핏줄을 넘겨주고, 산 넘고 물 건너서… 모르는 곳으로 사라졌습니다. (끄응 끄어헝…) 마지막 그 처연한 까만 눈을… 잊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제 목줄을 밤새도록 물어뜯다가 끝내 그녀 뒤를 따르지 못했습니다. 목줄은, 그러니까, 저는 위험한 짐승이 아니었지만 제가 야밤에 동네를 한 바퀴 순찰이라도 돌라치면 주민 몇이 겁이 난다며 영옥이 아버지에게 으르렁댔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때는 인간이란 인간은 모두 물어 죽이고 싶었습니다. 견성이고 개성이고 불성이고 간에,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개끈 개줄을 불태우고 싶었습니다. (끄으흥, 끙끙…)
소녀를 집에 배웅한 영옥이는 그대로 집으로 가는 대신, 가까운 예배당 돌계단을 헤아리며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사춘기가, 저도 겪어봤습니다만, 사춘기가 그렇게 뜨겁고 저릿하고 차가우며 영혼마저 파드득 떨리고 비틀리고, 정처 없다가 아프고 몽롱하고 행복한 모습이란 게 새삼스러웠습니다.
친구의 기도하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사찰을 지나면서 목도했던 기도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저는 기도를 모릅니다만, 두 눈을 감고, 양손바닥을 단정하게 맞붙인 채, 바위나 커다란 나무처럼 미동조차 없이 입술을 옹알대면서, 뭔가 초점을 모으고 또 모은 다음, 속내를 다소곳이 토할 때, 제 주변이 잔잔하게 떨려오고, 제자리에 붙박인 별들이 부산하게 흩어졌다가 다시 허겁지겁 제자리에 돌아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온몸을 바닥에 붙인 채로, 눈을 감고 제게 목숨과 고진감래(苦盡甘來)와 감래고진을 주신 그 누군가를 향해 끄응 신음을 했습니다. 그처럼 평화로운 순간은 감히 없었을 것입니다.
집중하지 않아도 뒷산에서 넘어오는 법문이 속을 치고 들어왔습니다. 그날 사찰에서는 ‘구잡비유경’이라는 불경을 논하던 모양입니다. 귀가 쫑긋,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개에게도, 짐승에게도 성불의 가능성은 무궁하다고? 옛날에 밤낮으로 경전을 공부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개 한 마리가 평상 밑에서 밥도 잊은 채 독경 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나중에 죽은 그 개는 사위국의 여자로 환생을 했다. 그 여자는 스님을 따라 출가한 후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 결국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간추리자면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한쪽으로는 헛웃음이, 반대쪽으로는 참으로 부럽구나 싶더군요. 여자로 환생하여 부처가 된다? 막연한 희망은 구체적인 불행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그런 희망이라면 붙잡고 싶었습니다. 목줄로 만들어 제 목에 걸고 매일을 살고 싶더군요.
평온은 어느 순간, 예기치 못한 위태로움을 불러오곤 한답니다. 그날이 딱 그랬습니다. 은석이 집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동네 개들을 거느리고 유유자적 행차를 하다가 그 정경과 맞부딪혔습니다.
마당에 패대기당한 여자는 바로 은석이 엄마, 제가 저수지 옴팍진 곳에서 목격한 그 여자였습니다. 저를 심히 괄시하고 지저분한 밥그릇에 상한 음식을 대충 던져주거나, 막대기를 휘두르던 바로 그 여자였습니다.
