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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잉태되는 밤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고은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월 6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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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선아, 나는 너를 처음 봤을 때 이미 너를 사랑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었어.
나는 알고, 너는 모르던 순간에 말이야.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네가 전화 통화를 하며 차를 뺄지 말지 주저하던 모습들을 보며 나는 이미 너를 귀엽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야.
치사하다고 생각하지는 마. 삶에는 문득문득 깨닫고야마는 순간이 있잖아. 그게 진실이 되었든, 혹은 그럴싸한 변명이 되었든 간에.
작업차를 가지고 온 너는 이런저런 말들을 두서없이 쏟아냈어. 우린 따로 장소를 정하진 않았지만 너는 이미 정한 듯 보였지. 네가 장소를 고르는 동안에 어떤 고민을 했을지 생각해 본 적 없어. 단지, 낯선 것을 처음하는 내게, 
처음 만난 너뿐이었단 사실을 말하고 싶어.
우리는 아주아주 애매하고 어색한 나이의 동갑인 걸 알았지만 말을 놓지 못했지.
난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전날 작업차의 에어컨이 고장 나서 서둘러 고쳤다고 말하며 시원하냐고 묻는데도 웃음이 났어. 간혹 그런 일들이 있잖아.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게 잘되려는 건지, 잘 안 되려는 건지 모를 애매한 전조들. 
나는 아주 예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

누군가의 애매한 소개를 받고 당일 저녁을 먹기로 했어. 벌써 10여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얘기야. 퇴근 시간 5분을 남겨두고 같은 사무실 언니가 아이스크림을 사줄 테니 먹고 가래. 5시 55분에, 갑자기 아이스 
크림을 사준다잖아. 여름쯤이어서 나는 좋다고 했어. 왜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거냐고 물으니 자기가 아는 후배를 만나야 하는데 그냥 옆에만 있으면 된다고 했어. 그때까지도 아무 생각이 없었지. 근데, 그때 즈음엔 상대방의 의도 파악이 뭔지에 대해 생각할 만한 나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 그냥 그렇구나 했을 뿐이었어. 퇴근하고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는 중에‘내가 혹시 만나는 후배가 남자라는 얘길 했던가? ’라고 말하는 거 있지? 그런 말 한 적 없었어요! 라고 했지만, 아이스크림 가게에 이미 도착했고,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아이스크림을 골랐어. 서른한 가지 중에 고르는 아이스크림이었는데, 나는 무슨 와플이 곁들여진 거대한 아이스크림 한 접시를 해치웠지. 접시에 코를 박고 아이스크림만 먹었어. 대답은 곧잘 했지만 나는 낯을 몹시 가리는 편이라서 말이야. 
여름날이라 그랬는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헤어지는데 둘이 저녁을 먹고 가래. 자기는 집에 신랑이 기다리고 있어서 함께 못가지만 시간이 마침 저녁 시간이니까, 밥 먹기 딱 좋은 시간이래. 남자가 뭘 좋아하냐는 말에 나는 고기라고 말했고, 어느 고깃집에서 그 사람과 나는 고기 4인분을 술 한잔하지 않은 채로 먹었어. 그중 3인분을 내가 먹었지. 아마 그 사람도 그랬을 거야. 내가 생각하기도 전에 그 사람은 고기 3인분을 먹어 치우는 나를 귀엽다고 생각했었을 것 같아. 집에 데려다줄 시간이 돼서도 그 사람은 자꾸 고기 먹은 다음엔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엉뚱한 말을 꺼냈어. 알아? 그때나 지금에나 나는 집이 좋은 집순이었고, 내 안중엔 그 사람이 없었어. 3인분을 홀로 해치운 내 대답은 배가 부르니 이제 집에 가고 싶다였어. 집으로 가는 길에 그 사람 차 에어컨이 고장이 났어. 한여름 밤에 에어컨 고장 난 차에 타고도 나는 별생각이 없었어. 고장도 날 수 있지. 창문을 모두 연 채로 달리는데 여름밤의 바람이 나쁘지 않아서 나는 괜찮았어. 오래된 기억이지만 나는 네가 에어컨 얘기를 꺼내자, 문득 그때가 생각났었어.
네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어느 글램핑장이었어.
