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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병영생활

한국문인협회 로고 정성영

책 제목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1월 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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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자식을 군대에 보내 놓고 노심초사 걱정하고 계실 이 땅의 부모님들을 생각해 본다. 한창 혈기왕성한 젊은 청춘들이 한데 모여 생활하다 보니 예기치 못한 다양한 사건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는 곳이 군대다. 안타깝게도 귀한 목숨을 잃거나 때로는 손이나 발에 장애를 입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인명 살상무기를 다루는 병영 생활은 특히 안전사고를 조심해야만 하는 곳이다.

부모님의 걱정을 뒤로하고 1967년 12월 24일, 27살 늦은 나이에 나도 군에 입대했다. 육군 제2 훈련소가 있는 논산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당시 훈련이 힘들어“잠 자나마나 밥 먹으나마나”로 소문난 30연대 2중대는 내가 훈련병으로 있던 곳이다.

동료 중에 중학생 딸을 둔 가장도 있었다. 당시 병무 행정상 뒤늦게 입영한 훈련병들이 많았다. 키도 크고 나이도 있어서 그런지 행동이 좀 굼떴다. 집합에 늦어 화가 난 내무반 장이 군기를 잡는 소위‘시범 케이스’에 걸려 무수히 구타하는 병사들의 배고픈 문제와 고참들의 기합과 구타행위 악습이 근절되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양은 밥그릇마다 밑바닥이 팽이처럼 뾰족하게 늘어나 있었으랴.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으려는 치열하고 눈물겨운 몸부림의 흔적이기도 했다.

신병훈련을 끝내고 내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나의 군번과 논서 마지기와도 바꾸지 않는다는 자랑스러운 작대기 하나 이등병 계급장을 받았다. 나라에서 지급하는 오만가지 개인 관물도 사람 키만큼 큰 더플 백으로 가득했다. 군인은 누구나 전속될 때마다 자신의 물건들이 든 이 더플백을 이삿짐 모양 메고 다녀야 했다. 배출대를 거쳐 1군 통신훈련소에 후반기 주특기 특과 교육을 받기 위해 입소했다.

이때는 1·21사태로 군기가 엄청나게 강화된 뒤라, 제대도 보류되고 있었으며 철모를 쓰고‘3보 이상은 구보’라 하여 긴장감이 돌았다. 3주 간의 교육을 마치고 사단 보충대를 거쳐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인제 가면 언제 오나’그곳에 자대배치를 명 받았다.

강원도 전방지역이고 훈련이 힘들기로 소문이 자자한 그런 부대였다. 부대는 역시 영외훈련 중이었다. 더플백을 메고 훈련장을 찾아갔다. 신병 신고를 마치고 PX에서 과자와 빵, 막걸리를 사다 회식도 했다. 그런데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내 관물이 들어있는 더플백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소모품 외의 관물은 망실(亡失)하면 본인이 변상을 해야 한다. 당시 군대에서는 모자라는 관물을 남의 것 훔쳐서 채우는 악습이 자행되던 시절이었다. 논산 훈련소에서는 변소에서 볼일 보고 앉아있는 훈련병의 모자를 벗겨 가기도 했다. 치사한 얘기지만 식기나 숟가락도 분실이나 도둑을 맞으면 나도 남의 것을 훔쳐서라도 채워야 했다. 일등병 때 동료 한 명과 2, 4종계에게 된장과 고추장, 두부, 기름 등을 얻어 특식을 끓이기로 했다. 끓이는 용기가 하필이면 L,M,G 빈 탄통이었다. 교환대 아궁이 장작불에 한참을 올려놓았는데 김도 안 나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쫄따구 두 놈이 탄통을 밖으로 끌어 내, 동료는 앞에 앉아있고 내가 군화 신은 발로 뜨거운 탄통을 밟고 잠긴 손잡이를 위로 제꼈다. 순간 펑하는 폭탄이 터지는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은 얼굴과 팔 등에 심한 화상을 입고 그대로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탄통 뚜껑에 있는 고무 패킹을 제거하지 않은 잘못이었다. 지휘관 장교들이 문책을 당하거나 관련된 2, 4종계나 사건의 장본인인 우리는 물론 영창을 갈지도 모르는 대단히 위험하고 큰 안전사고였다. 모두 쉬쉬하면서 영외에서 페니실린까지 구해오고 옆에 있는 의무지대의 도움이 컸다. 얼굴을 온 통 흰 붕대로 싸매고 교환대 방에 한 달을 누워서 지냈다.

상병 때는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터졌다. 우리 부대는 한겨울에 대간첩작전에 투입되었다. 부대는 간첩들과 조우해 치열한 교전으로 사상자도 발생 했었고, 나는 군용 짚차에 치는 교통사고도 겪었다. 한때는 폭설로 부식이 끊겨 소금 국으로 식사를 하기도 했다. 병장 진급 후 통신대 서무계로 행정반 40번에서 먹고 자고 생활했다. 40번은 사무실 전화번호였다. 내무반은 점호도 취하고 동초(動哨)나불 침번도 서야 하고 이래저래 번거로워 안 내려갔다. 그런데 새로 전입 온 일반 하사가 내무반장이 되었다. 저녁 점호시간에 40번으로 전화를 걸어 점호 집합을 요구했지만 나는 응하지 않았다. 나보다 늦게 입대했 고 부대 전입도 늦은 사람이었다. 하사의 자존심이었는지 군기를 잡으려고 몽둥이를 들고 행정반으로 서슬이 시퍼렇게 쫓아 올라왔다. 계급과 직책으로 기존 질서를 꺾으려 하니 저항과 마찰은 필연이었다. 결국 울타리 밖으로 나가 맞짱을 뜨자는 것이다. 그는 나보다 젊고 계급도 높고 덩치도 좋았지만, 나도 군대 짬밥이 있는데 호락호락 당할 군번은 아니었다.

좋다! 물러서 꺾이고 싶지 않았다. 계급으로는 하극상이었으니 이 또 한 영창을 갈 수도 있는 군기문란이었다. 그러나 체면 문제였는지 그는 중대장이나 인사계 등 지휘관에게 보고하지는 않았다. 그 후 다시는 점호 집합하라는 말은 내게 하지 않았다. 나의 군생활은 제대할 때까지 내무반장으로부터 자유로웠음은 물론이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만만하게 보이면 어디서나 깔아뭉개려 드는 세상이다. 때로는 그래서 막말로 깡다구도 필요하지만, 늘 행운이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이토록 우여곡절에 파란만장한 병영생활이었지만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36개월 병영생활을 마치고 영광스럽게도 대대장과 연대장 표창까지 받 고서 내 나이 30살에 마침내‘고향 앞으로 갓! ’만기제대특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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