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2월 6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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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야 고분(古墳) 앞에서
남고북저(南高北低)
예부터 인걸 난다던 함주(咸州)야
말산 낮은 봉우리 나란히 누워
어느 겨를 편히 잠들 날 있었으랴
아라곡(阿羅谷) 안라왕(安羅王)의 눈물 흰 새벽 옷깃 날리며 해 떠오르니
여섯 가야 새 아침 그날일레.
다섯 바다 여섯 육지 한 울타리 새 아침 밝아오네
해 떠오르네
그대 안의 새싹
무를 깎다가 빗나간 칼이 손바닥을 깊숙이 찔렀다
뼈가 허옇게 드러나고 피가 멎지 않고 흘렀다
손이 퉁퉁 부어,
마음도 덩달아 부어올라
눈도 코도 귀도 없는 나날이 영원히 계속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갇힌 창 안쪽에서, 부기 빠진 상처가 딱지를 만들며
제자리를 잡아갔다
그뒤로 나는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려도, 아무리 피가 흘러도
바깥에서 부는 꽃바람, 먼 곳의 눈빛을 기다리지 않는다
촘촘한 시침의 그물 짜는 어부가 되어
내 안의 바다 깊푸른 수심에
가만히 두레박줄을 풀어놓는다
저 깊은 뿌리에서 연초록 새싹이, 기쁨의 꽃 한 송이가 피어오를 때까지 숨을 고르며
고요히 두레박줄을 당긴다
암사재활원 진달래방
꽃샘바람에 감기 들어 눈물 콧물 범벅이다
북한산 족두리봉 아래 진달래 몇 그루
햇살 반짝 봄날인 줄 알고 봉오리 활짝 벌린 철부지들
처진 이파리 살짝 쓰다듬자
언 살이 제풀에 녹아내린다, 소리 없이 흐느낀다
온몸 다 못 쓰는 방바닥 납작가오리 숙희
온종일 제 귀를 후벼파서 피 철철 철이
사방 벽에 맨머리 치받는 혹투성이 호야
앞 못 보고 엎드려 소리만 꽥꽥 지르는 빛나
모두 눈동자는 까만 머루알이다
철부지 농사에 덜 익어 병든 열매
재활원 문 앞에 포대기째 내다 버려도
머루알 눈동자에 처음 새긴 눈부처
족두리도 못 써본 엄마는 언제 오나, 언제나 오나
진달래 꽃잎만
눈물범벅 꽃범벅
햇살 바른 족두리봉 아래서 녹아내린다
*암사재활원: 중증장애아를 돌보는 복지시설로 미혼모의 기아들이 대부분이라 한다.
불이(不二), 식구
개숫물 함부로 버리지 말아라
뜨거운 물은 식혀서 버리고
건더기 있으면 가라앉혀 버리거라
해종일 밭머리 엎드렸다 돌아오신 아버지
발갛게 익은 밀짚모자 벗어 털며
밥상머리에서 당부하는 첫마디
지렁이 굼벵이 고물고물 땅속 식구들
그 물 받아먹고 살지러
그애들도 식군데
건더기 있으면 목이 메이고
뜨거운 물에 약한 몸 데일라
논두렁 햇쑥 돋는 산자락 논배미
모내기 하다 굽은 허리 펴는 아버지
거머리 물린 종아리 문지르며
어 씨원타,
헌혈 한 번 자알 했으니 보나마나 올 농사는 대풍일세
*불이(不二): 분별이 없고 차별이 없는 세계. 너와 나, 있음과 없음, 삶과 죽음, 미와 추가 다르지 않고 근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와 나머지 여럿의 관계는 근원적으로 둘이 아니며 관계의 그물망 속에 존재한다는 연기론적 관점.
불이(不二), 서로 기대어
고속도로 달리다가
나무에 기대고 있는 산을 보았다
허공에 기대고 있는 나무를 보았다
배를 타고
청산도 가는 길에
물방울에 기대는 물을 보았다
갈매기 날개에 기대는 하늘을 보았다
흙은 씨앗에 기대어 피어나고
엄마 젖가슴은 아기에 기대어 자라난다
하루해가 기우는 시간
들녘 끝 잡초들이 서로 어깨 기대는 것을 보았다
그 어깨 위에 하루살이들 내려앉아 은잠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