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1월 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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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보랏빛 향수.’ 초록으로 눈 뜨며 일어나는 봄. 그 유혹에 빠져본 사람만 알 수 있다. 나의 텃밭 가장자리에 오동나무 한 그루가 봄이 오면 어김없이 꽃을 피운다. 나는 자연을 좋아하고 흙을 사랑하여 텃밭을 구입했다. 들머리 가장자리에는 매화나무가 있어서 꽃샘추위에 하얀 향수를 입에 물고 벌을 유혹한다. 자연은 계절을 어기지 않으며, 꽃 피우는 순서와 잎이 돋는 질서는 법을 잘 지키는 신사 같다.
봄이 오기 전에 복수초가 푸른 잎 목도리를 하고 노랗게 웃어준다. 그에 질세라 수선화가 활짝 웃어준다. 봄이 왔다고 건너 산야에 진달래가 연지 찍고 부끄러워하고 있다. 순서대로 피고 지는 시간이 흐르면, 이른 여름의 문턱에 오동나무에 짙은 연보라빛 꽃을 만난다.
내 고향 앞산 비탈 밭둑에 오동나무 세 그루가 농사철에 휴식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당연히 보랏빛 향수를 풍기면서 그늘을 제공해주었다. 오동나무는 나뭇잎 중에 가장 넓고 두껍다. 그러므로 밭 가장자리에 있다는 것은 우리 부모님의 새참 먹는 자리이며, 잠시 휴식하는 멋진 자리였다. 우리 밭 오동나무는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심어 놓으신지라 무척 크고 튼튼했다. 옛날 어른들은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20년을 키웠단다. 그 딸이 시집갈 때 장롱이나 반닫이 등 가구를 만들어 혼수로 보냈다는 걸 구전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집마다 야산이나 밭둑 가장자리에 심었다. 내가 어릴 적 본 오동나무는 뭐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도 나이를 먹으면서 풀 한 포기 꽃나무 한 그루까지 귀하게 여겨진다.
작년 4월 초하루 등기 이전을 끝낸 밭의 가장자리에 커다란 오동나무가 있다. 봄이라 씨 뿌리고, 모종 심고 정신없이 봄을 보내고 있을 때, 봄의 매화보다 진한 보랏빛 향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작은 종 모양의 꽃들이 수없이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있다.
꽃 모양도 예쁘지만 향기가 진하고 신선했다. 꽃이 피고 향수를 풍기면 지나는 농민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이웃 할머니는 “향기는 좋지만 나무가 너무 커서 밭에 그늘이 짙으니 오동나무를 잘라라”고 성화다. 나는 “할머니, 꽃향기도 좋고 그늘이 짙어서 여름에 무척 시원합니다. 저는 곡식의 추수를 좀 양보하고 나무를 선택합니다”라고 말씀드려도 언제나 만나면 한결같이 말씀하셨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나무를 왜 키우냐!”
일 년 동안 같은 소리를 들으니 화가 치밀 때도 있었다. 옛 어른들은 오동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부자가 된 듯이 좋아하셨는데, 오늘날에는 오동나무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오동나무는 자라는 속도가 대나무와 비슷하며 일 년에 몇 미터씩 자란다. 집중적인 광합성을 하여 빠른 영양공급으로 몸집을 키우는 나무가 된 것이다. 급속하게 자라다 보니 나무의 단단함이 모자라서 가벼운 목재로 사랑을 받는 쪽으로 선택해 자랐다. 오동나무는 결이 연하여 가공하기 쉬우며 잘 뒤틀림이 없다는 게 장점이다. 장마철 습기에 강하며, 불이 잘 붙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나무이다. 옛날부터 오동나무는 전통가구나, 현악기 가야금, 거문고의 재료로 인기가 높았다.
오동나무는 나름대로 지혜가 뛰어나다. 보랏빛 향수를 풍기는 멋진 꽃을 피우고, 뜨거운 여름 날씨에 광합성 짚은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어 사랑을 독차지한 나무로 진화된 것이다. 이 또한 오동나무만이 가진 매력이라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아름다운 소리에 주체가 되는 악기 재목으로 발전되었다니 소중한 나무임에 틀림이 없다.
조선시대 학자 신흠은 이런 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 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이 얼마나 절개 굳은 나무인가. 한낮 식물인 나무에도 자존감을 불어넣은 시가 아니던가.
나는 텃밭 가장자리에 자라는 한 그루의 오동나무를 사랑한다. 물론 전 주인이 심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내가 관리한다. 봄이면 보랏빛 향수를 입에 물고 나를 유혹한다. 뜨거운 여름날 평상 하나 놓고 여름을 즐길 짙은 그늘을 좋아한다. 나보다 남편과 이웃 친지들이 더욱 좋아한다. 오동나무 한 그루에 행복이 주렁주렁 달렸다. 누가 이 넓은 대지에 대가 없는 향수를 뿌려 주겠는가.
오동나무 꽃송이만큼 사랑도 보랏빛으로 여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