다행스럽게도 에어컨이 있는 곳에서 우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 6 시에 만났는데 시간은 정말 금방 흘러갔어. 너는 왜인지 자꾸만 내 앞에서 자기 고백 같은 말들을 했지. 생전 물어보지 않은 가족사를 술술 
털어놨어. 우리 앞엔 고기가 있고, 나는 여전히 내 앞에 상대보다 고기를 훨씬 많이 먹고 있었고, 그리고 전과는 다르게 맥주를 나눠 마시고 있었지. 네가 하는 말들이 나한테 아무런 소용도 없었던 건 네 인생을 존중해서야. 네가 말한 너의 인생 중엔 부끄러울 만한 짓은 없었는데, 코인에 꼬라박은 10년 전 어느 날을 후회한다고 했을 때. 인생을 그때로 되돌리고 싶다고 했을 때도 나는 네가 한심해 보이거나 하진 않았어. 그냥, 그렇게 투자할 만한 돈이 있었나보다 싶었을 뿐이야. 
내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네가 말했지.
“9시에 나가야 한대요.”
3시간은 훌쩍 지났고, 그 사이 나는 네 동그란 눈이 마음에 들었어. 
동그란 눈에 너는 슬픔이나 설움이나 그리움, 죄책감 같은 것들을 다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순간 알아챌 수밖에 없었어. 너는 금세 나를 포기할 거라고. 네 당장의 미래에 나는 없단 걸 알아챘어.
의외로 난 눈치가 빨라. 아니, 걷어낼 수 없는 불안이 커지면 온갖 감각들은 오로지 단 하나로만 향하게 되니까 너 하나, 내 앞의 너 하나. 
네 동그란 눈동자 하나 깊게 들여다보면 그거 하나쯤 눈치채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래도 나는 잠깐 너를 사랑했어. 내 사랑은 쉬워. 나는 길가에 돌멩이도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귀엽게 생긴 뭉게구름이 보이면 꼭 사진을 찍어 남겨두는 사람이니까. 철마다 꼭 자기 자리를 찾아 피는 들꽃도 
사랑하는 사람이라 너를 사랑하는 일은 정말 눈 깜짝할 새였어. 
너는 조금 더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고 했어. 어느 곳으로 가고 싶냐는 말에 나는 네가 가고 싶은 곳을 가자고 했어. 대리비를 낼 것도 너였으니까. 오로지 네 맘이지 싶었어. 너는 조금 더 거리가 떨어진 곳의 어 
느 가게로 향했지. 너의 거래처에 날 데려간 건 의외였어. 그곳에서도 오래 있진 못했지만 나는 대리 기사님이 오기 전에 인도 경계에 둔 안전봉에 나란히 앉아 있던 짧은 시간이 가장 좋았어.
밤은 깊었고, 여름밤은 조금 더웠고, 한적한 곳에 너와 내가 나란히. 
나는 그 순간도 사랑해.
내 마음은 왜 이렇게 쉬운 건지. 오만가지 것들에 금세 정이 들고, 정이 든 것과 사랑하는 것을 조금 헷갈려 해. 사랑과 다정과 애정을 쉽게 구분하는 어른으로 자라진 못한 것 같아.
깊은 여름밤에, 한적한 시골 동네에, 시골이라 별들이 쏟아지던 그 첫 번째 날을 사랑해.
다음 날에 나는 일정이 있었어. 주말이긴 했지만, 서울을 다녀와야 했어. 나는 몇 주에 한 번씩 주말 진료를 받아야 했고, 그게 하필이면 그날이었으니까.
진료실이 좁은 편은 아니지만, 내 주치의는 거의 매일, 아마도 내가 알고 있기론 거의 매일. 그 진료실에서, 진료실 책상에 앉아 나를 기다려. 나만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을 기다리는 게 직업인 사람 같 
아. 주치의는 종종 그 부분을 언급해. 기다리는 게 직업이니까 기다릴 수가 있다고 말이야. 언제까지나 기다려줄 수 있다고 해놓고는 진료가 꽤 지나니 우리에겐 물리적으로 한정된 시간이 있다고 나를 채근해. 진료 시간도 정해져 있고, 내 진료도 회기로 보자면 꽤 지나온 상태니까 말이야. 그날 진료에 네 얘기를 꺼냈어. 주치의는 흥미로워했지. 진료를 보던 지난 몇 해 동안 새로운 누군가를 만났다는 얘기는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어. 실제로도 없었고. 그날 진료실에 같이 오겠다고 호기롭게 말했었지만 너는 실제로 그러진 않았어.
