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2월 6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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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늦게 입학한 대학에서 원하던 공부의 깊이에 몰입해 가던 즈음 나는 늦은 나이임에도 결혼에는 관 심이 없었다. 한길만 보고 나가는 나를 그이는(지금의 남편) 졸업 후 대만에 유학 가서 같이 공부하자는 계획으로 솔깃하게 했다(그때는 중국과 수교 이전이어서 대만과만 교류가 가능했다).
어느 날 명륜동을 지나가다가 발견했는데, 강신항 교수(국어학자)와 정양원 교수(정인보 사학자의 따님)의 문패가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이 참 아름다웠다면서 우리도 같이 공부하여 그렇게 나란히 발전하면 좋겠다고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그런데 그 당시 칠순이 되신 그의 노모가 만류하고(그는 어머니 43세에 낳은 만득의 아들이었다) 믿었던 대만의 국가장학금이 불가능하게 되는 바람에 현실적인 여러 이유로 우리의 유학 계획은 무산되었다. 중국 문학과 동양 문학을 공부하고 비교문학을 공부하여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하고 창작과 병행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나는 계속 공부해야 하니까 아이는 낳지 않겠다, 명절에는 시댁과 친정을 번갈아서 가겠다는 두 가지 약속을 받아내고 결혼을 했는데, 막내 아들인데도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결혼이라는 현실은 나의 목에 ‘여자 의삶’이라는 족쇄를 채웠다. 우여곡절 끝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직장생활하랴 육아와 살림을 병행하랴, 공부고 시(詩)고 모두 저만치 밀 쳐둔 채로 몸과 마음이 병들어서 나는 빈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시작할 때는 그래도 공부를 놓지 않으려고, 책이 많아서 이사하기 힘들 거라 생각하고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집을 장만하고, 방 하나를 둘이 같이 쓰는 서재로 만들어 책상을 나란히 놓았다. 공부에 욕심이 많은 두 사람의 책이 모여 삼면 벽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그 서재에서 책 한 권 못 읽고 시 한 편 못 쓰는 날들이 나를 심한 갈등 속에 헤매게 하였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남편을 먼저 공부시켜야 하고, 어영부영 시 간이 흐르면 내 인생은 영영 퇴보만 거듭하다가 끝나리라는 조급함이 나를 짓눌렀다. 남편이 석사과정을 졸업한 다음 해에 무리해서 대학원에 입학했다. 처음부터 계속 공부할 것을 염두에 두고 야간고등학교에 적을 두었다. 대학원에서는 강좌마다 리포트를 제출해야 하고 발표를 해야 하는지라 낮에는 근무해야 하고, 밤을 새워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등단 10년이 다 되어 시집 한 권을 겨우 출간하고 또 10년이 지날 정도로 시는 개점휴업이었다.
나의 길을 찾아 오래 헤매었다
눈 감으면
날 기다려 울고 있는 길이 보였다
눈뜨면나는
연기 나는 사람의 마을 끝에 서 있었다
나의 길을 만나지 못하고 오래 헤매었다
나의 심장 갈라터진 안쪽에서
오랜 시간, 나만을 기다리는 길을 만났다
아무도 없는 그 길
아무도 안 간 그 길
다리를 끌며, 가시밭길 더듬어
홀로 그 길을 걸었다
오늘도 반가운 그 길을 걸어간다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로버트 프로스트의「가지 않은 길」에서 차용.
-졸시「길 위에서1」전문
30대를 옆도 못 돌아보고 정신없이 보내고, 40대가 되어 어느 하루에 열 편 정도 쏟아져 나온「길 위에서」연작시 중 한 편이다. 과작인 나에 게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만큼 아프고 절실했다고 할까. 시는 질투 심 많은 연인과 같아서 자기만 보지 않고 한눈 팔면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버리기 때문에, 나는 늘 현실에 발목이 잡힌 채로 시를 향한 갈망에 목말라하였다.
그래도 둘이 모두 석사·박사 과정 공부를 이어가야 하기에 우리는 각자의 방을 서재 겸 침실로 쓰는 데에 길들여졌다. 그 방에서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고 새벽에 깨어 책을 읽고 자료 준비하고 논문을 쓰고 가물에 콩 나듯이 시에 매달렸다.
아들 딸이 중국으로 포항으로 유학을 갔다가 독립을 한 뒤 지금까지 둘만의 집이 되었지만 우리는 길들여진 습관대로 각자의 방을 서재로 삼아 컴퓨터를 벗 삼아 지낸다. 방이 남아 있어도 책만 가득 쌓여 있는 책방이 되었다.
창작에 좀 더 몰두하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일만 하다가 끝 낼 수는 없다는 절박감에 일찍 명예퇴직을 하고, 오래 겸직하던 대학 강의도 모두 끝내고 이제는 서재에서 내 시간을 혼자 뜻대로 쓸 수 있 는 시기가 되었다. 방마다 책이 가득 쌓여 책이 주인인 집에 우리는 정 작 세들어 살면서 책을 읽고 쓰는 일에 몰두할 수 있고, 그동안 회의 참 석조차 제대로 못하던 문단 활동도 비로소 할 수 있는 지금이 나에게 가장 좋은 때이다. 비록 몸이 예전 같지 않고 반짝이던 직관력과 총기 는 떨어지고 감동이 줄어들지만, 무심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실감으 로 느끼지 못하는 행복’을 누리는 지금의 평안이 고맙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명작을 쓰지는 못해도, 지중한 인연으로 동시 대에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생을 누리고 사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의 모든 두두물물(頭頭物物)에 늘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또 새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감사 속에 하루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