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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시계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장희(수필)

책 제목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1월 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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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시계가 졸고 있다. 신혼집들이 선물로 받은 뻐꾸기시계다. 지금은 집마다 시계가 서너 개 있을 정도로 흔하지만, 삼십여 년 전에는 값나가는 물건이었다. 급전이 필요할 때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면 가격도 톡톡히 쳐주는 귀한 대접을 받던 때도 있었다.

색바랜 벽시계는 이제 제 몸조차 지탱하기 힘겨워한다. 거실에서 검붉은 녹이 내려앉은 못 하나에 의지하고 있다. 건전지 약발이 다 되었는지 시간마다 들려주던 뻐꾸기의 청량한 목소리를 잊을만하면 한 번씩 불규칙적으로 들려줄 뿐이다. 가끔 엇박자의 시곗바늘 소리만 가늘게 귓등에서 미끄럼타다가 시나브로 사라지곤 한다. 지금껏 아프다는 그의 신호에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노안이 왔는지 벽시계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쳐다본다. 이제까지 밤샘해도 적확하게 포물선을 그리던 시계추의 움직임은 이제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만사가 귀찮은 듯 그는 거실벽에 등을 밀착한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말쑥하던 그의 집은 흘러간 세월만큼 흐릿하게 색이 바랬다. 손등에 돋아난 외할머니의 핏줄 같은 생채기가 여기저기 보인다.

초침은 한 걸음씩 늦어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건전지 약이 다 되어가는지 오르막길에서는 숨을 몰아쉬며 잠시 쉬어 가기도 한다. 다시 젖 먹던 힘까지 내보지만 두 걸음 올라가면 다시 한 걸음 아래로 미끄러지기를 반복한다. 지켜보던 분침은 묵은 정 때문인지 어깨를 내어주며 등을 토닥거려 준다. 이제 뻐꾸기 울음소리도 째깍거리던 시계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가을을 아프게 맞이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밤마다 술에 취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날마다 불면의 밤을 보내야만 했다. 한때 요식업으로 그는 꽤 큰 돈을 벌었다. 하지만 감염병 때문에 삼십여 년간의 청춘을 다 바친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그는 사업 수완이 좋았다.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초심을 지키며 황소걸음으로 성큼성큼 한 걸음씩 걸어왔다. 평생 한 우물만 파면서 신용을 목숨처럼 여겼다. 감염병으로 나라가 들썩일 때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매출이 반토막 나기 시작하면서 자금난에 시달렸다. 고생한 만큼 상실의 아픔도 비례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끝날 것만 같았던 감염병으로 잘 나가던 사업은 궁지에 몰렸다. 지금은 요식업을 접었지만 그만큼 그의 삶이 오롯이 녹아들어 있기도 했다.

인생 2막을 준비하기 위해 그는 국비 학원에 등록했다. 늦은 밤에 학원을 마치면 독서실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홀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늘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니던 술과 담배도 이젠 그에게는 사치였다. 살얼음판을 걷듯 책 속의 여백을 메워가며 정해진 목표만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하지만, 시험에서 세 번을 실패하고 나니 식구들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도 넘지 못한 수직의 벽을 쳐다보며 자책도 많이 했다. 공부한답시고 무거운 책가방만 들고 집에서 독서실로 그렇게 시계추처럼 포물선을 그렸지만, 돌이켜보니 빈 수레처럼 요란만 떤 것 같았다. 지금 거실에서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뻐꾸기시계처럼 그는 천덕꾸러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 아파했다.

건전지를 사 왔다. 그동안 뻐꾸기시계의 몸에 쌓인 먼지도 털어주었다. 시계추의 파란 녹도 닦아주고, 서로 동떨어져 있는 시침과 분침도 맞춰놓았다. 지금껏 무심했던 그의 입에 새 건전지를 넣어주자, 봄 처녀 그네 타듯 시계추가 힘차게 뻐꾸기의 귀 언저리까지 포물선을 그린다. 째깍-째깍거리는 초침 소리가 오늘따라 더 살갑게 들린다. 시침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뻐꾹-뻐꾹 노래한다. 그 노래는 메아리가 되어 거실에서 큰방으로 큰방에서 작은방으로 다시 거실로 뻐꾸기가 되어 날아다닌다.

아직도 힘들어하는 그의 생채기를 아물게 하는 묘약은 어디에 있을까. 늦은 밤 포장마차에서 그와 막걸릿잔을 부딪치며 어깨라도 토닥거려 주면 될까. 아니면 포옹이라도 해주면서 말해 줄까.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언젠가 시곗바늘처럼 정상에서 뻐꾸기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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