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1월 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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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듣고 있다. 아무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정자 곁에 서 물소리만 들리고 있다. 고독이 침범할 때 더 깊은 고독으로 던지는 것이 나만의 해법이다. 마지막 남은 겨울눈을 찾아 흙마저 꽁꽁 얼어 버린 계곡을 따라 들어갔다. 그곳엔 한 해 마지막 내렸던 눈이 냉동된 채로 정적을 만나고 있었다.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로 알려진 안동 만휴정이다. 조선 시대 김계행이 말년에 독서와 사색을 위해 지은 곳이다. 외나무다리가 계곡을 끼고 구름처럼 걸쳐 있고 건너편엔 정자가 편안하게 얹혀 있다. 계곡에 넓게 펼쳐진 바위를 비껴가며 굽이쳐 장쾌하게 흘러내렸을 물살이 얼음 밑에 숨어 있다.
순간 어디선가‘물소리, 물소리만’그런다. 그렇다. 깊은 계곡에 소리가 없다면 두꺼운 얼음 밑에 숨어서 흐르는 물줄기를 누가 알 수 있으리. 앓는 소리 없는 고통에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법이다. 신음이 없다면 누가 다른 이의 아픔을 가늠하겠나. 물은 소리가 없다. 물은 바위나 모래, 바람을 만나 소리를 내고 경기를 일으킨다. 그것들과 스치고 부대끼며 생채기를 앓는 소리를 낸다. 봄만 되면 향기를 품어 대는 천리향도 바람과 부딪혀 아우성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깊은 밤 2시면 전화벨이 울린다. 괴로워 죽겠다고, 숨쉬기조차 힘겹다고 신음한다. 그에게 공황 장애가 온 듯했다. 전화를 받아 주느라 잠이 토막 나서 나에게 수면 장애가 오고 구내염이 발생해 물조차 마시기 힘든 지경이지만 어찌하겠는가. 사람이 죽는다는데. 무심했다가 나쁜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양심의 가책은 어찌할 건가.
화려해 보이는 도시 속에 말 못 하는 고독이 끼어 있다. 정신의 바닥에 딱 붙어 헤매는 그가 보인다. 한파가 가슴 깊숙이 파고든 지 오래이니 심신이 꽁꽁 얼음장일 텐데 그런 자에게 해동의 봄날이 올까 싶다. 물질적 생활은 풍요하나 가족들은 외면하고 있다. 매일 불면의 밤을 새운다. 정에 궁핍하고 배신감에 절어 버린 그는 냉동 창고 속의 동태처럼 건조하다. 표정 없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그는 자신의 방에서 두문 불출이다. 외로운 그의 방으로 달빛이 숨죽이며 들어와 지친 마음을 주무르던 밤에는 에는 바람에도 마음 베이지 않으려 애쓴다고 한다. 만사에 무심해져 동면에 든 곰처럼 이불 속에 파묻혀 있다가 막걸리를 따르며 거울 속 자신과 건조한 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출근 시간이 되면 매일 똑같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간다. 강남 초호화 빌딩에 저런 인간이 살고 있나 싶어 동정심이 일어날 만큼 행색이 형편없이 초라하다.
그는 소아청소년과 의사다. 명문고를 수석 졸업하고 서울의대에 들어갔다. 서울대병원 교수로 재직 후 개원했던 때는 베이비붐 세대들이 그를 만나려면 2시간 이상 대기해야 처방전을 받을 수 있었다. 결혼 출산율이 낮은 지금, 그때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환자를 본다며 한때의 영화를 노화한 세월 탓이라고 떠넘긴다.
2시만 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못 참겠다고 한다. 술에 의지하지 않고선 하루도 지나갈 수조차 없다고 징징거렸다. 전화해도 되느냐는 말에 그러라고 했더니 어김없이 밤중 2시면 전화를 걸었고 나는 전화를 자동 인형처럼 받아 주었다. 벨 소리에 잠을 깨면 누워 있는 채로 듣기도 하고 잠이 덜 깨면 비몽사몽으로 응대했다. 나는 수필 작문 동기로 대화를 끌어갔다. 달을 좋아한다기에 달을 주제로 쓴 글, 내 고독이 발상 전환을 일으킨 얘기, 치유하고 회생하였을 때를 적은 글을 낭독해 주기도 했다. 대화가 절실한 그에게 마음의 문이 흔들렸다.
한 계절이 지나가면서 빛줄기가 새어 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가 웃었다. 오랫동안 굳어 있던 안면 근육이라 어색했지만, 그가 웃는 소리를 눈으로 보는 듯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그가 더 박꽃같이 웃기 시작했다. 소년같이 순진한 웃음소리가 마침내 새어 나왔다. 죽을 줄만 알았던 그가 친구도 만나고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산책하거나 운동도 한다고 했다. 시리도록 파란 늦겨울 하늘이지만 점심시간을 틈타 따뜻한 햇볕을 느끼며 하천 길을 걷다 막 돋아난 잡초의 새순을 보았다고 말했다. ‘살아 있음에 행복하다’라고도 했다. 그가 살아나면서 나는 다시 얼음장 밑 물이 되었다. 전화 받느라 전염된 수면 패턴이 혼란스럽고 구내염이 낫질 않아 아직도 나는 벌벌거리는데, 그가 나보다 더 나은 듯했다. 내가 그보다 고독해져 버렸다. 그가 행복해지면서 전화벨 소리의 관성이 기다림의 습관을 만들어 놓은 듯했다. 그날부터 사각의 공간 속 정적에 내가 갇혀 버렸다. 나의 잠을 토막 내던 2시의 전화벨 소리는 더는 울리지 않았다.
얼음 속에 숨어서 ‘추르르르’ 흐르는 물소리. 숨어 우는 물소리에 글감을 얻는다. 물소리는 내게 백지 위에 낙화 같은 서정을 그리고 쓰게 한다. 글 속에서 은밀히 흐느끼고 글을 쓰는 동안 나도 모르게 어느새 나 자신을 치유한다. 꾹꾹 눌러 가며 조곤조곤 쓴 내 글자들은 구름다리 아래 숨어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만휴정으로 건너간다. 정자 마루에 앉아 따뜻하게 쓰다듬고 토닥이며 위로의 휴식을 건네기도 한다. 울음을 주저하지 말자. 눈물은 마음의 독을 뽑아내는 성스러운 물줄기이니까. 신음이기도 하지만 치유의 눈물 소리인 것을. 산속 썩고 낡은 낙엽을 모아 묵히고 두드리며 울어 주는 물소리. 그 고통의 신음이라도 있어 우리는 듣고, 울어 주고, 기대고, 안아 주고,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