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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내일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명진(부천)

책 제목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1월 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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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은 스냅사진과 같고, 변형은 왜곡된 기억이나 보정된 사진과 같다. 망각은 기억하지 못하는 어제, 꺼내보지 않는 사진과 같지 않을까?
나에게는 서른일곱 살의 아버지가 있었다. 내가 10살 되던 해 3월 30일, 아버지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오늘은 사라진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추위가 꺾이고 코트를 벗어버릴 때쯤이면 엄마에게서 전화가 온다. 내가 회사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집안일을 무던히도 도와주시던 엄마가 까탈스러워지는 시기이다.
“제사음식은 네가 장만해야 한다.”
확인 전화를 몇 번씩이나 하고 시간이 없다고 하면 회사에 월차를 내라고 강요한다. 자식이 넷이나 되는 데 왜 내가 아버지 제사상을 꼭 차려야 되는지, 엄마가 아무리 고마워도 나이가 들수록 은근히 열받는다.

오후 6시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나는 회사를 나왔다. 아직 일몰 전이라 가로등 불빛이 거리를 장악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어스름 저녁의 기운에 시야를 흐리지 않았다. 대체로 말짱한 정신의 시간대였다. 월차도 내지 않고 정시에 퇴근한 나를 보면 엄마가 인상을 쓰고 잔소리를 퍼붓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느긋하게 집으로 향했다. 택시 정류장으로 걸어가다 앞에서 오는 사람과 쾅 부딪쳤다. 남자는 땅에 떨어진 서류 가방을 집으며 한 손으로는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내가 고개를 끄떡이고 걸음을 옮기자 남자는 명함을 주며 혹시 다친 데가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어휴 창피해.’ 나는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여의도 시범아파트요”라고 목적지를 말하곤 뒷좌석에 앉아 욱신거리는 다리를 손으로 주물렀다. 물티슈를 꺼내 까진 무릎에 엉켜있는 피를 닦으며 찌릿하게 통증이 전해오는 무릎을 두 손으로 감싸안았다. 에이 월차 낼걸. 말 안 들어서 벌 받았네.

현관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가 와서 제사음식을 다 만들었어. 너는 오늘 같은 날 월차 내고 와서 일 좀 하면 안 되니?”
“엄마, 나 절뚝거리고 있는 그것 안 보여? 엄마가 늦지 말라고 아침부터 전화로 잔소리 하니까 서둘러 오다가 넘어졌잖아. 그리고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재재작년에도 내가 월차 내고 일 다 했거든. 안 하긴 뭘 안해.”
현관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에 부엌에 있던 언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는 일하고 오는 애한테 왜 그래요. 너도 엄마한테 왜 짜증이야.”
나는 신경질적으로 언니에게 말했다. 
“맨날 나한테만 잔소리하잖아.”
오늘 제사가 끝나면 기필코 엄마에게 따져보리라 생각했다. 제사가 가까이 오면 왜 나에게만 유독 화를 내는지 이유를 알아야겠다.
“아버지가 특별히 너를 사랑하고 예뻐했어. 제사음식은 꼭 내가 만들어.”
이런 억지가 어딨어. 가공의 기억을 나에게 심어주면서 엄마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버지가 어느 날 사라졌다는 것밖에 나는 알지 못한다. 사라짐은 잊는 것과는 다른 것이니까.

먼 어제 초등학교 시절의 이날은 밤 12시까지 깨어있느라 눌리는 눈꺼풀을 손으로 잡아당긴 기억뿐이고, 가까운 어제의 이날들은 음식을 만들고 차리고 설거지하느라고 분주한 기억뿐이다. 사진 속 아버지를 제대로 본 기억이 없다. 나는 욱신거리는 다리로 서서 엄마가 장롱에서 꺼내온 아버지 사진을 찬찬히 바라봤다. 모직 외투에 목도리를 두르고 2:8 가르마로 나눈 머리와 얇은 입술 작은 눈과 오뚝한 코를 가진 남자. 정면을 응시하는 아버지의 눈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담고 있는지 가늠이 안 되었다. 주름 하나 없는 서른일곱 살의 아버지는 내일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후-,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가 다가와 가만히 내 어깨를 감쌌다.
“고생했어. 다리 아프지.”
“괜찮아. 언니 아버지 너무 멋쟁이셔. 오빠가 아버지 판박이네 근데 오빠는 왜 멋이 없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아니야 오빠는 30대 때도 멋없었어.”