인생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는 네가 아주 잠시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했는데, 정말 아주 잠시였어. 나는 내 삶의 극히 일부를 보여준 것 뿐인데 내 인생이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을 하는 널 보고 아주 잠시 실망했어. 너를 어른스럽게 봤던 것만큼 짧은 시간이야.
진료가 끝나면 병원 근처에 있는 서점을 들러. 배움이 길지 못했던 내가 그냥 위로받는 공간이야. 서점 안에서 익명으로 있을 때 말이야. 
지나치는 손님이거나, 혹은 오래도록 자리를 떠나지 않는 손님으로 있을 때, 내가 철학, 사상가 코너에 특히 오래 머무르고 있을 때나 건축 관련 전문서적, 의료 서적 코너에 머무를 때도 아무도 나를 오래 쳐다보는 일이 없으니까. SNS 같은 곳에 관련 책들을 보는 걸 언급한다거나, 유식한 척을 한다거나 하는 일을 하진 않지만, 때때로 그런 척을 해야만 했어. 그러니까 실제로 행동도 필요했어. 그래야 그런 사람이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생각은 또 어떻게 하는지 유추할 수 있잖아. 에티튜드 같은 걸 따라 하면 닮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컸어.
서점으로 향하던 중에 네가 심야 영화를 보자고 연락을 했어. 이동시간을 고려하면 나는 당장에 버스터미널로 향해야 했지. 버스표부터 구하고 답장을 주겠다고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적당한 시간에 버스가 있었지. 나는 돌아가는 시간을 바꿨다고 너에게 답장을 주었지.
오컬트 영화가 좋다고 했었는데, 내가 생각하는 오컬트 영화와 네가 생각하는 오컬트의 종류엔 물살이 조금 거센 강이 하나 있었어. 폭은 상대적으로 좁지만, 물살이 조금 거세서 쉽사리 오고 갈 수 없는 강. 
그날 본 영화는 염소 귀신이 나오는 영화였어. 바포메트는 뭐, 거의 신에 대응하는 악마에 가깝지만, 줄거리에서 보여주는 이 염소 귀신은 조악스러웠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그 조악스러움과 함께 너의 행동이 신경 쓰였는데 스크린을 보는 시간이나, 나를 보는 시간보다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았었어. 영화가 끝나고, 네게 물었을 때, 너는 그저 자기 옆에 있는 내가 너무 예뻤다고만 했지.
그렇게 우리 두 번째 날이 끝났다.
우리의 첫 만남은 토요일이었고, 그리고 두 번째 만남은 바로 다음 날인 일요일이었다. 그리고 월요일이 되어 우리는 또다시 만났지. 퇴근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누워버린 나를 일으켜 바닷바람이나 쐬자고 했다. 너는.
운전하는 일이 크게 힘들지 않다고 말했지. 나는 운전이 버거운 사람인데 너는 너의 벌어먹는 모든 업이 운전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운전대 아래에 사후 장기기증 희망 스티커를 보았어. 아 
주 큼직해서 잘 보였어.
너는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지. 나도 동의한다고 말했어. 죽어서도 나는 내가 좀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지. 내 사후 기증 동의 서명은 남동생이 해줬어. 아버지는 시간이 좀 필요한 분이라서 말이야. 시간이 지나고,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 흘러가듯 얘기를 했어. 사후 장기기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이야. 뉴스에서 한참 그런 류의 기사들이 나올 때였으니까, 나도 한마디 보태는 척하면서 물었더니 우리 아버진 단박에 표정이 안 좋았어. 서둘러 덧붙이고 나서야 표정이 풀어졌지. 그런 일은 나중에나 일어날 일이지. 갑자기 죽게 돼도 몸이 멀쩡하게 죽는다는 건 괜찮은 일 아니냐고 말했어. 그 부분에서 동의한 것 같아. 몸이 온전한 채로 죽는 일이 때때로 아주 운이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는 말에 동의할 정도로 아버지가 보낸 삶은, 그리고 내가 태어나서 꼬박 함께한 시간 동안 우리 부녀의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걸. 아마 너는 짐작하지 못한 것 같아. 
