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1월 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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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끝없이 길게 이어진다. 길은 직선이 되어 가리마같이 단정하기도 하고, 뱀 같은 몸뚱이로 고불고불 고부라진 곡선이 되기도 하고, 여름의 아스팔트 길은 덥고 지쳐 퍼지기도 한다. 또 길은 꼬리를 감추기도 하는 변화무상한 모습을 보인다. 길은 때로는 하얀 눈길로, 빗발치는 빗길로, 어스름 새벽길로, 밤을 집어삼킨 어두운 얼굴로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길은 자동차 불이 반짝이며 꼬리를 물고 가는 고속도로가 되기도 하고, 큰 사거리의 모습으로 꽝 뚫리어 사통팔달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산골짜기 숲속에서 솔향기 풍기며 호젓한 오솔길을 꾸미기도 하고,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로 털털거리며 내달리기도 한다.
길도 자란다. 길은 길어지고, 넓어지며 세월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길은 지나간 사람들의 생장과 사랑과 아픔과 서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그들의 발자국들이 오롯이 길 위에 새겨진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어린 시기에 세 아이를 각각 한 번씩 잃어버려 찾아 헤맨 적이 있었다. 다행히 찾게 되어 지금은 잘 살아가고 있지만, 길에서 아이를, 가족을,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사연은 참으로 안타깝다.
인생은 아이 때부터 길을 나서는 행위를 하게 된다. 인간의 삶은 길로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꾸준히 길에서 사람을, 다른 무언가를 찾고자 길을 나선다. 인생의 긴 여정에서 자신의 의미에 맞는 길을 찾고, 길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어렵기만 하다. 길을 가자면 험준한 산도 넘고, 깊은 강물도 건너야 한다. 길에 절벽이 나타나 길이 끊어지기도 한다. 인간의 삶은 길에서 시작되고, 길에서 끝난다. 길은 사람들을 끝없이 유혹하고 방황케 하기도 하고, 삶의 도달점을 향해 끝없이 어딘가로 향하게 한다.
길에서 연인이나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는 아름다운 날들도 있고, 꽃을 보며 반가운 웃음을 날리기도 하고, 놀이에 열중하기도 한다. 그리고 운이 없으면 길에서 강도를 만나기도 하고,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또 길을 찾지 못해 희뿌연 안개 속에서 헤매기도 하고,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한다.
길은 떠나기도 도착하기도 하는 인생의 끝없는 도상이고, 여정이다. 길이 있는 곳에 한 인생의 발자국, 인간의 이력들이 그려지고 쌓여간다. 첩첩이 쌓인 길의 역사는 아득한 인생길이 되고, 나아가서는 한 나라가 되고, 그 역사가 된다.
길은 가다 서다가 반복된다. 길 없는 세상이란 얼마나 막막하겠는가. 그래서 어떤 개척자는 길을 내고 우리는 그 길을 답습하고 또한 새로운 길을 찾아가고 만들어간다. 길에서 인간의 관계가 맺어지기도 흩어지기도 한다. 만남도 이별도 길은 용납한다. 과거의 사람은 떠나가고 미지의 사람은 새로운 길로 다가온다. 자연 또한 인간의 삶과 다를 바 없이 길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고 사라지고 새 생명이 태어난다.
광활한 세계에서 거미줄같이 얽힌 복잡한 삶의 길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각자 제 길을 산뜻하게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고도 문명의 발달로,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삶은 너무나 다난하고, 얽히고설킨다.
이 거대한 세상에 길처럼 선명한 것이 없다. 길은 인체의 실핏줄같이 이어지고, 광맥같이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알고 있고, 수용한다.
내 인생의 초행길은 이른 나이에 결혼했고, 부족한 살림을 보태기 위해 세 아이를 데리고 맞벌이까지 하느라 삶이 무척 고단했다. 직장을 나가기 위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던 아이를 억지로 떼어놓고 눈물을 흘리며 아이 모르게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집을 나온 아이는 엄마를 찾아 나섰고, 길을 잃었다. 다행히 우리 집에 전도하러 왔던 한 아가씨가 우리 아이를 알아보고 데려와 주어서 찾기도 했지만 매우 어려웠던 아픈 세월이었다.
하염없이 시간은 흘러갔고, 40여 년 후 자식들이 결혼해서 모두 떠난 후 나는 비로소 내 삶을 문학으로, 글쓰기로 풀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늦은 나이였지만 평생의 꿈이었던 문학을 향해 꿈을 찾아 떠나는 문학의 길을 가게 되었다. 나의 60∼70대는 문학으로 시작해서 문학으로 끝난 황금기였다. 글을 쓰다 보면 살면서 겪은 상처들, 그 아픔들이 치유되었고, 글 속에서 맘껏 한풀이도 할 수 있었다. 문학의 길은 내게는 꿈이었고, 현실이었다.
사람들 개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같이 취미생활로 글쓰기와 노래 부르기를 즐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운동이나 예술,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들도 있을 것이다. 부러워할 것도 없고, 크게 애쓸 필요도 없는 인생이다. 대부분 사람은 이름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인생을 가족의 굴레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안주하며 살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구속이기도 하지만 안전하기도 하니까. 옛 선인들은 ‘나물 먹고, 물 마시고, 등만 따뜻하고, 배부르면 남부러울 게 없다’고 말했다.
매우 발달한 경쟁사회에서 나는 매일 길을 찾아 나서고 명료한 길을 찾기 위해 늘 눈과 코는 피곤하고, 입은 목이 말라 타들어 가고, 팔다리는 무거워지고 지쳐간다.
하지만 나는 매일 눈을 뜨면 문학을 향한 갈급함으로 새 길을 찾으려 하고, 또 함께 길을 가는 문학길의 동행자인 선생님과 문우들을 찾고, 만나려고 길을 나선다. 나는 만족할 만큼의 원하는 길도 사람도 찾지 못했다. 삶이 끝나는 날까지 길을 찾아보다가 끝장이 나더라도 나는 이 삶이 나의 삶인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길을 찾아야만 하는 것은 내 마지막 인생길의 숙제가 되어버렸다. 길은 그저 묵묵히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길이 가시밭길, 자갈밭길이라도 나는 길을 찾으러 나설 것이고, 그 길을 헤쳐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