언니가 내 등을 치며 웃었다.
“가족이잖아.”
“아버지는 가족이 아니야?”
“그러게.”
언니는 두 팔을 벌리며 웃었다. 나도 멋쩍게 웃었다.

11시가 넘어 병풍을 친 뒤 제사상이 차려졌다. 아버지 사진과 지방을 제상에 놓고 현관문을 조금 열었다. 큰오빠가 무릎을 꿇고 분향하고 두 번 절을 한 다음 술잔에 술을 절반쯤 따라 퇴주 그릇에 세 번으로 나눠 부은 다음 또 두 번 절을 하였다. 그다음 뒤에 서 있던 우리들도 다 같이 재배하였다. 남동생의 늦둥이 아들이 엉덩이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 두 손을 앙증맞게 이마에 갖다 대고 절하는 모습에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느라 얼굴이 벌게졌다. 누군가 큭 하고 웃었다. 그러자 참았던 웃음들이 하나둘씩 터졌다. 덕분에 우리는 웃으며 아버지 제사를 마쳤고 엄마는 말없이 꼬마 손주의 손을 만지셨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는 제사를 지낼 때마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넋두리하셨다. 우리는 엄마의 눈치를 보느라 꿀 먹은 벙어리 모양 입을 닫았다. 그러나 어느 해부터인지 엄마는 제삿날 아버지에게 말을 하지 않았고 우리도 가족이 모여 밥을 같이 먹고 엄마를 봤다는 데 의의를 뒀지, 아버지를 기억하지는 않았다. 나는 오늘 참석한 큰 조카 손에 슬쩍 용돈을 집어 주었다. 
“기특하잖아. 애들은 미리미리 챙겨줘야지. 그래야 나중에 할머니 제사도 지내주지.”
흘겨보는 엄마에게 팔짱을 끼며 나는 속삭였다. 
“엄마, 다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거야. 엄마는 엄마 이야기만 전달하면 되고 쟤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알아서 하면 돼. 돌아가시면 엄마의 뜻은 별 의미 없어. 엄마 당대에 제사 없애겠다고 힘 빼지 마. 봐, 오늘 아버지 기억하는 사람 없잖아.”
“하여튼 너는. 같은 말이라도 살갑게 하면 안 되니?”
“엎치나 메치나.”
입을 삐쭉 내민 나는 엄마에게 따지려던 말은 입안으로 삼키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나는 기차가 좋다. 여행을 가거나 출장을 갈 때 가능한 기차를 탄다. 밀폐되고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화장실과 식당도 있다. 창밖의 풍경이 속도감 있게 흘러가는 것도 좋다. 창 쪽 자리에 앉으면 밀도 높은 공간에서도 사람들과 부대낌이 없어 나는 해방감을 느낀다. 바퀴 달린 이동 수단 중 가장 안전하고 보호받는 느낌이 든다. KTX는 전체 열차 손님이 약 900명 한 칸에 50∼60명이 타고 있다. 이 사람들이 약 두 시간 반 정도를 같이 움직이지만 서로 알지 못하고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마음 놓고 잠까지 자면서 자신을 맡긴다. 이 정도 신뢰를 할 수 있는 기술문명은 기적이지. 나는 그래서 기술직에서 일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부산 현장 아홉 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나는 이 기적의 새벽 기차를 탔다. 여섯 시 부산행 KTX 2호차 15A 창가 좌석에 앉자 긴장이 사르르 풀린다. 어젯밤 제사를 지낸 피곤함 때문인지 눈이 자꾸 감긴다. 희미하던 영상이 사라지고 서서히 소리가 잠기며 나는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내 팔을 건드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나는 눈을 뜨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깔끔한 옷차림의 남자가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창밖은 서서히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6시 50분이었다. 나는 핸드폰에서 펜을 뽑아 다운받아 놓았던 회의 자료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어느새 눈꺼풀이 내려 덮여 펜이 손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떨어진 펜을 집으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다 옆 좌석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민망한 나는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남자가 어어 하면서 물었다.
“몸은 괜찮으시죠? 다행입니다.”
고개를 갸웃하는 나를 보더니 남자는 어제 길에서 부딪힌 사람이라고 말했다.
“아, 네 괜찮습니다.”
나는 핸드폰으로 회의 자료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참 기막힌 인연입니다. 어떻게 기차 옆자리에서 만나요. 혹시 기차표를 끊을 때 습관 같은 게 있으세요?”