술이 약하다 말했지만 둘이, 바닷가에 와서 너 혼자 술을 들이켜는 걸 차마 볼 순 없었어. 우리는 막걸리를 시켜보려 했건만 간이포장마차 같은 그곳에선 동동주를 팔았지. 너는 이것저것 아무거나 해볼까? 라는 말을 했지만 정확하게 네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더라.
그 짧은 시간에 무수한 것들을 쏟아냈던 너니까.
너는 예전의 그 사람과 많이 닮았었어. 그리고 그때의 나하고도 닮아 있었지. 그러니까 나는 예전의 어느 한때를 너와의 만남으로 복기하고 있었던 듯해.
그리고 그 결말을 아마도 짐작했던 듯해.
월요일 밤에, 그 밤이 지나고 나면 너는 왜인지 아주 멀리, 오래도록 멀리 떠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처음 만나던 날부터, 나는 계속 너를 길 잃은 강아지를 사랑하듯 사랑하고, 그래서 언젠가 주인을 꼭 찾아서 나를 떠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불안해했지.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철썩철썩 일정하게 내 가슴을 쳐댔고, 동동주인지 모주(母酒)인지 모를 술이 자꾸만 더운 바람에 열 오르듯 올라오니까 나는 너를 안고 싶었어.
네 어깨에 기대서 한참을 있었는데, 너는 꼼짝하지 않고 가만있었지. 
아주 오래, 그렇게 한참을 가만있었어. 어깨에서 머리를 떼고 너를 보며“우리 모텔 갈래?”라고 물었더니 네 동그란 눈이 아주 잠깐 커졌던 걸 기억해.
“뭐라고? ”하며 되묻는 너를 보고는 나는 다시 한번 말했지. 
“우리모텔갈래?”
화요일 새벽 두 시에 우리는 바닷가 근처에 있는 모텔을 보며 어딜 갈지를 정했어. 여긴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네, 방이 없을지도 몰라. 
쓸데없는 걱정들이었지만 나는 너를 안을 수 있었어. 근데 말이야. 우리는 아마도 그 밤이 끝이었다는 걸 확인한 것 같아. 내 불안은 끝이 없었고, 네게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 네 허리를 더 감아댔지만, 아침이 오는 것처럼. 간밤에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는 우리만 아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 모텔의 주인이 알았겠지.
아무튼, 우리는 몸을 나누는 것보다 더 질펀하고 더러운 마음을 벌거 벗는 일엔 실패한 게 분명해.
아침이 밝아왔고, 나는 약 없이는 한숨도 못 자는 인간이라 네 자는 얼굴을 밤새 보고 있었어. 그러다 눈을 감고, 아침을 생각했지. 
날이 밝았고, 새벽녘의 바다는 안개로 자욱했어. 세상에. 우리 둘의 일에 온 세상이 신호를 주는 거였을까 생각이 들어. 다 지나간 일이지만 말이야.
다 지나간 일이지만 말이야.
시간이 돼서 너를 깨우는데 눈을 뜬 너는 가만 천장을 바라보다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을 흘렸어. 나는 우는 남자는 질색이라고 했는데, 너는 하품을 해서 그런 거라고 대답을 했지.
잠자리하고 나서 눈물을 보이는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 생각해봤어.
나는 도망가는 남자라는 답을 알고 있었지. 그러니까 그렇게 눈물을 보인 남자가 첫 번째는 아니었다는 말이야. 잠자리를 갖고 나서 눈물을 보이고, 그다음엔 도망을 가는 남자를 나는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어. 
그리고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지.

마지막은 계속하여 오고 있다는 걸 나는 바보같이 매번 처음 보고 듣는 사람처럼 굴어.
내가 아는 가장 이상한 사랑은「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속 사랑이야. 바보 같은 사람과 이상한 사람과 그리고 또 바보 같은 사람의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내가 배운 사랑과는 가히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찌질하고 이상한 사랑 말이야.
나는 너를 안았을 뿐인데, 그 밤엔 슬픔이 잉태되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

3주가 지나고 내가 다시 진료실에 갔을 때 내 주치의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어. 그리고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데이트 폭력을 말했는데 모텔에 가자고 한 건 나였다니까 이번엔 약간 배신당한 표정을 지었어.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얼마나 아는 사람이라서 그런 선택을 한 거냐고 물었지.
