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1월 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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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자신보다도 덩치가 큰 아들을 업고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속리산을 오르는 장년 남성을 한 공중파 방송이 방영하고 있었다.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감이, 이들을 따라 가며 촬영하는 기사의 거친 숨소리와 중첩되며 긴장감을 증폭시켜갔다. 지나치는 등산객들이 놀라운 장면에 아연해하며 길을 터주었다. 업혀 있는 아들은 첫눈에 보아도 정신 지체아임을 알 수 있었다. 팔다리와 머리를 비틀어 가며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불안해하던 아버지가 긴장의 끈을 조여가고 있었다. 기자가 이렇게 위험하고 힘든 일을 왜 하느냐 물었더니, 자신의 아들이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 문제가 안 될, 높은 곳에서라야만 볼 수 있는 풍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더 어려워지기 전에 보여주고 싶어서라 했다.
조금은 다른 사례가 되겠지만 1948년부터 시작된 패럴림픽과 관련하여서, 내게도 문장대에서 기자가 제기했던 질문과 비슷한 의문이 들곤 했다. 과연 장애인들에게 그토록 힘들고 위험한 경기를 종용하는 것이 타당한 것일까 라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정규 올림픽이 끝나면 연이어 장애인 올림픽이 개최된다. 지체가 부자유스런 사람들이 곡예에 가까운 기능을 보이는 모습은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눈물겹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혹자는, 그렇지 않아도 감내해야 할 신체적 불편이 극심한 장애인들이 저토록 패럴림픽에 죽자살자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의아해하기도 한다. 아마도 장애인들은 자신들도 보통 사람들처럼 활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함으로써 자존감을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 답할 것 같다.
지금은 소강상태에 있지만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전장연’ 사태를 잠시 소환해본다. 전장연은 2007년에 설립된 장애인 인권 단체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약칭이다. 이 단체가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2021년 12월부터 장애인 이동권 보장 및 장애인 권리예산 반영을 요구하며 지하철 출근길 등에서 시위를 진행해오면서부터이다.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 문을 지나다니며 운행을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시위가 이뤄졌다.
이와 같은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은 2001년 한 장애인 노부부가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역 출구에 설치된 리프트를 타다가 떨어져 사망한 사고가 발생한 이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들의 요구에 따라 2005년 ‘교통약자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체감할 수 있는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장애인 단체들의 이동권 요구는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초반에는 이러한 사정을 아는 시민들이 그들의 요구가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개선되었으면 하는 차원에서 정신적 후원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시위가 자주 그리고 격렬하게 발생함에 따라 지하철 운행이 지연되면서 출퇴근에 차질이 발생하자 시민들의 불만이 속출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심지어 일부 정치인이 한때 전장연 시위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을 이어가면서 정치권 공방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태를 두고 과연 그런 관점에서만 접근해야 할까?
문장대에 올랐을 때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 절규에 가까운 아버지의 함성과 온몸을 비트는 아들의 기쁨을 보며 나는 아버지가 품은 희망과 행위가 정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부자의 환호작약하는 모습을 보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누구도 더 이상 꺼낼 수 없어 보였다. 거룩해 보이기까지 한 아버지의 결단을 보며, 자칫 발생할 수도 있는 불상사 따위를 이유로 무모한 시도라고 비판하기 어려울 것 같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체험하는 것이 장애인에게 이토록 환호할 일이 될 줄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모두 장애인 아들을 업고 문장대를 오른 아버지처럼 행동할 수 없듯이 전장연이 요구하는 이동권도 국가가 무한대로 책임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장애인들의 소망은 단지 일반인들이 하는 일상을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뿐이란 점을 우리 모두가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곰곰 생각해 보면 장애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동이나 활동상의 제약이 우리에게 주는 고충은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예컨대 일정 기간 병원에 입원해 본 사람이라면 병원 밖의 일반인들 세계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활동 영역과 신체상의 제약을 하루빨리 떨쳐버리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입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단순 사고나 노화로 신체 기능에 제약이라도 생기다 보면, 그저 정상적으로 걷고 숨 쉬는 평상인들 모습 자체가 부러워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다. 평상인처럼 그리고 평상시처럼 활동하고 싶은 것이 지나친 희망사항이라 보아서는 안 될 듯싶다.
물론 전장연의 시위 방식이 극단적이고, 더구나 일반인들의 이동에 제약을 가하는 행위에 집착한다면 일반 시민으로부터도 호응을 이끌어내기 힘들 것이란 사실을 지적해 두고 싶다. 어렵더라도 납득할 만한 투쟁방식을 준수하면서,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부터 점차적으로 요구사항을 확대해 나가는 지혜를 보여 주길 기대해 본다. 정책당국의 예산 제약 상 전장연이 제기한 이동편의 주장 내용 모두를 단기에 실현시키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장기에 걸쳐 순차적으로 요구하는 등의 슬기를 발휘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편 작금의 전장연 시위는 정부와 지자체가 장애인들이 평상인들처럼 이동할 수 있는 시설 확충을 위한 예산을 삭감하는 등, 당초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발단했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이들의 시위를 비난하기에 앞서 휠체어 리프트·저상 버스 등 장애인들의 교통수단 이용을 위한 시설들을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떤 규모로 설치해 나갈 것인가를 정책당국이 제시해 주는 입장 표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반려견이 때로는 사람보다 나은 대접을 받기도 하는 성숙한 선진 한국의 위상에 걸맞는, 더불어 살 줄 아는 지혜로운 시민사회의 조속한 정착을 삼가 촉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