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월 6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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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플러 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신작로를 반 시간 남짓 타박타박 걸어가면 아버지가 일하시는 언덕배기 위 갈가뫼기 밭이 나타났다. 어머니가 싸 주신 아버지의 점심이 담긴 베보자기는 제법 무거웠다. 저만치 소나무 아래서 햇볕을 쬐던 꿩 한 마리가 내 발자국 소리에 푸드득 날아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고 아버지를 불렀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베보자기를 풀었다. 아버지는 스테인리스 밥그릇에 소복이 담긴 쌀밥을 내 몫으로 덜어 주시고, 감자를 넣고 맛있게 졸인 갈치 두툼한 부분을 내 밥 위에 올려 주셨다.
추수 후 양곡 수매를 하고 나면 제법 현금을 만질 수 있었지만, 조합에서 빌린 농자재 대금과 영농자금을 갚고 나면 한 해 농사로 마련한 돈은 거의 바닥이 나곤 했다. 식솔은 많으나 소농이던 우리 집 형편은 늘 빠듯해 쌀밥보다는 주로 보리밥을 먹었다. 입안에서 뱅뱅 돌던 보리밥이 먹기 싫던 나는 어쩌다 쌀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아버지의 점심 배달을 좋아했다.
학년이 올라가고 머리가 커지자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뽀얀 먼지가 시야를 가로막는 신작로를 한참 걸어가야 하는 아버지 점심 배달이 싫어졌다. 인근의 큰 도시로 중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자연히 점심 배달은 아래 여동생 몫이 되었다.
어머니는 8남매 뒤치다꺼리에 집안일에 늘 바쁘셨다. 또 아버지 나들이 한복을 손질해 둬야 하고 8남매의 옷도 직접 재봉틀로 만드셨다. 솜씨가 좋아 가늘게 바이어스를 덧대어 솔기를 마무리하고, 자투리천을 이용하여 곰이나 토끼 등 귀여운 동물 모양 아플리케도 만들어 달아 주셨다. 그리고 명절이면 늘 강엿을 고아 한과를 만드셨다. 그 과정이 복잡하여 나는 왜 힘들게 집에서 만드느냐고 툴툴거렸는데, 어머니 돌아가신 후 가장 그리운 게 어머니의 명절 음식이다.
중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이 시작될 무렵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다. 위로 언니 셋만 시집을 보낸 어머니는 갑자기 생계를 짊어지는 가장이 되셨다. 큰오빠는 군대에 가고, 대학생인 작은 오빠, 그 아래 나를 포함한 딸 셋은 아직 제 앞가림도 못하는 조무래기들이었다. 그동안 농사일을 하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당장 논으로 밭으로 나가셔야 했다. 논농사는 바쁜 모내기철만 지나면 일꾼을 사서 할 수 있지만, 밭농사는 남의 손을 빌리기도 뭣한 자잘한 일들이 많았다.
집에서 오 리쯤 떨어진 우리 밭 양지바른 곳에 아버지를 모셨다. 봄이면 건너편 나지막한 산에서 산비둘기,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여름이면 둔덕 위에 활짝 핀 배롱나무 붉은 꽃잎이 하롱하롱 떨어졌다. 저녁이면 서녘으로 비껴간 석양 아래 소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아버지 무덤 옆에 어머니 자리도 미리 마련해 두셨다.
어머니는 농사철이 되면 아침저녁 두 번씩이나 그 먼 밭으로 일을 가셨다. 아버지가 누워 계신 밭에서 일하며 외로움을 달래셨던 것일까? 지천으로 핀 하얀 참깨 꽃이 어머니의 머릿수건 위에서 일렁였다. 어머니는 가을 햇볕에 참깨를 털며 벌써 고소한 냄새가 번진다며 웃으셨다. 커다란 방수포 위에 널어놓은 콩대 꼬투리가 탁탁 터지는 소리도 어머니에게는 정겨운 노래처럼 들렸을 것이다.
해가 저물어 깻단을 머리에 이고 리어카로 옮길 때, 혼자 그 무거운 깻단을 올릴 수 없어 주저앉았다가 어머니는 “성모님, 도와주세요” 하고 기도하면, 정말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겁던 깻단이 덜렁 머리 위로 올라가더라고 하셨다. 자갈돌이 깔린 그 울퉁불퉁한 길 위로 리어카를 끌고 돌아오면서 어머니는 얼른 집에 가서 자식들 굶기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늘 허둥대셨을 것이다.
우리 집 채마밭에는 늘 푸성귀가 푸릇푸릇하고 단감나무, 대추나무, 가죽나무가 담장처럼 빙 둘러 서 있었다. 편편한 검은 방구들 돌을 깔아 놓은 장독대에는 크고 작은 단지들이 햇빛에 반질반질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봉숭아, 채송화, 맨드라미, 과꽃 등을 철 따라 심으셨는데, 특히 봄을 알리는 함박꽃과 늦가을에 피는 소국을 좋아하셨다. 모란처럼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함박꽃을 보면 늘 어머니 생각이 난다. 서리 내려 시들어가는 국화를 보면 어머니 모습을 보는 듯 애잔한 마음이 든다.
세월이 흘러 우리 모두 집을 떠나고 어머니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외로움을 달래셨다.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하셨고,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염습을 배우셨다. 어느 행려병자의 시신을 깨끗하게 염하여 하늘로 보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 내가 무섭지 않냐고 물었더니,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똑같다면서 담담히 미소 지으시던 어머니.
도움이 필요하면 늘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나 살기에 바빠 어머니를 살펴드리지 못했다. 홀로 식사를 잘 챙겨 드시지 않은 어머니는 ‘재생불량성 빈혈’로 입원하셨고, 애통하게도 치료 시기를 놓쳐 버려 한 달 만에 저세상으로 떠나셨다.
어머니의 부음을 들은 날은 초여름 더위가 맹렬하였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혔지만, 치렁치렁 긴 상복에 누런 삼베 수건을 쓰고 집에서 삼일장을 치렀다. 매일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던 성당에서 교우들의 눈물과 기도 속에 장례미사를 올린 후 아버지가 누워 계신 우리 밭으로 상여를 매고 언덕길을 올랐다. 그런데 아픈 몸으로 언제 가꾸셨을까? 비탈길에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걷는 내 눈에 저만치 하얀, 보라색 도라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