나는 다시 그 이상한 소설을 빌려왔어. 소설에선 남자 무게의 하중을 견디는 일에 대한 언급이 있다고 말이야. 약간 굶주린 상태였고, 내 몸에 주어지는 중력 이외에, 삶의 무게 외로 다른 하중이 필요했다고 말했어.
잘 몰랐겠지만「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사랑하고 죽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5일에 불과해. 4일째에 약을 먹고 죽은 척을 하는 거고, 5일째에 죽은 줄 알고 따라 죽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
다만, 다행인 것은 우리의 이야기는 3일째에 끝났다는 거야. 3일째에 로미오는 추방당하고, 나는 너로부터, 너의 세계로부터 추방당했지. 연락을 회피하는 것으로 나를 피했어.
3일째에 나는 시간이 멈췄어. 내 불안은 너의 회피를 먹고 끝없이 자라서, 한껏 피폐해진 채로 죄 없는 주치의에게로 갔지.

나는 너의 회피를 배신이라 말했는데, 내 주치의는 그저 그렇게 끝이 났을 뿐인 거라고 말했어.
“한쪽은 먼저 끝이 날 수도 있잖아요. 그 사람이 결국에 나리씨가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잖아요. 그뿐이에요. 딱 그만큼만 힘들어하고, 나머지는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듣고서도 나는 너를 놓을 수 없었어. 네가 남긴 하중은 생각 보다 오래 남았으니까. 그만큼을 더 힘들어하고 나서야 나는 너를 쓸 수 있게 되었어.

병선아.
바다에서 나고 자란 나는 사방이 일렁거리는 풍경이었다. 바다는 옥색이었다가도 짙은 초록이었다가도 쪽빛이었다가도 흙빛이기도 했으니까.
일정한 간격으로 들이치는 파도 소리는 어린 내 가슴을 매번 철썩철썩 후려쳤다. 파도에 젖은 마음은 바닷바람으로 말렸다. 짠내가 물씬 풍기는 건어물 같은 마음은 마치 재래시장에 어울린다며 싸구려 값어 
치를 매기기도 여러 번이다.
파리가 내려앉아 쉬 끓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건어물 위를 스쳐 지나가는 나일론 끈은 파도와는 다른 종류의 매질이었다.
멍투성이 보랏빛 물든 마음을 쳐 벗지도 못했는데 병선이 너는 어느 순간에 나름 내 값어치를 매긴 모양이라고 생각해.
번듯한 말인 것처럼 마지막 메신저를 남기고는 또다시 침묵하는 너를 나는 흙빛 바다라고 생각해. 막장스토리나 치정이 얽힌 드라마에서나 듣던 싸구려 대사를 내뱉는 너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

나는 왜 취하면 너를 생각할까? 
우습다.
정말로 우스운 얘기다.
너는 나를 지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할 텐데. 정말로 우스운 얘기다. 
네가 나를 차단했을까 봐 카카오톡의 네 프로필을 눌러봐. 
나는 언젠가 얘기했던 것처럼 찌질하거든.
근데 마냥 찌질한 사람은 아니라 이게 마지막이 될 거야. 너를 영원히 박제시키고, 너를 쓰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이렇게 해낸다.

나는 너한테 나를 행복하게 해달란 적이 없었는데. 결혼하자고 한 적도 없었는데, 그런 류의 핑계로 나를 스쳐 가는 사람으로 하겠다면 너의 결정 존중해. 돌부처라던 너를 존중해.
네가 태어나서, 나를 만나서. 너를 만나게 돼서 좋았어. 
돌부처인 네가 그냥 모른 척해.
영원히 모르는 척해. 이렇게 문자 보내면 술에 취했거니 생각해. 담날 이불 걷어차겠거니 생각해.
그러다 문자도 없어지면 네가 없어도 괜찮은 거겠거니 생각해. 
근데 술에 취했어도 오늘이 마지막일 거야. 나는 이다음에 나한테는 간도 쓸개도 없는 사람을 만날 거야. 그럴 거야.
네가 가진 게 뭐였든 나는 그냥 다 괜찮았었어. 너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여름밤의 파도가 아름다워서.
