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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정중

책 제목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1월 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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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풀렸던 4월 중순 어스름한 저녁이었다. 여느 때처럼 마을 한 바퀴를 돌고자 집을 나서는데 나이 쉰 살이 될까 말까 한 여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균형 잡힌 갸름한 얼굴 눈가에는 우수가 맺혀 있었다. 어디서 오셨냐고 물으니 경계의 눈초리에 아무 말이 없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관광 오셨느냐며 다시 물어보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러나 말을 못하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행색을 살펴보니 쇼트 컷 머리칼에 분홍색 패딩 점퍼와 옅은 고동색 바지를 입었다. 꽤나 이지적이라 여기는데 서투른 한국말로‘재일교포입니다’라고 한다. 일본말이 금방 안 나와 몇 년 전 사촌마을 만취당 뒷마당에서 촬영한 TV조선 <땅의 역사>라는 프로에서 해설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제서야 경계를 풀고 어눌한 한국말로 자기 이름은 김유미(金裕美), 할아버지는 김일수(金日秀)라고 한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의 종조부도 재일교포이며 교토(京都)에 이 집안과 큰집 작은집으로 사셨으니 남다른 감회가 밀려오며 35년 전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의 감격이 생생해졌다.

여인은 자기 휴대폰에‘할아버지 집이 어디세요’‘소학교는 어디 있어요’라고 써서 보여준다. 짧은 일본말로 나의 작은할아버지는 김기수(金棋秀), 그분을 아느냐고 물으니 모른다며 자기는 오사카에 산다고 한다. 대뜸 나를 따라오라 하여 김일수의 친형님 되는 고(故) 김문수(金文秀) 집으로 향하였다. 그 집안에는 최근 2자(子) 김태용(泰龍; 71세)이 작고하고 미망인 온혜댁 한 분만 계신다. 사촌3리 마을회관 앞에 동네 안 어르신 몇 분이 함께 계셨다.‘아하, 아침에 이곳을 찾아왔던 사람이구나’하며 아구동 성으로 누구냐고 물어댄다. 대뜸‘일본 김일수 씨 손녀인데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왔네요’했더니 옆에 있던 당숙모 되는 온혜댁 이향님이 대번에 눈물을 글썽이며 와락 끌어안는다. 한동안 어우러진 모습을 사진에 담고 그 집으로 들어섰다.

나는 작은방 서재에 가서 1963년 판『사례요람(四禮要覽)』이란 작은 책자 한 권을 찾아와 펼쳐 보이자 깜짝 놀라며“이쁘다”라며 탄성을 질렀다. 그 책자 발간사에 자기 할아버지 사진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외 마디 탄성으로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 것이다. 드디어 자기 할아버지가 태어난 집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고 김일수 옹(1915∼1983)은 일본에서 큰 기업을 일으켜 모국과 고향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다. 그녀의 조부 김일수는 이름부터가 남달랐다. 성 김, 날 일, 빼어날 수, 일본에서 빼어나게 살아갈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기인 1934년에 열아홉 청년은 혈혈단신으로 현해탄을 건너 교토에서 직물업을 시작하였고, 나중엔 조합원 육백여 명이 출자금 오백만 엔으로 출발하여 1972년엔 예금고 이백 수십억 엔을 가진 동포 산업단체를 경영하였다. 이런 집안 할아버지가 한국에 오시면 호기심 많던 나는 넙죽이 큰절을 올린 기억도 있다.

수십 년 전의 일이지만 일본 일수 할아버지가 오시면 동네가 떠들썩하고 수백 호 집성촌 문중이 들썩거렸다. 이어서 족보 책을 꺼내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종숙모인 온혜댁 아주머니는 따끈한 밥을 지어 주셨고 늦은 저녁밥을 옴박옴박 꿀맛같이 먹었다. 이것이 할아버지의 밥이다. 어릴 때부터 들어오던 한국말을 잊지 않으려 애쓰던 의학박사인 아버지 김태항(金泰恒)도 작년에 작고하셨다.

8년 먼저 현해탄을 건너간 1908년생 나의 종조부 김기수, 방문자의 조부 김일수 두 집안의 이름과 사진들이 오롯이 있으며 아버지 김태항 사진도 있었다. 교포 3세 손녀딸이 쉰이 넘은 나이에 처음 찾은 할아버지의 나라. 할아버지의 집. 하마터면 그냥 떠날 뻔하였다. 인터넷으로 예약된 초해고택(주인 류근하)에서 잤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외갓집이자 태어나 자란 사촌 안동김씨 종택 바로 옆이 초혜고택이다.

나의 집 또한 그 옆집이며 돌아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서고를 뒤적거리며 1976년판 사진보를 찾았다. 김일수 김태항 김유미로 이어진 사진 족보였다. 이튿날 아침 하회마을의 충효당 종손과 후소당 류정하 님께 급히 연락하여 탈춤구경을 떠났다.

한달 뒤 일본에서 예쁜 분홍, 빨강, 노랑색 손수건 석 장과 편지가 든 국제 우편물이 날라왔다. 기역 니은 디귿 리을…, 아 야 어 여 오 요 우 유 의 이, 자음 모음이 탁탁 꺾어지며 또록또록하게 눌러 쓴 글씨이다.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여기에 올려본다.

고모님(사실은 종숙모이다) 잘 지내고 계세요? 이전에는 갑자기 갔는데 밥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우 맛있었습니다. 출발 때는 시간이 없어서, 그다지 이야기할 수 없어서 죄송했습니다. 사촌리에서는 친족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고모씨나 정중씨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초해고택분도 매우 친절했습니다. 이 여행은 인생에서 아주 좋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감사하게 손수건을 보냅니다. 고모씨와 정중씨와 초해고택씨에서 한 장씩 사용하십시오. (이 손수건은 한 번 씻으면 부드러워집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김유미 드림

그렇다. 여기는 분명 재일교포 3세 김유미의 할아버지의 나라 조국(祖國)이었다.

희미한 전설로도 들려지지 않을 것 같지만 나름의 큰 일들을 여기에 남겨 추억 속에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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