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1월 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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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가게 자판대 위에 놓인 사과, 붉음이 유혹적이다. 저토록 아름다운 빛깔에 맛은 또 얼마나 좋을까. 사과가 금값이라 선뜻 손이 내밀어지지 않는다. 아른거리는 눈길을 뿌리치고 지나치다가 덜미를 당기는 미련 때문에 소 뒷걸음질 치듯 슬며시 돌아선다. 까만 비닐봉지에 담은 사과를 들고 오는데 횡재한 듯 흥겹다. 주인이 선심 쓰듯 준 상처 입은 작은 사과 한 알, 덤으로 받은 소소한 즐거움에 기분은 저 멀리 날고 있는 새다.
사과는 껍질째 먹어야 영양분이 많다. 베이킹 소다수에 담가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씻는다. 침이 고이는 순간을 참지 못하고 크게 한입 벤다. 맛을 음미하는 순간의 행복이다.
어, 이 맛이 뭐지. 달콤도 시큼도 아닌 밍밍하고 게다가 퍼석하다. 다른 사과를 집어 들고 시도해도 완강하게 거부하는 입맛. 큰맘 먹고 금 사과를 샀건만, 속은 듯한 떨떠름한 느낌은 무엇인지. 기운이 선득해지고 몸이 파르르 떨린다. 먼지 털이개로 애먼 소파만 탁탁 털어낸다. 집 안을 왔다 갔다 하다가 내 인내심이 바닥을 기면서 봉지를 들고 부리나케 가게로 달려갔다.
사과를 보여주고 비싼 값어치에 대한 보상을 강조하며 씩씩거리는 나와 달리 가게 주인은 시큰둥하게 쳐다보며 툭 뱉는다.
“내가 사과 속 맛을 어찌 아냐고. 하나하나 먹어본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은 아무 말도 없는데…” 되려 극성스러운 여자로 몰아간다. 고분고분까지는 아니지만 아, 그러냐고 교환해주겠다는 위로의 말을 기대하고 의기양양하게 갔다가 구정물 한 바가지 뒤집어쓴 생쥐 꼴이 다. 더이상 언성을 높여봤자 속수무책 참패만 당할 뿐이다.
‘당신 오늘 단골 하나 놓친 거다. 두고 봐, 이웃에게 다 까발릴 거다.’ 속된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화가 치민 발걸음이 자꾸만 엇박자를 탄다. 집에 와서도 열을 삼키지 못해 궁시렁대다 결국 욕지기가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 맛있냐고 물어봤고 분명 맛은 보장한다며 큰 소리치지 않았던가. 2만 원이 문제가 아닌 자존심이 구겨진 운수 사나운 날이다.
몇 시간이 흘렀다. 저녁 준비하려고 주방에 들어서는데 식탁에 내동댕이친 사과 봉지가 바람에 부스럭거린다. 물끄러미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자란 형제들도 성향이 제각각이 다. 우리 형제자매들만 보더라도 성격, 관심사나 가치관, 체격, 생김새가 확연히 다르다.
하물며 같은 사과나무에 달렸다고 사과 맛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는가. 햇빛을 잘 받아 영근 쪽은 맛이 특별할 것이고, 나뭇잎에 가려 자란 것은 단맛이 덜할 수가 있겠다. 인간이나 생명을 가진 모든 생물이 그러듯이 같은 유전자라도 우월하게 타고난 운이 있고, 환경에 의해 변형된 유전자가 생길 수 있다. 같은 곳에서 함께 바라보며 성장했어도 각기 다른 삶이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지 않나. 빈 삶이거나, 알찬 삶이거나….
가게 주인 말마따나 일일이 한 입 먹어보고 파는 것도 아닌데 그 맛을 모를 수도 있겠다 싶다. 구입할 때 판매처가 주장하는 맛의 강도를 믿었으리라는 진정성으로 기운다. 아니 기울고 싶어진다. 깊은숨을 길게 내쉬며 그리 위로하니 엉켰던 속된 잡념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그래, 맛이 덜하면 사과즙을 만들면 되겠다. 설탕 넣고 팔팔 끓여 달달한 사과즙이 되면 빵에 발라먹어야지. 사과를 꺼내 깨끗이 닦으니 나를 유혹하던 빨강이 선명하다. 즙을 만들기 위해 여덟 등분으로 자른다. 꿩 대신 닭이면 어떠리. 그래도 사과 아닌가. 삶은 생각하기 나름이고, 마음먹기에 달린 것, 살아내는 방법도 여러 가지임을, 생각이 깊어지면 생각이 감옥이 되어 나를 가둔다. 괜히 속 끓이며 자신을 옥죄지 말자. 종일토록 지옥을 헤매다가 어느새 콧노래로 흥얼거린다. 내 마음이란 것이 이리도 얄팍하고 간사할 줄이야.
볼품없는 덤인 사과의 상처를 벗겨내다가 한입 먹었다.
어찌 이럴 수가!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사과 맛이다. 달콤하고 아삭한 즙!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어떤 기회가 주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불가능한 요소들로 가득한 삶이다. 같은 시각, 장소에서 구입한 복권이 한 사람에게만 당첨될 때나 글을 응모할 때도 그렇다. 비슷한 실력으로 공모전에 참여해도 사유의 의미를 스토리에서 즐겨 찾거나, 사물의 깊이를 내면으로 표현하는 것을 선호하는 심사원의 성향과 생각에 따라 판가름이 난다.
사과도 그러하다. 유독 내가 선택한 사과가 맛이 없다는 건 내 먹을 복이 그 선에 머문다는 거다. 그야말로 인생은 복불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