“아, 네 2호차 좌석 15A, 15D를 우선으로 하고 없으면 그냥 창가 쪽 예매해요.”
“하하 역시, 통하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만나죠. 저는 15B, C 주로 통로 쪽을 선호해요. 저는 회사 일로 부산에 가는데 혹시 출장 가세요. 어제 제가 드린 명함 아… 못 보셨구나.”
나는 민망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직업을 손해산정사라고 소개한 남자는 자신이 하는 일을 쉴 틈 없이 지껄였다. 뭐야 이 남자. 망했다. 나는 핸드폰을 덮고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건성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 직장과 일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느새 기차는 황간역을 지나고 있었다.
“제가 평소에는 이러지 않는데 말이 통하다 보니… 미안합니다. 서류를 보시는데 자꾸 말을 시켜서. 저는 기차여행을 좋아해서 출장 갈 때 가능한 기차를 탑니다. 마음이 푸근하거든요. 아버지 고향이 황간이라 이곳을 지날 때면 가끔 아버지 생각을 합니다.”
“무슨 생각요?”
“아버지와 단둘이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 십 년 전 돌아가셔서 이룰 수는 없지만요.”
남자는 입술을 닫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나이가 올해 79세 제 나이가 52살이거든요. 지금쯤 단둘이 여행을 하면 어떤 기분일까? 그 생각을 많이 해요. 가슴이 아련하죠.”
“아련함이 아니라 그리움이겠죠. 아, 미안해요. 눈치 없이.”
나는 창밖을 응시하며 두 사람의 모습을 상상했다. 아련함 일수도 있겠네.
“하하하, 아닙니다. 생각? 아니 표현이 신선하네요.”
“제가 좀 건조하긴 하죠. 그래도 다행인 건 아버지께서 아들이 수다쟁이인 것은 모르고 돌아가셨잖아요.”
이런 또 송곳이 튀어나오네. 엄마가 말 좀 살갑게 하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나는 손으로 입을 톡톡 쳤다.
“하하하, 미안합니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셔서 그만. 제가 좀 피곤한 스타일 이긴 하죠. 부자간에 대화가 별로 없었어요. 아버지 마음을 직접 들어볼 기회를 놓쳐서…. 그래서 그냥 상상하는 거예요. 제가 아버지를 빙의해서 여행 이야기를 실감 나게 하잖아요. 아버지가 아무 말씀 없으시니 제 말이 맞는 것이고 저를 좋아하시는 거죠.”
“그렇긴 하네요. 아무 말씀이 없는 것은 긍정이니까. 분명 칭찬이죠.” 나와 남자는 크게 웃었다. 기차는 부산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남자는
오래간만에 좋은 말동무를 만났다며 혹시 다음에 출장 갈 때 만나면 아는 체해달라며 손을 흔들고 통로로 나갔다. 나는 이야기 하느라 회의 자료를 반도 읽지 못했음을 알고 난감했다. 별 내용은 없을 거야. 어차피 발언할 기회도 없겠지. 나는 서둘러 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러다 다음 명예퇴직 순서는 내가 되겠다. 뭐 할 수 없지.”

*
부산 출장을 다녀온 뒤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노을이 지는 해변 늙은 아버지와 아들의 한 컷 사진. ‘아름답다.’ 그 위로 나이 든 아버지와 내 모습이 무채색으로 겹쳐진다. 하- 나는 한숨을 쉬었다. 같이 보낸 시간만큼 정도 생기고 미움과 신뢰도 쌓이는 거지. 유채색으로 어떻게 바꿔. 죽음은 우리의 영역을 벗어났고 시간은 되돌릴 수도 없는데. 눈 속으로 모래가 굴러다닌다. 나는 손으로 눈을 감쌌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어, 언제 왔어? 좀 피곤해서.”
목소리만 들어도 상태를 알아채는 40년 지기 친구는 내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카페를 한번 휘둘러본다.
“아는 사람은 없는데 뭔 일이야. 털어놔.”
“고향에 한번 가 볼까 해서.”
“왜? 엄마가 가재. 아프시니?”
“아니야. 지난번 부산 출장 때 기차에서 만난 남자 때문인가 봐.” 
“풋, 뭐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렇지. 말도 안 되지. 나도 아는데… 그 남자가 던진 스냅사진 한 장이 자꾸 생각나. 며칠 전에는 꿈도 꿨어. 모르는 타인이 아버지라 하면서 내 이름을 부르더라.”
