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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책 제목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2월 6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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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젊음은 눈앞에 창연히 아른거리는 비눗방울 같다.
문학을 향한 나의 삶에서 스물둘은 기적을 품어낸 나였다. 기억 창고의 빗장을 풀면 마음속 지도가 펼쳐지곤 한다. 그리고 더 먼 기억의 칸델라 불빛 하나가 깜박하며 켜진다.
여고 시절, 시조 시인 이우종 선생님께서 문예반을 이끌어 가셨기에 산문부였던 학생들도 일주일에 한 편씩 시조를 제출하는 것이 3년 내내 숙제였다. 아마도 나는 1학년 2학기부터 운문부로 자리를 옮겨 시조를 익히고 써왔던 게 분명하다. 육영수 여사 서거 때 학교 신문에 올린 시조 형식의 조시「목련꽃 닮으시어」가 관심을 받기 시작하면서 내 문학의 길은 향방이 정해진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우리 학교 문예반에 오셔서 시조 특강을 해주신 선생님들을 잊지 못한다. 김상옥 선생님, 이영도 선생님, 정완영 선생님… 그때는 철이 없어서 그 귀함을 잘 모르고 덤벙거렸던 것이 나중에야 후회로 남았다.
해마다 가을이면 경희대, 동국대, 성균관대, 숙명여대, 이화여대에서 열리는 대학 백일장에 참석하곤 했다. 문학을 꿈꾸는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다 참여하는 자리였다. 전 아나운서였던 신은경은 산문부에서, 나는 운문부에서 적지 않은 상을 받아서 학교를 빛낸 학생으로 운동장 조회 때마다 단상을 오르곤 했다. 모교에서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전설적인 인물로는 국립한국문학관장님이신 문정희 선배님이시다. 그분께서는 두어 군데 대학 백일장에서 시와 산문 모두 장원을 차지하는 엄청난 일이 있어서 그 소문이 전국으로 전해졌다 한다.
고3 때인 1970년대 중반부터 경복궁 근정전에서 <민족시백일장>이라는 규모가 큰 행사가 열렸다. 문공부와 노산문학회 주최, KBS 후원으로 시제는 대통령께서 직접 내주셨다. 옛날 과거시험 보듯이 현장에 엎드려서 시조를 짓던 기억이 수십 년이 지나도 생생하기만 하다. 1979년 개천절에 장원으로 뽑힌 작품이「한가위」였다. 그날 입었던 하얀 블라우스와 하늘색 원피스가 해마다 10월이면 눈앞을 스치곤 한다.

늦가을이면 무의 밑동을 넉넉히 잘라서 물에 담가둔다. 푸른 잎이 돋아 자라는 걸 화초인 양 즐긴다. 어느 날 무청에서 꽃이 피었는데 그날은 온종일 그 연보라빛에 눈을 떼지 못했다. 흙도 없는 무쪽이, 제 몸은 이미 쭈글쭈글 멍들면서도 피워 올린 작은 꽃잎들. 내가 챙기지 못한 시간도 애면글면 그 어디 작은 밑동에서 나만을 기다리고 부르다 홀로 피었다가 졌겠지. 그 흔적들이 내 시편에 숨어들었으리라 믿는다. 일회성의,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우리 생의 어느 한 부분을 잠시 녹화해두는 행위가 문학이란 생각이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연민이랄까. 그래서인지 내 시조를 뒤적이면 결국 한 방향으로 밀고 가는 그 무렵의 일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정말 좋은 그림은 그리는 게 아니라 ‘그려지는’ 것이라 했다. 좋은 시조 역시 짓는 것이 아니라 지어져야 한다. 시조와 더불어 잘 사는 법을 배워 모든 목숨이 서로 소통하는 세상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 등단 무렵의 각오였다.
세상을 다 가진 듯, 뭘 좀 아는 듯 우쭐했던 문청 시절, 시작하기 전에 이미 결정되는 사랑의 감정 같은 것이 한사코 들끓어서 쓰지 않고는 못 배길 ‘무엇’이 그때의 나를 있게 한 것은 분명하다. 무릇 시는 세상과의 소통만큼 이뤄내는 것이거늘 끊임없이 열리고 여는 관계의 현장성을 얼마만큼이나 따라갔는지 돌아보게 된다. 말의 힘에 기대어 밀도 있게 다가서야 함을 익히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어디 쉽던가.
일찍 등단했기에 만 십 년을 넘겨서 첫 시조집을 상재하게 되었는데, 제목처럼 ‘내가 그린 풍경’은 물감이 서툴게 번져간 미완성의 수채화였다. 다만 용기와 그 풋풋함은 지금도 날 설레게 한다. 시집이 도착된 날, 머리맡에 쌓아 놓고 잠을 청하는데 몇 번씩 잠이 깨어 보고 또 보고 했던 서른셋 나이의 그 밤. 온통 잠을 설치고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품에 안아본 시집의 감촉을 지금까지 기억한다.
요즘이야 시조를 쓰는 시인도 많고 시조집도 한두 달마다 수십 권씩 출간되지만 내 등단 무렵에는 시조 시인이 이백 명 정도였고 지면도 넉넉지 않아서 일 년에 두어 편 정도의 발표가 최선이었다.
‘Think different.’ 각도를 다르게 바라보는 것.
어쩌면 시란 말이 넘치는 곳에서 만나는 췌언(贅言)이 아니고 말이 끊어진 곳에서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생물이다.
할 말이 없는 상태라 말문은 안 열리지만 느껴지는 어떤 속말 같은 것이 아닐까.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바꿀 수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의 불가능한 조직을 견뎌내는 것이며, 말에 붙어 다니지 않고 말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햇빛을 건너온 그늘에서 밖의 환함을 바라볼 수 있는 시조를 꿈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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