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1월 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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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아트홀이다. 한 달 전 가까운 인천 공연예매를 놓친 까닭이다. 국지성 소나기가 퍼붓겠다는 소식을 들으며, 찜통더위를 안고 도착하였다.
<고도를 기다리며> 9개 지역공연은 전석 매진이다. 연극 시작 1시간이 지나 인터미션 때에 느낀 몽매한 상황이 처음이 아니다. 그때도 1막이 끝날 즈음에 이런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무대 위 허름한 옷을 걸친 두 노인이 무슨 말을 계속 주고받다가 막간을 맞았다. 2막부터는 배우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너무나 익숙한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이지만, 내용이 기억에 없어 공연을 앞두고 책을 사서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신구, 박근형의 배우 역할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로 누가 더 잘 맞을까 배역을 상상했다. 얼마 전 TV <전원일기> 후속으로 방영되는 <회장님네 사람들>에 신구, 박근형의 모습을 보았기에 이번 연극에 더 관심을 둔 것 같다. 여든이 넘은 연세에 과연 횡설수설하는 베케트의 작품을 공연할 수 있을까 염려가 앞선다. 무대 위 두 배우는 한 배우의 호흡이 끝나기도 전에 서로의 대사를 주고받으며 2시간 넘게 더위를 잊게 해주었다.
1952년 사뮈엘 베케트는「고도를 기다리며」를 발표했다. 2차 세계대전 즈음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입한 작가. 전쟁 중에 발표한 작품이라 여기서 ‘고도’는 전쟁의 종식이자 평화가 아닐까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작품에는 흰 수염이 난 사람이라고 소년이 알려주었으니 사람, 신 혹은 희망, 구원은 물론 삶이나 빵이라는 독자의 의견도 다분하다.
20년도 넘은, 처음 이 연극을 만났을 때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순간순간을 즐기며 웃었던 것 같다. 이번엔 웃음이 사라졌다. ‘고도(高度)’를 생각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 작품의 주인공이 고도(Godot)라는 인물임을 그 당시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번 연극을 보고 나오는데 부모님 따라 함께 온 학생이 어려워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프랑스 극작가 카뮈가 쓴「시지프 신화」에서 ‘인간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부조리하며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뿐이지 원인과 결과가 없는, 연결고리가 없는 부조리극에「고도를 기다리며」가 해당한다. 두 사람의 대화가 엉뚱하며 서로 딴소리다. 에스트라공이 신발을 벗는 것에서 시작하여, 무대에 놓인 나무 한 그루가 관목인가 교목인가가 불쑥 나오고 잊을 만하면 나오는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 등. 난해한 작품으로 설명이 없어, 독자나 관중이 처한 상황에 따라 고도의 의미는 달리 해석된다.
고도(Godot)는 영어의 신(God)과 프랑스어 신(Dieu)의 합성어로 신을 의미한다. 하지만 베케트는 신을 찾지 말라고 했다지 않은가. 줄거리를 살피면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의 하루 보내기에 포조와 럭키가 등장한다. 럭키의 목에 긴 끈을 포조가 잡고 있다. 주종관계로 보이는 둘은 무대를 긴장으로 만든다. 바닥을 치는 채찍과 무거운 트렁크와 간이의자를 바닥에 놓지 않고 계속 들고 있는 럭키가 수상하다. 모래가 들어 있는 트렁크—— 중요하지 않는 것을 들고 있는 럭키의 마음은 무엇 때문인가. 아마 주인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을 나타낸 것 같다. 포조가 말한다. “아무리 하찮은 인간이라도 만나면 다 배울 점이 있고 마음이 넉넉해지고 더 많은 행복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또 럭키에게 모자를 씌워주자 4쪽이나 되는 분량의 대사를 읊조린다. 그 내용은 인체측정, 테니스, 미완성, 제7기의 혹독한 추위, 노르망디 등 엉뚱하고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다. 노예의 신분으로서 그 모자를 썼다는 것으로 많은 대사를 쉬지 않고 줄줄이 내뱉음에 관객은 박수로 호응한다. 캐릭터도 다양하지 않다. 등장인물은 모두 다섯이다. 나머지는 1막 끝과 2막 끝에 “고도 씨가 오늘 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하랬어요”라고 말을 하는 소년이 있다.
아누이가『피가로』지에 “광대들에 의해 공연된 파스칼의 명상록”이라 평을 했고,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새로움을 주었기에 관객들이 몰렸다. 신문과 방송이 작가 베케트와 인터뷰로 ‘고도’가 누구인지 해답을 찾으려 했지만 허사였다. 알랭 슈나이더가 베케트에게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냐고 묻자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했단다.
작가 베케트는 생활 역시 폐쇄적이라 베일 속의 인물이다. 1969년「고도를 기다리며」로 노벨상을 받았을 때,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고 일체의 인터뷰를 거절한 채 생을 마감한다. 현대의 미술사조가 과거 전통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추상을 지향하듯이「고도를 기다리며」도 전통적인 연극이 아닌 반연극, 부조리극이다.
고도는 죽음이다. 희망, 구원이 아닌 기다리지 않아도 어디쯤 반드시 한 번은 나타나는. 2막 마지막에 고고가 고도를 기다리다 나무에 목을 맨다고 허리끈을 풀어 잡아당기자 끈이 끊어진다. 그럼 내일은 튼튼한 끈을 가지고 오자 한다. 죽음에 대한 강한 의지라면 과장일까. 죽음—— 고도가 와야 하는데 오늘이 아닌 내일이라고 말해주는 소년은 젊음, 희망이지만 나이 든 두 방랑자에겐 기다림 아니겠는가. ‘내일 고도가 오면 살고 오지 않으면 목을 매달자’한 것도 죽음이 오면 받아들일 것이고, 오지 않으면 자살을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 밤이 되어 자러 가야 한다. 그러나 둘은 그 자리에 서 있다. 기다렸으나 담담히 받아들이기엔 오늘 밤조차 두려움이 앞선 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