“음…. 중증이네. 네가 아버지 이야기 꺼낸 게 얼마 만이냐. 기억도 안 난다.”
앞만 보고 달리는 내게 뒤도 돌아보라고 친구는 충고했었지. ‘잊어버려, 냅 둬. 뒤돌아보지 마.’ 내 귀에 수시로 속삭이는 소리를 밀쳐내라고 했는데.
“하하하, 뒤돌아봤네. 이제 밀쳐낸 거야. 환영한다. 같은 세계에 살게 돼서.”
아무 대꾸도 안 하자 친구는 한참을 나를 보더니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알지. 내가 아버지 요양원에 모셨을 때 일. 우리 동생들 한 일 년 정도 오더니 그 뒤로 요양원에 거의 안 왔어. 맏딸이라 그런지 나는 정말 걔네처럼은 못하겠더라. 일주일에 한두 번씩 꼭 찾아뵀지. 시간이 갈수록 그러는 나한테 더 짜증이 나더라. 언제까지 이래야 되지. 말이 좋아 100세 시대지 위아래로 치여서 이게 뭐지. 내 생활은 하나도 없고. 동생들한테도 열받아서 만날 때마다 잔소리하니까 아예 오지도 않더라고.”
“네가 착해서 그렇지. 오지랖 넓은 사람이나 마음 약한 사람들이 항상 고생하잖아. 말하자니 쪼잔하고 안 하자니 속상하고.”
“에고, 그렇다. 생각하면 쪼잔한 것들이지. 옛날에 우리 나이면 조금 편안해질 때 아니니. 봐 지금 우리 완전 일선에서 움직이잖아. 내가 70대가 돼도 어머니 살아계시면 어른 대접 받을 수 있겠니?”
“어림없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하루는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남이 해 주는 대로 온몸을 맡기는 것을 보니까 너무 힘들더라. 정신은 말짱한데 얼마나 치욕스럽겠어. 차라리 존엄성을 지키고 돌아가시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 아버지가 잠드신 것 같아서 손을 잡고 말했어. 아버지 이제 편히 가세요. 여기 걱정은 하지 마시고. 근데 아버지가 고개를 끄떡이잖아. 너무 놀라서 병실을 뛰쳐나갔어.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너무 그립더라고. 할머니와 같이 지내던 곳이 그렇게 보고 싶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무작정 어릴 때 할머니와 같이 살던 남산 밑 동네를 갔어. 아무것도 없더라. 함께 거닐던 흙길도 계단도 옛날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그 흔적을 계속 찾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까 밤이더라.”
“그랬구나.”
“응. 상실감… 그 단어의 뜻을 알겠더라. 그리움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첫사랑의 그리움이 만남으로 인해서 환상에서 깨어나듯? ” 
“그래 기집애야. 느낌은 달라도 찰떡같은 비교다. 하여간 말본새하곤. 한동안 요양원에 두려워서 갈 수가 없었어. 내가 아버지가 너무 버거워서 돌아가시라고 한 것 같은 죄책감도 들고.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요양원에 가서 아버지 손을 잡고‘아버지 오래 사세요’하고 말했어. 그러고 나니까 마음이 조금은 편안하더라.”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부모님과 안 싸우는 사람이 어딨어. 지지고 볶으면서 사는 게 일상이지. 삶은 다 흐린 물이야.”
나는 탁자 위에 있는 친구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럴까? 오래 사셔도 일찍 돌아가셔도 나름대로 다 아픔이 있어. 기운 내고 잘 다녀와.”
“너도. 기운 내.”

*
금요일 하루 연차를 냈다.
“요즘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던데. 아픈 건 아니죠?”
“네 그냥 좀 피곤해서요.”
지난봄 부산 출장을 다녀온 뒤, 우리 팀에 일거리가 많아진 것이 내용 파악을 잘못한 나 때문이라고. 나 참 기가 막혀서. 안 올 일이 온 것도 아닌데 자식들 뒤 끝도 길어. 그래 내가 좀 실수는 했어. 그래서 야근도 제일 많이 했고. 그런데 아직도 불평이야? 팀장은 그 일로 마음이 쓰였는지 찬찬히 내 안색을 살피더니 쉬는 게 최고라며 푹 쉬라고 말했다.
금요일 아침 1박2일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내 말에 옆눈으로 나를 본 남편이 묻는다.
