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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바람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형숙(군포)

책 제목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1월 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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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이 짙어가는 여름이다. 담장의 능소화는 초록빛 운동장에 붉은 물감을 붓끝에 흠씬 눌러 찍은 듯하다. 걸음을 멈칫하고 마주한 꽃이 교정 벤치에 나란히 앉아 팔을 걸고 사진을 찍었던 친구들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며칠 전 고향 친구를 만난다며 무궁화호 왕복권을 폰에 저장하고부터는 벌써 동면하던 의식이 눈치를 채고 스멀거리며 학교 앞 들녘을 가로지른 지평선과 맞닥뜨린다. 권태롭던 세상이 선물 같고 머릿속은 바쁘게 시공간을 넘나든다. 팽창하는 가슴에 불쑥불쑥 내미는 그리움을 누르며 다독인다. 고향은 심층 행간에 밑줄 친 곳으로 휑한 바람이 불 때마다 들추어 보던 곳이 아닌가.

수업 중 칠판에 집중하다가도 촌음을 다투며 창밖을 바라볼 때면 하얀 들녘을 가르는 기차를 종종 보게 된다. 그건 행운이었다. 언젠가는 저 은하수를 건너 문명의 도시로 떠나리라는 언약은 졸리던 잠을 화들짝 깨우기도 했다. 운동장 건너 벌판은 계절마다 꿈을 상상하는 화폭을 빚어냈다. 겨울이면 허허로운 한 자락의 시림, 봄의 움틀대는 생명의 조짐, 열망의 여름이 지나 가을이면 허수아비에 놀란 새 떼가 곡식 익은 들녘에 날갯짓하는 공간으로 그곳은 눈을 감고 보면 더 잘 보인다.

읍내는 산이라 부를 만큼 크지 않지만 엄연한 산으로 옥녀봉이 있다. 기품의 금강을 옆에 끼고 있는 정상에 올라 때론 먼 시야를 내려다보며 친구들과 뒤엉킨 가슴을 풀기도 했다. 기차가 경유하는 플랫폼, 원근에서 달려온 터미널 버스, 배 나룻터의 교통편이 지척에 있어 그로 인한 방향이 같은 등하교 시간이면 도보가 꽉 차는 병목현상이 일어난다. 나는 당번으로 교문 앞을 지키는 날이면 길 건너편 남학생들의 손짓 세례와 휘파람 소리에 부끄러워 뒤돌아서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흑백 교복 차림은 마치 펭귄의 긴 행렬처럼 추억의 한 자락이 되었다. 수업시간에 부스럼 빵을 먹고 복도에서 벌을 받는 친구들, 새로 부임한 총각 선생님을 독차지하던 예쁜 친구, 체육 시간에 이유 없는 벌로 운동장을 돌았던 숨가쁨, 시험시간 컨닝으로 교무실에 호출되던 친구의 씁쓸한 표정 등 꿈의 시원들이 주마등 되어 점점 생각에 잠겨 빠져드는데 누가 어깨를 툭 친다.

며칠 전 같이 떠나기로 약속한 정이였다. 이른 아침 영등포역 플랫폼 전광판 번호가 깜박거리며 출발을 서두르란다. 숙이는 수년 전부터 카톡 갤러리에 손수 가꾼 꽃을 올리며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끝 얼마 전 “구경 하러 한 번 놀러 와”라는 통화 속의 언급은 다른 때와는 달리 꼭 오라는 요청 같았다. 분재에 남다른 취미가 있다는 소리를 귀동냥으로 들었지만 이참에 직접 가꾸고 있다는 꽃밭을 구경하기로 하고 정이와 기차를 타고 나선 길이다.

숙이는 학생 신분의 남편을 만나 시댁의 도움을 받으며 신혼생활을 했다. 그러다 보니 혼자 삭혔던 서러움과 사연이 많단다. 어려서는 금지옥엽으로 컸던 반면 가부장적인 시어른을 모시는 일은 든든한 남편이 옆에 있다 한들 서투름이 오죽할까마는 효심까지 지극했다. 고생하는 부모를 보며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그 가정은 교육의 현장이며 귀감이 되지 않았던가. 남부럽지 않은 백년대계 농사도 잘 지었다.

오랜만에 본 숙이의 환한 표정에서는 간간이 얽혔던 매듭이 풀어진 듯 여유로웠고 벼린 날의 눈빛마저 무뎌진 듯 비워진 모습이다. 역 앞으로 마중 나온 차를 타고 시내와 떨어져 있는 꽃밭을 향했다. 풍수가 좋고 배산임수 지형으로 호수가 초입에 있는 고즈넉한 마을이다. 산 중턱에 작은 집을 뒷배경으로 꽃밭이 시골 마당보다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두 걸음 정도 넓이 여러 밭두렁에는 온갖 꽃과 채소가 심어져 있었다. 소일거리치고는 손이 많이 가는 분량의 농지였다. 무농약에 친환경적으로 키우다 보니 돌아서면 풀이 나서 잠시도 쉴 사이가 없다고 한다. 아파트 생활이 시들해지며 공허한 현실 도피 겸 밭을 가꾸는 전원생활은 만만치 않다고 하지만 산새와 더불어 누리는 흡족한 내심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호미질로 한참 밭을 가꾸다 보면 새들이 찾아와 말문을 열어 주고, 꽃바람이 불어오면 지친 등을 쓰다듬어 주니 심심할 틈이 없다고 한다. 대궁 끝에 맺어 영그는 열매를 보는 뿌듯함은 시름도 잠시 잊게 하거니와, 이 모든 소일이 한유를 즐기는 일이 아니겠나 싶다. 집 옆의 작은 산과 큰 산의 끝자락이 연결된 계곡 숲속에서 너구리, 고라니가 무리지어 나와 때론 놀라기도 한단다. 마당과 경계를 이룬 꽃밭은 태양빛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한 번도 대면 없던 꽃이 웃었다. 블루베리의 보랏빛 열매가 올망졸망, 감자꽃도 꽃망울을 부풀리며 내실을 채우고 있었다. 순간 친구의 지난 곤고함이 머리를 관통한다. 수시로 호흡을 나눴을 풀잎마다 친구의 상념 내지는 수심이 내려앉은 듯했다. 하지만 나뭇잎은 생각할 여지 없이 지나온 일은 다 지우라고 손사래 치며 흔들어 댔다.

산 오름 아담한 집에서 손수 준비한 점심을 먹고 찻잔을 들고 잔디 위에 놓인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았다. 데면데면 마주한 셋은 얘깃거리를 찾으며 옛 모습 그대로라며 너스레를 떤다. 여고 시절 의기양양하고 오만했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굳세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세월이 엿보였다. 차를 마시다 보니 겹겹이 둘러 굽어진 먼 산과 이마의 주름이 닮은 꼴이다. 그 고운 살빛이 퇴색되었다. 학창 시절을 뒤로하고도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삶은 단조롭지 않았고 시련조차 한 순간에 넘겼다. 꿋꿋이 살아온 친구들이 대견하고 예순 넘어 지금 여기 함께함이 이 또한 기적이 아니겠는가.

한나절이었지만 한 세월처럼 얘기를 나누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정이와 나는 먼 산을 주시했다. 호강하고 돌아오는 길이 왠지 모를 회한과 그리움이 겹줄로 허공에 너울거렸다. 헤어지며 다음에 또 만나자고 한 약속은 말 줄임표를 연이어 찍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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