시퍼런 낫을 들고 날뛰는 은석이 아빠를 동네 어르신 몇이 달라붙어 만류하고 있었습니다. 은석이 아빠는 제풀에 지쳤는지 별안간 낫을 지붕 위로 날린 다음, 툇마루에 주저앉더니 나무기둥을 이마로 퍽퍽 들이받다가 뒤로 벌렁 나자빠졌습니다. 얼굴이 하얘진 은석이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제게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한 입 콱 물어줄까 하다가 안쓰러워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날 영옥이 도련님이 객지로 공부하러 떠난 탓에 오래 비워두었던 아래채로, 엄마는 얼굴이 밤탱이가 된 은석이 엄마를 부축하고 데려와서는 자리에 눕혔습니다. 신열에 들뜬 그녀에게 엄마는 미음을 떠 넣어 주고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주었습니다. 저는 기분이 냉랭했지만, 가슴 한쪽이 따뜻해지고, 축 처진 불알이 다소나마 탱탱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건 마치 법문이 들려주던 중생들의 수호신 약사여래(藥師如來) 모습이었습니다. 보살의 몸으로 수행하면서 12가지 대원(大願)을 세웠는데, 일곱 번째 대원이 제병안락(除病安樂)이었다지요. 모든 병을 없애고 즐거움에 편안하도록 하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언젠가 집을 찾아온 교회 전도사가 들려주던 예수의 사랑과도 맥이 닿아 있었습니다. 네 몸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라. 과연 제게도 그런 시간이 올는지.
아쉽지만 저는 이제 운명에게 순종하는 대신, 제게 닥친 상황을 겸손히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며칠 전, 은석이 집에서는 늠름한 저를 자기들 소유라고 다시 주장했고, 뻔히 상황을 아는 동네 사람들과 은석이 조무래기들조차 안면몰수하고는, 맨 첨부터 제가 은석이네 개였다고 편을 들었던 때문입니다. 은석이는 비겁하게도 영옥이 도련님이 제 몸값으로 치렀던 물건들도 받은 적이 없다며 떼를 썼습니다. 오히려 도련님을 사기꾼, 도둑놈으로 몰아붙였습니다.
평소 조용하던 영옥이 아버지, 그러니까 제 큰주인님이 처음으로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져서는 마루 옆에 쟁여둔 각기목 하나를 꺼내어 자기 손바닥을 탁탁 쳐댔습니다. ‘경우가 이게 아니지’ 하고 집 밖으로 나설 채비를 하자, 영옥이 엄마는 죽기 살기로 팔에 매달렸습니다.
공수부대 출신인 아버지가 인상을 한번 찡그리면, 사방 십 리 인근에서 그 누구도 맞짱 들 위인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저는 그분의 복사판 개, 어쩌면 있어 보이는 말로다가 도플갱어, 아니 도플개라 해도 무방하겠군요.
“우리는 할 도리를 다 한 거예요. 그냥 팔아서 돈으로….”
“어찌 개만도 못한…. 사람들이 말이지, 쯧쯧쯧.”
“고소하겠다니 편하게 우리가 양보하자구요.”
“그 화냥년을 당신이 데려다 병간까지 해주었는데 어찌 이럴 수가!”
“여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서운하지만 어쩌겠어요. 잘 키웠으니 여기서 끝냅시다.”
“차라리… 잡아버리는 게 낫겠어! 두 토막을 내서 한 토막 던져주고 싶어!”
“아이들 듣잖아요. 빈 말이라도 그건 안돼요. 팔아서 끝냅시다.”
집에 내려와 있던 도련님과 누이는 방구석에서 눈물을 질질 짜면서, ‘은석이 개자식’ 욕지기를 뱉었습니다. 처음 듣는 쌍욕이었습니다. 개만도 못한 은석이네를 개자식이라고 하다니 섭섭했습니다. 최고의 쌍욕 중 하나가 개새끼지요. 하지만 인간이 가장 사랑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귀여운 강아지 아닌가요? 언제 어디서 누가 왜 그런 강아지를 개새끼라는 욕으로 뒤바꾸었는지 못내 궁금하고도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아마도 우리 개 중에서 그런 욕을 먹어도 싼 파렴치범이 있었겠지요. 그러려니 참아내야지요.
아무튼 그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버지는 방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가더니 마시지도 못하는 술에 취한 채, 늦게야 돌아왔습니다.