“혼자? 어디 가는데?”
“응 혼자. 김천.”
나는 남편의 다음 질문에 답하기 싫어 서둘러 집을 나섰다. 서울역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가족 단톡방에 문자를 남겼다.
“엄마 고향에 다녀올게. 직지사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갈 거야. 냉장고 안에 반찬 만들어 넣어 뒀으니까 굶지 말고 밥 잘 챙겨서 먹어.”
혼잡한 지하철역을 겨우 빠져나와 기차 2호차 좌석 15A에 앉았다. 집에서 텀블러에 담아 온 커피를 마시며 나는 여유 있게 통로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웃는 사람에게 1점, 무표정 0점, 찡그린 사람 1점, 점수는 기차가 떠날 때까지 0점이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아무 표정도 없이 지나다녔다. 내 옆자리가 빈 채로 기차는 출발했다. 나는 눈을 감으며 머릿속으로 원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백년을 산다면 지금 원점에서 시작한 부채꼴은 180도 정도 되겠다. 반을 채웠다. 이제 반은 어제고 반은 내일이다. 어제는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일부분, 내일은 변화가 가능한 오지 않은 미래의 일부분이라고 누가 그래? 어제를 왜 바꿀 수 없어. 나의 어제는 어차피 내 기억 속에 있는 것. 시간의 흐름과 사실은 바꿀 수 없어도 내용은 풍성하게 만들 수 있겠지.

*
초인종 소리에 현관문을 열었다. 훤히 보이던 앞이마에 머리가 풍성히 덮인 오빠가 서 있었다.
“오빠, 연락도 없이 웬일이냐?”
놀라는 내게 오빠는 싱긋이 웃음을 띠고 무엇인가를 말했는데 들리지 않았다.
“오빠, 크게 얘기해 안 들려.”
옷깃을 스치는 느낌에 눈을 떴다. 꿈이었다. 가방을 열차 위 선반에 올리며 긴 머리의 여자가 옆에 앉는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7시가 조금 지나고 있었다. 문자도 카톡도 온 것은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나기를 기다려 8시쯤 나는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일 없었느냐고 내 말에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고 되물었다. 꿈을 꿨다는 내 말에 오빠는 호탕하게 웃었다.
“너한테 꿈 얘기 오랜만에 듣는다. 어릴 때는 아침마다 꿈 이야기하더니.”
“내가? 기억이 안 나는데.”
“어라, 왜 그래 네 꿈 잘 맞았잖아. 지나갔으니 말이지. 어머니가 걱정 많이 하셨어. 너 혹시 무당 될까 봐. 나는 아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 쉬엄쉬엄 일해 골병들면 너만 손해야.”
맞다. 내 꿈은 아버지가 전하는 이야기라고 엄마가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맞아. 그래서 밤마다 꿈꾸게 해 달라고 빌었던 기억이 난다. 뭐야. 이런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내가 태어나던 해 아버지는 병가를 내고 일 년 동안 휴양을 했다고 엄마는 말했었지. 오빠는 5살 언니는 4살이었고. 몸이 점점 회복되어 가던 아버지는 방에서 한 살짜리 나와 시간을 보냈다. 부녀의 다정한 모습을 본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찼다고 한다. 아버지와 마실을 다녀오면 불쑥 엉덩이를 꼬집히던 기억이 떠올라 나는 웃었다. 엄마는 자식도 부모와 궁합이 잘 맞아야 한다고 했다. 아들 우선주의자인 할머니의 질투가 양념 역할을 톡톡히 했지만, 나와 아버지는 첫 만남부터 궁합이 좋았다. 오빠와 언니는 아버지가 바쁠 때, 동생은 아버지가 병약할 때 태어났다.
김천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가방을 메고 좁은 통로로 나왔다. 플랫폼에 내리자 기차는 떠나가고 사람들은 썰물같이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승강장에 서서 건너편 역사를 느긋이 바라봤다. 아물아물한 기억 속에 단층이던 역사는 2층으로 변해 있었다. 역 광장에 서서 40년 만에 돌아온 고향을 쭉 둘러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해 엄마는 외삼촌이 사는 서울로 우리를 데리고 이사했다. 30여 년 전 친척들도 다 떠나 아는 사람 한 사람도 없는 고향은 낯선 듯 낯설지 않았다. 일찍 출발한 덕에 이제 9시 30분이었다.