나는 너를 귀여워하는 나를 아직 좋아하는 중이야. 병선이 네가 이걸 볼 때쯤엔 아마 냉장고에 붙은 기념 자석 같은 기분이었으면 좋겠다. 
잠깐 떠올리면 기분 좋은 기억 같은 것 말이야.
그러다 문득 언젠가의 나와 내가 좋아했던 누군가와의 기억을 복기 하는 중이야. 그때의 내가, 지금의 네가 되어서. 결혼을 독촉하던 그 누군가에게 나는 한 없이 가진 게 없는 부족한 사람이었어서 나도 병선이 너와 비슷한 결정을 했었지. 1년을 만난 남자의 하중은 단시간에 떨어져 나가긴 했어. 정말로 몸이 반토막이 나는 듯한 기분이 들고, 오래도록 아프기도 했지. 네가 그만큼이나 아파하는 걸 바라는 건 아니야. 
네 생각이 뭐였는지, 정말로 내가 생각하는 게 맞았다면 네 결정을 존중해. 가까이 붙어서 서로를 미워하기 시작하는 것보다야 아주 잠깐 기뻤고, 아주 잠깐 좋았고, 그리고 오래도록 멀리서, 추억으로 그리워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필요하다면 그게 맞다고 생각해. 

너와 내가 자란 시간이 38년인데, 삼십팔 년간의 이야기 속에 어떻게 감히 우리가 서로를 판단할 수 있는 걸까. 병선이 너의 조금 슬픈 삶도, 그리고 내가 미처 다 말하지 못한 내 삶도 우리 만난 그 3일에 어떻게 덧붙일 수 있을까 생각해.

나는 흘러온 시간도 중요하고, 같이 지내는 시간도 중요하고, 그리고 이야기도 중요한 사람이라서 애써 너와의 시간을 복기해봤어. 
수십 번을 복기하다가, 수백 번을 복기하다가, 그러다 보니 이젠 그 밤이 이름을 갖게 되었지.
병선아.
사랑하는 병선아.
아주 잠깐 사랑이라고 속았던 병선아.
내가 그 밤을 복기했던 것처럼 너 역시 그 밤을 복기하는 무수한 날을 보냈다면, 그랬다면 병선아. 네겐 내 하중을 기억할 만한 것이 없으니 네 어깨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내 잇자국을 기억하길 바라.
주치의에겐 내가 잠자리 중에 사람을 깨물었다는 걸 말하지 않았어. 
잇자국이 날 만큼 세게 문건 아니지만 어쩌면 네 어딘가를 삼켜버리고 싶었단 생각을 했나 봐. 그리고 그럴 때, 잇자국을 남길 때면 난 필연적으로 슬픔을 잉태해.
그리고 그 슬픔은 미처 다 자라기도 전에 죽어버리지. 
필연적으로 말이야.
병선아.
우리 만나기 백 년 전에 말이야. 그때에도 우리는 필연적 슬픔이 동반되는 사랑을 했을 것 같아. 백 년 전에, 시인 백석이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사랑하는 나타샤를 계속하여 불러보는 것처럼. 나도 말이야. 어 
쩌면 백 년 전엔 나타샤를 사랑했을 것 같아. 산골에 들어가 살려면 나타샤를 태워야 하는 당나귀가 필요했는데, 네가 그 당나귀였을지도 모르지. 너도 나타샤를 사랑하는 당나귀. 그리고 백 년쯤 뒤에, 의정부의 어느 산부인과에서 단 몇 개월 차이를 두고 태어났을 거야. 아버지는 아들을 원하는 입장은 아니어서 나는 무사히 태어났어. 너는 아들이라는 이름을 갖고 기쁨을 받으며 태어났을 것 같아. 백 년이 흘렀어도, 남자아기가 더 귀한 시절이었는데, 나는 하필이면 아기 성별은 관심도 없던 아버지를 둬서, 그래도 늦게 본 첫아기라 그때 유행하던 한글 이름을 갖게 되었지. 돌림자는 끝 글자’영’이었는데 나 빼고 일가의 거의 모든 아기는 돌림자를 썼어. 이름에 한자도 있었지. 그게 부러웠던 적은 없어. 이름에 한자 있는 거 말이야. 아이들이 쓰는 종합장에 한글 이름을 서른 몇 개쯤 적어왔다고 했어. 모두 아버지가 지은 이름들인데 나는 그중에 고르고 골라 나리가 되었지. 그렇게 신중하게 지은 이름이 나쁠 리 없잖아. 집안의 누구, 어느 집안의 몇 대 자손이라는 족쇄 같은 돌림자도 쓰지 않고, 아버지, 어머니 인생에 아주 잠깐 빛나고 희망찬 시절에 나는 기쁨이었을 거야. 그리고 오래지 않아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생각했을지도 몰라. 내가 잉태되던 밤을 복기하고, 복기했을지도 몰라. 우리 정말로 같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면, 그래서 너는 경기도 어딘가에서 살고, 나도 경기도 어딘가에서 살다가 나는 사방이 온통 바다인 곳으로 흘러가고, 지금 여기에 닿은 것처럼, 근데 너는 필연적으로 백 년 전 사랑한 나타샤를 찾아서 지금 여기에 닿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내 슬픔은 온통 제정신이 아닌 것들로 채워져 있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백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어쩌면 우리는 단 하나를 사랑했을지 모를 필연을 갖고 있다고 말이야. 그래야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우 
