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2월 6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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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화창한 날은 왠지 심리적으로 안정이 안 된다. 내 마음은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지 않고 있다. 밀린 원고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서인가. 바라보고 있던 노트북을 닫고 밖으로 나간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소년들이 시끄럽다. 두 명의 개구쟁이 형제들이다. 내 손주들처럼 연년생으로 보인다. 키도 목소리도 그만그만하다. 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은 것은 두 소년이 모두 야구 모자를 쓰고 있어서이다. 몇 주 전에 지방에 있는 손주들에게 야구 모자를 사서 보냈다. 분홍색, 하늘색 이렇게 두 개를 어린이집에 갈 때에 쓰라고 했다. 왜 그러지? 젊은 엄마가 나를 유심히 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실없이 소년들을 쳐다보며 웃어서인가.
“우리 손주들과 닮았어요.”
그때서야 젊은 엄마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실 나는 두 소년의 볼을 꼬집어 주고 싶었다. 야구 모자를 쓴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 그러나 꾹 참았다. 딸의 조언이 생각나서. ‘아무리 귀여워도 절대 아이들을 만지지는 마세요. 요즘 젊은 엄마들은 자기 아이를 다른 사람이 특히 나이 든 할머니들이 스스럼없이 만지는 것을 싫어해요’ 했던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참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쳐다만 봐도 신경 쓰는 데 만졌으면 어쨌을까? 두 소년과 젊은 엄마가 역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공원 벤치에 앉았다.
사람들이 바쁘게 공원길을 오갔다. 초등학교 하교 시간인지 학부형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자기 아이를 만나서 즐겁게 웃으며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여자 어린이는 엄마가 마중을 안 나왔나 보다. 자전거를 끌고 가면서 분홍 배낭을 어깨에 메다가 떨어뜨렸다. 외손녀도 분홍 배낭을 어깨에 메고 다녔던 기억이 나서, 벌떡 일어나 배낭을 주워주려는데 아이가 말했다.
“왜 그러시는데요?”
소녀의 눈동자가 당돌했다. 뭔가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아! 주책없이 또 경거망동했구나.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배낭을 메고 사라져버렸다.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손녀에 대한 그리움이 깨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손녀를 가진 할머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손녀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선한 마음이 세상에 설 자리가 줄어든다. 외롭다.
나는 렌즈를 나를 향해 비췄다.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나이 든 한 여자의 가슴에서 외로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후줄근한 운동복이 더 초라해 보였다.
‘당신은 외롭군요.’
가감 없이 냉정하게 나를 진단했다. 지나가는 어린이마다 치근덕거리는 외로움에 찌든 노인네. 부리나케 벤치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외로움이 조금 이르다. 예전에는 어둑어둑 어두워질 때 외로워졌다. 어둠이 아파트 계단에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면 나는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그럴 때 나는 배낭을 메고 호수공원으로 떠났다. 오늘은 좀 이른 시간이지만 떠나기로 했다.
어둠이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하는 호수공원 길에 접어든다. 어두움에 물든 초록 잎은 다소 짙어졌지만, 그 냄새는 여전히 신선하다. 내 친구 녹색 공기는 벌써 내 머리를 점령했다. 초록의 산소는 이제 머리를 지나 모세혈관으로 옮겨져 간다. 세포가 살아난다. 육교 위로 올라서니 서쪽 하늘가가 노을의 잔영으로 붉은 바다이다. 노을은 해가 서쪽 하늘로 사라진 다음 그 잔영이 더 아름답구나. 사라져 가는 붉은빛이 아스라하게 다가오는 어두운 숲속으로 그림자처럼 잠겨있다. 호숫물 위로 그 빛들이 몸부림치며 스쳐 지나간다. 이제 어둠이 오는가 보다.
어둠 속을 걷는다. 숲속의 작은 등들이 걸어가는 내 발걸음을 인도한다. 초록의 산소들은 여전히 나의 육체를 말갛게 적신다. 불현듯 다가왔던 대낮 공원에서 외로움은 이제 멀어져 간다. 어둠 속에서 녹색의 숲을 걸으며 가슴이 생명력으로 꽉 차오른다. 가끔 들리는 나뭇잎들의 속삭임. 멀리 네온사인을 바라보며 걷는다. 빛을 향하여. 어두움이 마음의 어둠을 해체한다. 낮 동안의 헝클어진 마음이 차분하게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외로움이 잦아든다. 외로움이 가라앉으니, 사유의 세계가 드러나고, 사물이 또렷이 보인다.
호수공원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눈을 돌리니 탁자 위에 말없이 펼쳐져 있는 노트북이 보인다. 낮에 초조한 마음으로 집에서 탈출했던 모습 그대로이다. 마시던 보이차 잔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여기저기 쌓여 있는 책들도 눈에 띈다. 낮에는 그토록 다가가기 힘이 들었던 노트북이 나를 끌어당긴다.
나는 노트북 앞으로 간다. 나를 막아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노트북 화면은 계속 채워져 가고. 내가 충만하니 의식과 무의식이 활발하게 소통하며, 내 안의 우주는 온갖 빛을 발한다. 어둠 속에서 내가 더 잘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밀린 원고가 끝나갈 즈음, 거실 창으로 블라인드를 올리니 아파트 앞길이 보인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다. 그냥 어둠뿐이다. 그곳은 몇 시간 전에 내가 배낭을 메고 걸어왔던 길이다.
딸이 나에게 말했다.
“어두운 길을 걷지 마세요.”
꿈에 엄마가 컴컴한 길을 걸어가고 있더라며 걱정했다.
“문형아! 너 그거 아니? 어둠 속을 걸어가면 그곳에는 고독이 있어, 그 고독은 창조를 이룬단다. 엄마는 작가잖아. 엄마는 두렵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