가족 단톡방 카톡에는 새로 온 문자가 없었다. 아직도 자는지 문자를 못 봤는지 관심이 없는 건지 엄마가 집을 나간 걸 좋아하는지…. 씁쓸했다.

나는 역 광장에 있는 큰 나무 밑 벤치에 앉아 길 건너 5층 건물과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지켜봤다. 그곳은 오래전 우리 집 식당이 있던 2층 건물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발을 따라 식당으로 들어가, 완전히 다른 건물이 되어 있는 곳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주방 쪽을 보다 나는 숨을 멈췄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나를 보고 큰 엄마가 웃고 계셨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빙긋이 웃으셨다. 겹겹이 쌓인 공간들 속에서 어제들이 춤추듯 빙빙 돌고 있고, 기억 속의 스냅 사진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반복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손님, 주문하시겠어요.”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종업원을 보다가 식당 벽에 있는 메뉴판을 보고 된장찌개를 시켰다.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식당을 두리번거리다 거리로 나왔다. 누가 등이 얼얼하도록 세게 나를 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느새 아버지가 식당에서 나를 데리고 집으로 갔던 신작로 위에 서 있다. 멀리서 아버지는 자전거를 끌며 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신다. 지금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 있는 이 길 위에는 자동차가 달리고 있다. 수양버들이 늘어졌던 길 양쪽에는 건물들이 쭉 들어서 있었다. 흙길과 아스팔트 도로가 뒤섞여 있어, 나는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몰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그 길과 그곳에 있던 아버지는 사라졌다.’
아니지. 지금 나는 80대의 아버지와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는 거야. 아버지와 함께 고향에 온 거야.
회색빛 아스팔트 도로를 걸어서 옛날 우리 집에 도착했다.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와 맞닿은 V자 골목의 첫째 집이 우리 집이다. 기와지붕에 감나무가 있고 넓은 마당 한가운데 대청마루가 놓여있었다. 별이 쏟아지는 밤, 마당에서는 모기를 쫓기 위해 짚을 태워 연기를 마루 주위로 보냈다. 졸망졸망한 대여섯 명 애들이 대청마루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다. 아버지가 골마루에 앉아 그만 자라고 말씀하신다. 웃음소리가 들리고 나는 자려고 눈을 감는다.
집이 사라졌다. 스냅사진 속의 집 대신에 조잡한 주황색 이층집이 보인다. 마당도 없고 감나무도 없는 이층집을 한참을 쳐다보다 나는 골목길을 따라서 올라갔다. 더운 여름 시원한 우물로 인기를 끌었던 골목 끝 집도 대보름날 내 보름을 매년 사주었던 코흘리개 남자애가 살던 옆집도 다 사라졌다. 기억은 새록새록 올라오는데 눈앞에는 낯선 풍경만이 펼쳐지고 있었다. 허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아버지의 눈도 갈 곳을 잃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오빠와 언니를 따라 이 골목의 끝 수도산이라고 불리는 산을 자주 올라갔었다. 그곳에는 커다란 사각형 콘크리트 건물이 있었는데 안에서 벼락을 치듯 우르르 쾅쾅 울리는 소리가 들렸었다. 엄마는 그 소리가 수돗물이 돌아가는 소리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곳을 기웃거리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호기심을 버리고 산으로 뛰어다녔다. 어둑한 저녁 산에서 내려온 우리를 아버지는 뜰 앞에 세워놓고 훈계하셨다.
“해가 지면 길을 잃을 수 있으니까 해지기 전에 내려와.”
“해 지는 것을 어떻게 알아요.”
오빠는 팔꿈치로 나를 밀었다.
“순영이가 머리를 위로 올렸을 때 해가 있으면 괜찮고 옆으로 돌렸을 때 해가 있으면 내려오는 시간이야.”
푸-. 입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나는 머리를 위로 들었다. 해는 머리 위가 아닌 눈앞에 있었다. 참 쉬운 설명이었어요. 주름진 얼굴로 아버지도 푸- 하고 웃었다.

이쯤이면 산으로 올라가는 좁은 길이 나와야 하는데 보이지 않고, 대신 잘 닦여진 도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도로를 따라 언덕길로 올라가자 크고 멋진 건물이 위용을 드러냈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도서관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세상에!  산이 없어지고 이곳에 도서관이 생겼어? 와- 진짜 대박이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서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김천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와 손잡고 다녔던 수풀 우거진 산길은 없어지고, 시원하게 잘 뻗은 아스팔트 길이 멀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순식간에 어제가 사라져서 나는 마음이 몹시 상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도 망연자실한 채 내 손을 꼭 잡았다.
