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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의 추억

한국문인협회 로고 전의식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월 6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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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만났다.
그동안 잊고 지내온 풋풋한 시절의 얼굴과 마주치는 순간, 아련한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올랐다.
사진 속에는 지금도 TV에 등장하는 왕년의 댄스가수, 한국호랑이 연구가로 유명한 촬영감독, 그리고 2백만 구독자를 거느린 정치 유튜버가 나란히 웃고 있었는데 촬영 장소는 레닌그라드의 기차역으로 기억된다.
1991년 6월 초, 우리 일행 20여 명은 김포공항에서 대한항공을 타고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향했다. 방문 목적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소개하고 현지 모델들을 섭외해 헤어쇼와 패션쇼를 진행하는 행사여서 자연히 한식요리 장인과 유명한 의상디자이너, 헤어디자이너, 연예인 등이 선발됐고 현장 취재를 위해 문화부 기자 서넛이 동행했다.
서울이 모스크바보다 시차가 여섯 시간 빠른 탓에 오전에 출발하여 10시간 가까운 비행을 했는데도 현지 시각은 늦은 오후. 도착 당일 야간 침대차를 타고 행사 지역으로 가는 강행군이라 휴식 시간도 없이 바로 레닌그라드행 기차에 올랐다.
우리가 탄 야간열차는 열심히 철길을 달렸는데도 창밖은 여전히 대낮처럼 밝았다. 모스크바에서 합류한 고려인 가이드가 “이곳의 6월은 백야가 절정이라서 자정이 넘어야 어두워지고 새벽 4시면 다시 해가 높다랗게 뜬다”고 알려주었다.
밤새 쉬지 않고 달려 도착한 레닌그라드 기차역은 규모가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었는데 마침 출근 시간대라 그런지 역 안팎에는 현지인들로 북적거렸으나 그중에는 셰퍼드나 불도그 같은 대형견을 끌고 다니는 행인들도 여럿 보여 “소련은 강아지를 좋아해도 맹견을 좋아하는 나라”라는 느낌을 받았다.
전세버스에 올라 호텔로 이동하는 동안 우리말이 능숙한 고려인 가이드가 이 도시에 대한 안내를 시작했다. 1703년 러시아의 황제 표트르 1세는 북유럽 진출을 목적으로 늪지대인 이곳에 돌덩이를 쏟아 넣어 바닥을 메우고 화려한 궁전들과 성당을 건축한 신도시가 완공되자 모스크바였던 수도를 옮겨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다가 2백여 년이 지난 1922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스탈린이 수도를 모스크바로 다시 옮기면서 혁명의 대부 레닌을 추모하는 뜻에서 도시 이름을 레닌그라드로 개명했다고 한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핀란드만이 눈앞에 보이는 제법 큰 호텔이었다. 하지만 호텔의 아침은 딱딱한 빵조각과 치즈, 양젖, 커피가 전부일 정도로 빈약했다. 러시아는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집권한 후 1990년 가을에 한국과 수교했지만, 우리 정부에게 달러를 빌릴 정도로 경제가 무너져 현지에서 만나는 서민들은 대부분 고달픈 표정을 보였다. 도시 외곽에는 커다란 공장 건물이 여럿 보였지만 대부분 가동을 중단한 상태라고 한다. 또 대로변 상점에는 식료품을 사려는 사람들이 무작정 길게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도심 곳곳에는 러시아 황제들이 남긴 문화유적이 즐비했다. 우리나라의 경주처럼 성 이사크 성당,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 겨울궁전, 피의 구세주성당, 니콜라이 1세 기념비 등이 넵스키 대로를 둘러싸고 몰려 있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감상 시간이 촉박해 겉모습만 보는 경우가 있었으나 방문하는 곳마다 크고 호화로운 건축물에 넋을 잃기도 했다.
또 페테르부르크 근교에는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을 비롯해 황제 마을로 불리는 푸시킨 시에 예카테리나 궁전이 있었으나 폐장 시간이 촉박해 외관만 둘러보는 대신 이튿날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예르미타시박물관은 종일 관람하는 기회가 생겼다.
넵스키 대로와 연결된 넓은 궁전광장을 지나면 네바강 언저리에 연녹색 파스텔톤의 박물관 건물이 보인다. 이곳에는 러시아 역대 황제들이 수집한 300만 점 이상의 미술품이 3층짜리 5개 건물, 1천여 개의 방에 전시되어 모든 작품을 감상하려면 5일도 모자란다고 한다. 여기서 운 좋게 감상한 작품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마돈나 리타>, 피카소의 <두 자매> 등 기억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걸작품이 많았다.
이 도시는 예르미타시박물관 외에 문학과 음악 예술가들의 흔적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시성 푸시킨이 살았던 모이카 강변의 저택은 박물관으로 남아 있고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집필한 건물도 그의 유품이 담긴 박물관으로 보존되었으나 마침 휴관 날이라서 겉모습만 눈에 담고 돌아섰다. 또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과 더불어 최고의 발레, 오페라를 공연하는 마린스키 극장은 예르미타시박물관을 닮은듯 옅은 그린색 건물로 건축되어 음악 애호가들의 시선을 모은다.
문화교류 행사는 중심가에 있는 예술회관에서 이틀간 열렸는데 드레스 쇼와 헤어쇼에 출연하려고 대기실에 모인 러시아 모델들은 모두가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눈이 부셨다. “할리우드에 안 가고 왜 여기 있냐?”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뛰어난 미녀들만 뽑은 덕분인지 행사장은 성황을 이뤘다. 최초의 한국 행사여서 현지인과 고려인이 가득 좌석을 채웠고 로비에서 열린 전통 한식 전시회도 맛보기 음식이 순식간에 동이 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서울로 돌아가는 항공기에서 한 주간 겪은 일들을 복기해 보니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업무 출장으로 몇몇 나라를 다녔으나 미련이 남는 지역은 레닌그라드가 처음이었다. 명소를 절반 정도만 관람한 것이 마음에 걸려 언젠가는 다시 찾아 나머지도 모두 보고 싶다는 마음을 달래면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귀국한 지 6개월 만인 1991년 12월 26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정권을 옐친에게 이양하면서 소련이란 나라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옐친이 러시아로 국호를 바꾸자, 소련 연방 대부분이 독립을 선언했고 레닌그라드도 본래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았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러시아를 다시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틈틈이 여행 경비를 모았으니 혼자서라도 떠나겠다는 계획을 버리지 않았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시간을 보내다가 코비드19라는 암초를 만나 3년을 허비했다. 그리고 이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몇 년째 끝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 남은 생애 유일한 버킷리스트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 리바이벌’은 아마도 이뤄지기 어렵겠다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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