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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식에서 불이(不二), 운문호일(雲門好日)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혜선

책 제목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2월 6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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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을 돌아보면 나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두 가지 계기가 있다.
하나는 중학교 2학년, 열네 살의 일기장이다. 6·25전쟁이 끝난 지 10 년 후, 시골의 중학교에 입학한 여자아이는 몇 명 안되었다. 대부분 초등학교 1∼2학년 다니다가 중퇴하고 집안일을 돕거나 도시의 아이보개로 돈벌이를 떠났다. 나라 전체가 가난하던 때인지라면 소재지에 있는 시골 중학교에는 도서관은 없고 흙벽돌 교실 한 칸에 도서실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없던 그 도서실에서 나는 땅거미 지도록 열심히 책을 읽었다. 그때 나는 혼자 산고개를 넘어서 학교에 다녔는데, 그 산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도서실에서 책을 읽다가 늦은 시간에 혼자 산을 넘어 집에 갈 수가 없어서 학교 가까이 신작로가에 있는 숙부님 댁에서 자 야 할 때도 있었다. 이해가 부족한 채로 그냥 좋아서 읽었던 유치환, 박목월, 박두진, 서정주의 시, 신지식의「감이 익을 무렵」, 「레미제라블」 등. 그런데「로미오와 줄리엣」이 있었다. 로미오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고 싶어서 눈물 흘리던 로잘라인을, 줄리엣을 만난 뒤 “눈아, 부정하 라”고 하며 씻은 듯 잊어버리는 도입부에서 나는 사랑에 대해 절망했다. “이렇게 한순간에, 이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사랑 같은 건 하지 않겠다. 나는 가변적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변치 않는 진리를 찾겠다.”파란색 표지의 조그만 일기장에 이렇게 쓰고, 나는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남학생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냉혈동 물’(후에알게된나의별명)이 되어 쉬는 시간에도 나가 놀지 않고 자리 에 앉아서 신문을 읽거나 책을 읽었다. 그 결심은 키르케고르가 그의 스무 살의 일기장에 쓴“나에게 대해서 진리인 것, 그것을 찾겠다”라는 결심보다 6년이나 어린 실존적 자각이었다. 그러나 지구상의 가장 가난한 나라, 산골 출신의 소녀가 그 결심을 지켜 가기에는 여건이 허락 지 않았다. 그래도 교육열 높은 선비인 아버지 덕분에 이웃도시 마산에 유학하여 상업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자력으로 야간대학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직장에 다니면서도, 나는 늘 내가 가야 할 길이 나를 기다려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을 만나고 사랑꿈에 젖어 있어 야 할 20대에도 나는 늘 울고 있는 나의 길 때문에 삶의 한쪽 허리가 잘린 채 절룩이며 걸었다.
두 번째 계기는 대학에서 만났다. 장호 교수님의 영미문학 강독 시간 에 T.S Eliot의「전통과 개인의 재능」을 공부하게 되었다. 필자도 어설프게나마 시를 쓰고 논문을 쓰고 평론도 하지만, 창작과 평론을 같이 하기에 인간의 뇌 구조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창의적이고 감성적이며 직관력과 상상력이 필요한 영역이고, 하나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이고 이지적인 영역이 지배하는 장르이다. 그래서 학자나 평론가는 창작 면에서 같이 성공하는 예가 희소하다. 그런데 엘리엇은 두 분야에서 모두 성공한 희소한 천재이다. 그의 시에서도 감명 깊었지만, 위의 논문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25세가 넘어서도 시인이기 위해서는 역사의식이 필수불가결하다”라는 역사의식이다. 내가 시인이 되자 때 마침 어떤 남성 시인이 “신변잡기나 쓰는 시인이 되지 말고 큰 시인이 돼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나는 시인이 되기 전부터 역사의식쪽으로 관심이 많았다. 민간인 통제선이 지금과는 달리 그야말로 민간인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던 1970 년대 중반의 추석날 시 공부하던 동인 이진명 시인과 둘이서 민통선 안에 있는 도피안사의 군종법사를 만나러 간다는 구실로 민통선을 통과 하여 사방에 ‘지뢰 주의’붉은 글씨의 팻말이 늘어서 있고 갈대만 무성 한 길을 조심조심 들어갔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 못하는 그 법사님의 호의로 지프차를 타고 들어가 비무장지대 휴전선 철조망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월정리역에서 폭탄 맞고 널브러진 기차의 녹슨 잔해가‘철마 는 달리고 싶다’라는 허리띠를 두르고 누워 있는 것도 보았다. 한 덩어리는 남쪽 민통선 안에, 한 덩어리는 철조망 북쪽 비무장지대에 누워 있었다. 나는 그보다 더 이전,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스무살 때에도 고향 함안의, 가야시대 유적인데도 아무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멧돼지가 파헤치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는 말산리 고분(古墳)을 찾아가서 시를 쓴 적이 있다. 그래서 내 첫 시집은 거의 역사의식과 전통정신의 시들로 채워져 있다.