‘아버지 놀라셨죠. 우리의 터전이 다 없어졌어요. 어디서 만나죠?’

다른 데를 갈 필요가 있을까? 나는 힘 빠진 모습으로 우두커니 사거리에 섰다. 빨강 가방을 메고 흰 손수건을 가슴에 꽂고 집으로 뛰어오는 나를 아버지가 손을 벌리고 환하게 맞이하던 모습. 초등학교로 가는 길에 우두커니 서서 갈지자를 그렸다. 어떻게 변했을까. 끝까지 가 볼까. 아니야, 가슴 한쪽은 시린 채로 남겨놓자. 아버지, 학교는 다음에 들려요. 다음에 한 번 더 여행을 같이 해요. 우리의 터전은 다시 만들어요. 그때는 그리움으로 하는 여행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친구야 네가 말한 상실감이 어떤 것인지 이제 알겠어. 그리움의 부재라는 뜻도. 그런데 나 왜 해방감을 느끼지. 아버지도 속 시원하시죠. 내일이면 모든 것이 처음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겠지.
이제 집에 가야겠다.

*
김천역 맞이방에서 내일 기차표를 환급했다. 코레일 앱으로 들어가 오후 6시 45분 새마을호를 눈으로 보지 않고 손이 움직이는 대로 좌석을 지정하고 예매했다. 나는 잠시 맞이방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김천에 내려오는 차표는 갑자기 끊었지만, 아버지 제사 이후 생각은 꾸준히 하며 아버지를 만날 용기를 냈었는데…. 마음이 순식간에 식어 날아가 버렸다.
가족 단톡방에 ‘6시 45분 새마을호로 귀경’이라고 보내자 바로 문자가 왔다.
“엄마, 무슨 일이야. 집 신경쓰지 말라고 일부러 문자도 안 보냈는데.” 
“엄마, 더 놀다 와. 이런 기회는 자주 안 와요. 집 청소도 다 했어. 걱정 붙들어 매시고 즐겁게 다니셔.”
‘아버지 보셨죠. 걱정하지 마세요. 다음에는 엄마와 같이 여행가요. 엄마가 가족으로부터 해방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개찰구를 나가다 뒤돌아보니 부산 출장 때 옆좌석에 앉았던 그 남자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와- 진짜 다시 만났네요.”
“그러게요. 인연인가 봐요. 근데 몇 호차에요?”
“3호차 15D요.”
“하하하, 옆자리는 아니네요. 저는 4호차에요. 지금까지는 우연이었나 봐요.”
그는 싱긋 웃었다.
“우연을 만들어 주신 신께 여쭤볼까요? 이 자리를 왜 만들어 주셨는지. 그쪽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
“아마도 알아서 깨달음을 얻으라고 할걸요. 각자의 몫이라고요.” 
우리는 플랫폼이 떠나가도록 크게 웃으며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기차 안은 빈 좌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붐볐다. 나는 4호차 35D 좌석에 앉아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올 때와 달리 기차에는 아이들이 많았고 소란스러웠다. 호기 있게 나와서 하룻밤도 못 자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만 빼고 기차 안의 사람들과 분위기,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기차가 김천역을 출발하자 나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눈앞에 오늘 아침 꿈속에서 봤던 오빠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키자 옆좌석의 여자가 나를 보며 다리를 옆으로 비켜줬다. 나는 손을 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숨을 천천히 쉬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얼른 핸드폰을 꺼내보았지만, 전화나 문자가 온 것은 없었다. 갑자기 오빠에게 했던 이모의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어쩜 너는 아버지를 쏙 빼닮았니.”
‘아! 아버지였어. 그렇게 환하게 웃는 얼굴이. 이제 우울한 사진은 장롱 깊숙이 넣어 둘께요.’
창밖으로 희미하던 풍경들이 짙은 어둠 속으로 흘러서 들어가고 있었다. 내 눈도 그 풍경을 따라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회색 두루마리를 입고 2:8 가르마를 탄 흰머리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냥 서로 응시하는 것으로 족했다.
나는 이제 나의 먼 어제들과 작별할 준비가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단순히 나이만 들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과 화해하거나 다스릴 줄도 알아야겠지.
어둠이 내려앉는 거리에서 내 의식은 어제를 향해 가고 있고 시간은 내일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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