연들이 설명되는 것 같기도 해. 우리 모든 일에 이상한 우연들은 반드시 사연을 갖고 있다고 말이야.
병선아. 나는 백 년 전에도 슬픔이 너무 많은 사람이라 사랑을 하다 너무 이른 나이에 죽었을지도 몰라. 사랑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죽어버린 거지. 기쁨도, 슬픔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런 것들이 유전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안에선 없는 일도 아니야. 할아버지는 막내 할아버지의 결혼 소식을 듣고 기뻐하셨고, 그날 밤에 돌아가셨다고 했어. 아버진 덧없이 슬픈 말을 허공에 내뱉는데 아버지 나이 육십을 넘기시고서 하신 말이라 그런지 슬픔은 메말라 있었어.
나도 슬픔이나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아. 어렸던 내 삶은 너무 버거웠고, 이십 년을 살던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하고 말았지.
‘겨우 이십 년을 살았는데 돌아보니 너무 아득하다. 사십 년을 산 것 같아. 나는 내 나이가 너무 아까우니까, 고작 이십몇 년을 사는 건 너무 아까우니까 사십 년만 살아보자. 그러면. 내 삶은 여전히 아득할 테고, 기쁨에 겨울 일은 손에 꼽을 테고, 사십 년을 채우고 나면 또다시 너무 아득해져서 팔십 년을 산 것 같은 기분이 들 테니까 손해는 없겠다.’ 
그래서 나는 사십 년을 채우기로 다짐을 했는데 삶은 더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그보다 빨리 나를 놓치는 일이 생겨버렸어.
주치의 선생님은 2주나 3주, 혹은 4주 간격으로 내 삶을 늘리고 있어. 
그렇게 햇수로 5년을 더 살아냈지.
그 사이엔 아무것도 없어.
나는 이렇게 편지를 쓰거나, 혹은 조금 더 긴 글을 쓰는 일을 조금씩 하게 된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나는 내 삶에 아무것도 들여놓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지.
그5년중단3일을너로채워본것뿐인데 3일 만에 나는 슬픔을 잉태하고 말았지. 기쁨도, 슬픔도, 우연도, 필연도 이렇게 기이하고 복잡하게 나를 덮쳐서 나는 남은 생을 조금 더 빨리 놓쳐버릴 뻔했어. 네가 대 
단해서는 아니지만 내가 그런 것을 핏줄로 이어받은 것인지, 유전자 어딘가에 물려받은 채 태어나서 그런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병선아.
매번 너를 찾게 된다. 마치 습관처럼 말이야. 그 밤에 파도가 철썩거리며 내 귓가를 때리던 것처럼. 아니지. 정작 파도가 철썩거리며 때리던 것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그저 매번 해오던 과정 중 하나였겠 
지. 천국이든, 지옥이든 결국엔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잖아. 그전까지는 전부 다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해. 바다가 마를 일이 없는 것처럼 생의 어떤 것들은 사라지거나, 흐려지지 않고 매일 매일을 반복하게 되어 있어. 아침에 눈을 뜨고, 눈을 뜨고야 말았으니 다시 잠들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살아지는 무서운 삶 같은 거. 우리가 닮은 것은 오로지 그뿐이지 않겠니. 삶을 무서워했다는 것 말이야.