나는「돌문」에서 역사의 돌문을 열어야 할 우리 겨레 모두를, 자라나 는 어린 세대를, 시인 자신을 모두 역사신(歷史神)으로 창조하였다. 그 신들이 모두 일어서서 힘을 합하면 분단을 극복하고 남북 겨레가 하나 되어 더 크고 힘찬, 행복한 세계 최고의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실었다(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지금, 통일을 빼고는 거의 실현되어 세계 최고의 대한민국이 되었다). 나는 엘리엇의 ‘역사의식은 일시적인 것과 항구적인 것, 영구적인 것을 함께 인식하는 의식이며, 한 작가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차지하는 자기 위치와 자신이 속해 있는 시대에 대하여 극히 날카롭게 의식하는 것’이라고 하는 부분에 특히 공감을 느끼고 시를 창작하는 내내 지표로 삼았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우리나라 역사를 더 깊이 공부하면서, 시를 더 공부하면서, 만해와 육사와 윤동주, 매천 황현의「절명시(絶命詩)」와 다산의「애절양(哀絶陽)」등의시를만 나면서 끊임없이 추구하는 내 시의 근간이 되어 주었다.
중년 이후의 내 시 쓰기의 화두는 불이(不二)로, 차별과 경계를 초월 하여 하나가 되는 둥근 세상에 대한 열망이다. 그 이전에 써온 역사의 식과 사회의식에 우주적 상상력의 옷을 입히고, 만유에 대한 사랑의 발 현인 동체대비(同體大悲), 자애와 사랑의 세계를 지향하는 시 쓰기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이것과 저것이 둘이 아니고, 미와 추가, 선과 악 이, 죽음과 생이 다르지 않다는 초월의식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존재한다는 연기론적 관점에서 경계와 차별을 넘어서고자 하는 초월의 지를 표출하고자 하였다. 시 쓰기의 본질이 초월에 있으며 경계를 넘어 서서 하나 되는 이상의 언어적 실현에 있다고 할 때, 내가 추구하는 불 이는 불교적 의미를 넘어서서 시작(詩作)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상이 라고 생각한다. 나의 자아를 사물과 세계 속으로 투사하여 동화되어 가 거나, 자아 밖의 세계를 끌어당겨 나의 이상과 하나가 되거나, 모두 세 계와 자아와의 동일시이며, 경계를 허물어 하나되기 위한 이상주의자 의 꿈꾸기이다. 그래서 불이 다음으로 내가 추구하는 시세계는 ‘날마 다좋은날〔雲門好日〕’이다. 시인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시로 쓰이는 순간 가능태로 바꾸는, 초월적 꿈꾸기를 언어를 통해 탄생시키는 신의 가슴과 머리를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는‘永續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고통스런 열망’을 실현하는 힘으로 예술혼을 들고 있다. 잘 들여다 보면 나의 시 쓰기도 영속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오랜 역사 동안 존재 해오는 다양한 나를 만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나의 내면으로 끝없이 침잠하여 들어가는 기록이다.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내가 천착해온 역사의식의 시도 잘 들여다보면, 지금 현재 나의 자아 속에 숨쉬고 있는 역사 속의 나, 또한 아득히 연속되는 역사 속에서 무수히 살다가 숨져 간 나, 수없이 생성하고 소멸해 온 천변만화의 나… 그 많고 다양한 자 아들의 본질과 만나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에 다름 아닐 것이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한국을 여러 번 방문한 중국의 소설가 옌롄커는 ‘문학은 총이나 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문학은 어둠을 탐조하는 탐조등이 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그는 “저는 자신을 소설가라고 만 생각지 않습니다. 최대한‘지식인’으로서의 사유와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설사 지식인이라는 이름이 제게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해 도 말이지요”라고 자신의 문학관과 인생관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필자도 위의 생각에 적극 동의하면서 자신의 삶의 좌표, 문학의 좌표를 흔들림 없이 지켜나가려 한다. 동시에‘무엇을 쓸 것인가’뿐만 아니라 ‘어떻게 쓸 것인가’에도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2019년부터 4년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직을 맡아 이광복 이사장님 을 보필하여 문단을 위해 봉사할 기회가 주어진 일에 대해 감사드린다. 이어서 2023년부터 사단법인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장직을 맡아서 500 쪽 가량의 기관지 세 권을 출간하면서 1920∼30년대 1세대 여성 문인 (김명순, 나혜석, 김일엽)을 조명하고, 탈북 여성 문인 특집을 수록했다.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을 쓰고 천재적 집필을 했음에도 문학 외의 여러 가 지 이유로 불행하게 살다가 스러져가고, 그 문학적 성과조차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선배 여성 문인들을 재조명하였다. 그리고 사랑과 생명성 의 특장점을 지닌 여성문학의 특징을 살려 사회의 약자와 그늘진 곳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탈북민들의 언어생활에 대해 조명한 논문과 함께 그들의 작품을 특집으로 수록하였다. 짧은 기간이지만 필자에게 이러한 사명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언제 어느 곳에 있어도 시인으로서, 또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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