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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탑

한국문인협회 로고 정정애

책 제목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1월 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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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타사를 품은 공작산 자락엔 어느새 옅은 녹음이 우거져 싱그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계곡의 물줄기가 건장한 남성처럼 박력 있게 쏟아져 내린다. 물살이 흐르는 한쪽 모퉁이에 쌓인 모래밭에 누가 만들었을까? 크고 작은 돌탑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은다.

돌탑을 처음 보았던 오래된 기억이 흑백 영상처럼 떠오른다. 엄마 손에 이끌려 뒷산에 있는 보덕사에 갔을 때다. 절 입구 풀숲 위로 우뚝 솟아 오른 시커먼 두 개의 돌탑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처음 보는 돌탑은 은밀한 비밀을 품은 듯 신비로우면서도 탑이 품고 있는 웅장함에 위축이 되어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요즘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여러 유형의 탑을 볼 수 있어 예전처럼 희귀함이 주는 신비감은 사라졌다. 그렇다고 탑을 쌓은 이의 각기 다른 염원까지 감소되지는 않는다.

나의 우상이었던 엄마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서 여섯 자식의 탑을 쌓으셨다. 엄마의 첫 번째 탑은 태양처럼 바라보는 큰오빠였다. 아들을 선호하는 시대에 첫아들을 출산하면서 엄마의 행복은 시작되었다. 가문에 대를 이어갈 큰오빠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대를 받은 셈이다. 뒤이어 줄줄이 태어난 두 언니들은 둘째오빠가 태어나면서 뒷전으로 밀렸다. 둘째오빠 역시 또 다른 의미의 태양으로 엄마 마음에 자리매김을 했다. 그 뒤가 나였지만 엄마의 태양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어떤 지각변동도 없었다.

내 뒤를 이어 남동생이 태어났으므로 엄마는 여섯 개의 탑을 가슴에 쌓으셨다. 크고 작은 탑들 중에 나는 다섯 번째였으므로 엄마의 나에 대한 관심도 다섯 번째였다. 대가족을 보살펴야 하는 엄마는 하나였고, 그 손길을 그리워하는 대상은 여럿이었다. 아들들이 하늘에 빛나는 태양이었다면 딸들은 울 안에서만 피어야 하는 꽃이었다.

완고하셨던 아버지는 언니들이 성인이 되었어도 바깥출입은 어림도 없었다. 언니들은 어쩌다 외출을 하려면 나무 울타리 사이로 구두를 밀어 내놓고 살그머니 집을 나와 아버지 몰래 읍내 구경을 다녀오곤 했다 는 이야기를 전설처럼 듣기도 했다. 나를 구속했던 엄마의 잔소리는 언니들에 비하면 사치일 뿐이었다.

어쨌거나 반비례하는 엄마의 관심 속에서 엄마의 탑들은 나름대로 견고하게 완성되었다. 나의 돌탑이 한 칸씩 쌓일 때마다 여자로서 행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엄마의 지침서 같은 가르침이 돌탑 사이에 같이 쌓였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힘겨웠던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참는 것이 여자의 미덕이라고 가르치시던, 그 시절엔 듣기 싫었던 엄마의 지혜로운 훈계 덕분이었다. 지나고 보니 엄마가 해 주었던 말들이 퍼즐 조각처럼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인생이라는 그림이 완성되고 있다.

엄마는 평소의 소원대로 태양 같은 큰오빠의 보살핌 속에서 평생을 사셨으니 그만하면 엄마는 정성으로 탑을 쌓은 공덕을 제대로 누리신 셈이다. 그 견고하던 엄마의 여섯 개 탑들도 비껴가지 않는 세월 앞에서 틈이 생기고 연륜 만큼 곳곳에 이끼가 끼어가고 있다. 내 나이 풋풋하던 시절에 보았던 엄마의 얼굴, 언제부터인가 내 모습이 엄마를 닮아 가고 있다. 엄마가 내게 했던 잔소리를 나도 똑같이 딸에게 하고 있다. 살면서 어쩌다 한번, 개울가에 널브러진 돌탑들 사이에 작은 탑을 쌓아보기도 하고 큰 돌탑을 지날 때면 돌멩이 하나를 그 위에 올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 역시 엄마처럼 애지중지 쌓은 내 탑은 자식이란 이름의 아들딸 탑이다. 내가 그랬듯, 아직 미완성인 아이들은 어느새 내 품에서 벗어나 각자의 탑을 쌓아 가고 있다. 하지만 내 아이들이 미완성이라고 여겼던 건 내 생각이었을 뿐. 주변을 보살피며 지혜롭게 살아가는 자식들의 사려 깊은 행동이 고맙고 대견하다.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옹졸하게 살아온 내 젊은 날들이 부끄러워질 때도 있다.

이만하면 되었다 하면서도 순간순간 뭔가 채워지지 않아 미완성이던 나의 탑은 문학을 만나면서 완성을 향해 가고 있다. 허전하던 삶이 만족으로 채워지고, 낭비하는 것 같던 시간들이 그득히 메워져 간다. 내 키만큼 높게 쌓은 탑 꼭대기에 수필이란 돌멩이를 올려놓으니 비로소 탑이 완성된 것 같다.

내가 엄마보다 조금 나은 삶을 살았던 것처럼, 내 아이들도 나보다 좀 더 나은 삶이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내 아이들이 쌓아 가는 탑이 견고하여 세월 앞에 흔들리지 않기를, 그런 소망을 담은 돌멩이 하나를 개울가 돌탑 위에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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