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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나무정이

한국문인협회 로고 노일환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월 6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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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나무정이’라 하기도 하고 ‘서나무제이’라고도 했다.
‘서나무’에 왜 ‘정이’라는 말이 덧붙었는지. 키 큰 서어나무들이 우거져 마치 숲의 머리처럼 보였기에 ‘정(頂)이’가 붙을 수도 있고, 동네 입구 논 사이에 있는 우물이 ‘살구정이’였던 것처럼 여기도 옹달샘이 있어 ‘서나무정이’라 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서나무정이는 동네 사람들에게 정겨운 숲 이름이었다.
서나무정이는 우리 동네 나무꾼들의 쉼터였다. 옛날에는 땔나무 없이는 살 수가 없기에 마을 사람들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다. 그 시절에 나와 내 친구들도 땔나무 하는 아이, 초동(樵童)이었다.
아침 일찍 산에 오르면서 쉬어가고 산비탈과 계곡을 타고 땔나무 한 짐을 해서 내려오다가도 여기서 땀에 젖은 몸을 식혔다. 서어나무가 우거진 시원한 숲 그늘과 여기서 만나면 더 정겹던 나무꾼들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지금은 그립고 애틋한 추억 속의 옛 풍정만 남아 있다.
서나무정이 들머리에 둥치도 크고 우람한 서어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특유의 울룩불룩한 근육질이 은빛 윤기를 내고 있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서어나무는 음수(陰樹)이면서도 햇빛을 좋아해서 볕을 쫓아 꿈틀거리며 자라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 된다고는 하나, 얼룩말을 타고 하늘로 높이 솟아오르는 듯한 이 나무의 위용과 기세가 숲의 수장(首長)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이 나무에 기대어 서면 서어나무숲 전체가 다 보였다. 우뚝 솟은 뒷산 솔봉(峰)은 자리를 양보하려는 듯이 저만치 물러나 있고, 좌우의 부드럽고 나지막한 산봉우리가 새가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것처럼 넓고 평평한 이 숲을 감싸고 있어, 그 지형과 산세가 세상에 둘도 없을 듯하였다.
키 큰 서어나무들이 한둘에서 서너 네댓까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모여 있어 그들만의 산동네 같았다. 아름드리나무들이 가지를 넓게 펼치고 있어 다른 키 큰 나무들은 이들의 기세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숲 밖으로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그래도 조릿대와 철쭉, 싸리나무가 여기저기 자그마한 군락을 이루고 있어 숲이 단조롭거나 쓸쓸하지는 않았다. 이 키 작은 나무들 곁에는 둥글넓적한 돌들이 군데군데 주춧돌처럼 놓여 있고 돌 주변에는 또 여기서만 볼 수 있는, 풀 한 포기 없는 까만 흙이 널찍널찍하게 퍼져 있어 그 옛날에는 큰 절터였거나 행궁터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들었었다.
무성한 나무 위에는 산새와 벌레가 날아들고 덩달아 바람도 불어와 쉬어갔다. 어떤 서어나무 그루터기에는 구멍이 나 있어, 여기서 사는 장수하늘소나 풍뎅이 같은 곤충들이 나무줄기와 땅 위를 자유롭게 날거나 기어다녔다. 어찌 생각하면, 이 숲은 자연과 생명체가 공존하는 이상 세계가 아닌가도 싶었다.
서나무정이에는 옹달샘도 하나 있었다. 숲 들머리에 우뚝 서 있는 큰 서어나무 앞을 지나 돌너덜로 내려가면, 계곡이 시작되는 지점에 삼각지붕처럼 맞물린 바위 두 개가 있고, 이 사이에 자그마한 샘이 있었다. 바위 두 개가 아기를 안은 엄마처럼 이 샘물을 품으며 위에서 흘러내리는 돌이나 흙을 막아주었다. 샘가의 청미래덩굴 잎을 따서 이슬처럼 맑은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면 갈증과 함께 피로도 풀렸다. 지게를 받쳐놓고 서어나무숲의 시원한 그늘에 앉아 있으면 나뭇짐처럼 무거운 마음도 녹아내려 신선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60여 년이 지나서 다시 찾은 서어나무숲은 옛날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무꾼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숲의 숨결도 잦아들었는지, 어수선한 분위기에 숲 전체가 쇠락해가고 있었다. 서어나무들은 한결같이 고목이 되어 줄기가 드러난 앙상한 가지에 파란 잎사귀만 바람에 나풀거렸다. 전에 없던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에 갈팡질팡 몸도 가누지 못한 줄기가 가는 나무도 뒤섞여 있고, 떨어져 내린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푹푹 쌓인 그 위로 조릿대의 휘어진 잎이 무성했다.
산 그림자가 내려앉은 그늘진 곳에서는 커다란 둥치의 서어나무가 중등이 끊어져 넘어진 채로 삭아내리고, 그 잔해가 썩은 나뭇잎에 덮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늙은 나무가 모여 있는 곳에는 큰 가지가 끊어져 옆 나무에 걸쳐 있기도 하고, 멀리서는 가지런한 세로무늬가 선명해 보이던 나무도 가까이 가서 보면 탄력을 잃은 근육질이 아래로 축 늘어지고 어떤 부분은 혹처럼 괴상하게 튀어나와 산 채로 뼈만 남고 육탈이 되어가는 듯 애처로워 보였다. 목청(木淸)을 따내기 위해 네모가 반듯하게 구멍이 뚫린 나무는 안이 텅텅 빈 채로 죽어가고 있었다. 숲과 함께 거기 있던 옹달샘도 바위가 어긋나고 돌과 흙이 가득 차 있었다.
서나무정이가 이렇게 변한 데는 오래 전에 난 산판의 영향이 컸다. 벌목한 소나무를 실어 나르기 위해 이곳의 지형과 숲의 특성을 무시하고 편리할 대로 산을 허물고 돌과 자갈을 긁어모아 임시로 산판 길을 냈다. 이 길이 그대로 방치되면서 홍수가 질 때마다 기존의 계곡 대신 새로운 물길이 되어버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물길이 깎아내린 비탈과 쓸려온 돌, 자갈이 산판 길을 뒤덮고 바람길도 바뀌면서 산의 지형과 숲의 생태마저 변화시켰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연의 진화든 인간의 간섭이든 간에 숲은 변하기 마련이다. 서나무숲은 극상림으로 천이(遷移) 과정의 정점(頂點)이지만, 이 또한 변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곳의 서어나무들은 거의 모두가 고목이 되어 쇠잔한 모습이었지만, 오히려 흔적만 남은 옹달샘의 이끼 낀 바위와 그 주변에서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작은 나무들이 새로운 숲을 만들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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