은석이네 집을 찾아가서 ‘이 개만도 못한 놈들아’ 소리소리 내지르자 은석이네 부모는 얌생이처럼, 걸음아 나 살려라, 줄행랑을 놓았다고, 다음 날 아침에서야 알았습니다. 결국 저를 개장수에게 팔아서 그 돈을 은석이네 마당에 던져주는 걸로 정리를 하셨지요.
아, 죄송합니다.
저 멀리서 1톤 포터가 덜컹거리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쩌면 불행했으며, 어쩌면 인간보다 행복했던 저는 이제 제 목에 걸릴 쇠줄을 기다립니다. 냄새만으로 저는 알 수 있습니다. 개장수가 운전석에서 내리는 순간, 팔려가는 개들은 꼬리를 사타구니 사이에 감추고 혀를 안으로 말아 넣은 다음, 신음조차 지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일부는 오줌까지 지린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당하렵니다. 비겁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으렵니다. 저는 세상에 태어나서 죄를 지은 적도 없거니와, 남의 암컷을 욕심부린 적도 없습니다. 주인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했으며, 약한 놈을 물어뜯지도, 남의 영역을 침범치도 아니했고요, 더러운 음식은 피했으며, 어린 암놈을 희롱하거나 음탕한 눈길을 건넨 적조차 없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외람되오나, 암컷 셋을 앞에 두고 저 혼자서 열나게 썸 타지도 않았으며, 암컷 하나를 가운데 두고 수컷 셋이서 돌림빵을 시키지도 않았습니다. 물뽕이나 정신이 몽롱해진다는 수상한 약은 냄새조차 피했습니다.
그래도 안타까움을 감출 순 없습니다. 이런저런 견성 말고, 참 견성(見性)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야 하니까요. 장엄한 십이지신 중 저희 개들은 여전히 불법수호자의 역할을 자임합니다만, 부처의 견성을 이루지 못한다면 어찌 찬란한 장수로서 불법을 수호할 수 있을까요. 보물 제1429호 경주원원사지석탑에 가면 상층기단에서 늠름한 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데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 또한 아쉽고 아쉽습니다. 환생을 믿진 않으나, 만일 환생한다면 영옥이 가족들과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운 나쁘게 다시 개나 소나 돼지로 태어난다 해도 말입니다. 성불 환생을 맛보았다면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겠지요.
오수(獒樹)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고려 후기의 문신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補閑集)』에 실려 후대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지요.
고려 시대, 전라북도 임실에 살던 김개인(金盖仁)이라는 사람이 개 한 마리를 길렀습니다. 어느 날 나들이를 하는데 개도 주인을 따라나섰지요. 주인이 술에 취해 길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가까이 불이 났습니다. 불길은 주인에게로 점점 다가왔지요. 개가 아무리 짖어도 술떡이 된 주인은 도무지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개는 냇물에 뛰어들어 몸을 적신 다음, 불 가운데에서 이리저리 뒹글면서 불이 더 이상 번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기운이 다해 죽고 말았지요. 잠에서 깨어난 주인은 그제서야 내막을 알고는 노래를 지어 바치고 땅에 고이 묻어줬습니다. 그때 무덤에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라서 그 땅을 오수(獒樹)라고 했다지요.
사실이라는 말도 있고, 설화라는 얘기도 떠돕니다만 저는 사실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왜냐면 저라도 당연히 그리 했을 것이니까요. 아니 어쩌면 고주망태 주인 팔을 물고 늘어져 냇물에 같이 풍덩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이제 당당히 가겠습니다. 하늘님과 부처님이 진정 살아 계시다면 저를 기쁘게 거두어 주시겠지요. 오수가 자라서 무성한 잎이 깃들고 꽃이 피겠지요. 그러니 사나운 송곳니와 발톱을 거두고 당당히 가겠습니다. 살려주면 살 것이오, 죽이면 조용히 죽으리이다.
그게 무덤이든 불구덩이든 인간의 뱃속이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