발가벗은 몸뚱이를 보였으면서도, 어째서 끝내 마음 깊은 것은 숨기고야 마는 사이였을까? 사랑은 하면서도, 더 질펀하고 더러운 것은 끝내 보이지 못한 사이였을까.
우리는 차마 죽음을 선택할 수 없어서 천국도, 지옥도 갈 수 없게 돼버린 것 같아. 너는 내게 슬픔의 씨앗을 주었고, 아니, 사실은 내 자궁은 이미 슬픔으로 채워져 있었을 거야. 슬픔으로 가득한 작은 주머니에 
너는 씨앗 하나를 심은 거지. 내 피엔 슬픔 말고, 병약한 것들이 흐르고 있었을 거야. 기쁨도 슬픔도 차마 주체할 수 없는 병약한 것들이 흐르고 있어서 네가 남긴 그 씨앗이 결국에 슬픔으로 자라나고 말았으리라 생각이 들어. 다 자라지 못하고 죽어버린 내 슬픔은 어디로 갔을까. 병선이 네가 내 짧은 슬픔이었기에 다 자라지 못한 그것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진 거라는 생각도 들어. 나는 뇌 어딘가의 인지기능이 잘못된 걸지도 몰라. 보이지 않는 슬픔을 잉태하고, 눈에 보였던 너를 놓쳐버린 걸 봐선 분명 그러고도 남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 밤에 내가 바라보던 건 바다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철썩이던 파도 소리는 내가 생각하는 소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어떤 감각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건, 그러니까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건 퇴행이라고 봐야 할까? 그저 그 기능을 잃은 거라고 봐야 할까?
내가 길가에 난 들꽃을 사랑하고, 길 잃은 강아지를 사랑하고, 그리고 잠시 너를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무게를 가질까? 아니면 네가 단지 사람이라는 이유로, 인격을 가졌다는 이유로 이런 괴상한 변론을 떠들어대는 내게 어떤 해명이 되어줄까. 
차마, 지옥도 천국도 선택할 수는 없지만 나는 내일로 갈 생각이야. 
그래서 백년 뒤에 어느 날 밤에, 나이를 먹고 시간이 흐르고도 한참을 지나서 어느 더운 밤에 밤바다 앞에 앉아 나타샤를 생각할 거야. 
사랑하는 나타샤. 사랑하는 당나귀 등에 올라 우리는 깊은 산속으로 가자.
너는 똑같이 동그랗고 조그만 눈을 갖고, 나는 여전히 그런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어디 그 밤에도 똑같은 슬픔이 잉태되는지 한번 확인해 보자. 그때에도 우리가 똑같이 슬픈지 한번 확인해 보자. 사랑하 
는 당나귀. 지구의 중력 말고 너 역시 나타샤의 하중을 생각해보렴. 

병선아.
나는 여전히 찌질한채로, 그리고 때때로 어느 순간엔 마치 너를 잊은 것처럼. 그러나 사실 생의 대부분 사람들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과 같이 나는 낮에 뜬 달을 발견하는 것처럼 기억 속에서 너를 발견하겠지. 
그러니까 내 말은 어떤 경험이 다른 누군가와 함께한 경험이었다 해도 너는 오로지 너뿐이었다는 거야. 하지만 백 년 뒤엔, 우리가 백 년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불과 얼마 전에 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또 사랑을 해보자는 거지. 그때가 되면 발가벗는 일 말고 조금 더 어려운 일을 해보자. 너도 숨겼고, 나도 숨겼던 우리 질펀하고 더러운 마음을 벗는 일을 해보자. 너는 도망을 갔고, 나는 어쩐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채로 내 더러운 마음을 자꾸만 흘리고 다니니 백 년 뒤엔 마주 앉아 그래보자.
나타샤가 되어도 좋고, 당나귀가 되어도 좋고, 세상 밖에 꺼내놓기 여전히 부끄럽다 싶어지면 산속으로 들어가서 그리해도 좋을 듯싶으니 백 년 뒤엔 마주 앉아 그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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