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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마지막 탱고

한국문인협회 로고 박해완

책 제목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1월 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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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롱가는 K에게 또 하나의 다른 세상이다. K는 선배 민 진호가 운영하는 탱고 카페를 거의 매일 찾다시피 했다. 무엇엔가 단단히 홀려 다른 것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처럼 K는 탱고에 푹 빠져있는 상태였다. K는 강남 역 부근의 탱고 카페 라썬으로 갔다. K는 카페 출입문 앞에 서서 탱고 스텝을 밟았다. 물론 머릿속에서였다. 슬픔이 깃든 정열의 탱고 음악에 맞추어 추는 관능적이며 강렬한 동작은 상상만으로도 쩌릿하게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기억 저편으로 채 넘어가지 않은 어느 파트너의 향기가 코끝으로 스쳐 가기도 했다. 사랑과 체념과 연민의 정서를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비장하게 발산하는 몸의 언어라고 K는 감히 생각했다.
누군지 예상할 수 없는 어느 파트너와 플로어에서 멋지게 탱고를 추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K는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낯선 커플의 세련된 춤을 한순간의 이탈도 없이 부러운 시선으로 관전하기 시작했다. 완벽주의에 빠져들지 않는 탱고를 즐기라는 선배 민진호의 조언도 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한때는, 밀롱 가의 대가나 수준급의 마니아들로부터 기필코 실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어느 플로어나 파티장에서라도 격조 있는 탱고를 출 수 있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고 싶었다. 지금은 그런 마음을 얼마쯤은 비웠으나 K 에게 탱고는 이미 단순한 취미 차원이 아니었다.
선배 민진호로 인해 탱고에 입문하게 된 것은 맞지만 탱고 음악과 춤 에 정서적으로 이끌림이 없었다면 과연 이토록 빠져들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솔직히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집중이 언제 까지 이어질지 지금으로선 속단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러 운동을 즐기듯 해왔으나 자신이 어떤 춤에 이토록 빠지게 되리라고는 일말의 예 감도 하지 못했다. 아마도 탱고였기에 가능했을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부드럽고도 강렬한 춤동작에 누군가의 슬픈 이야기가 깃들어있음을 K는 느낀 적도 있었다.
파트너 제의가 어려운 것임을 K도 초반에는 깨닫지 못했다. 실력이 부족했던 자신이 거절할 수 밖에 없었음에도 그 여성의 수치심에 사로 잡힌 표정과 또 자신이 거절당했던 때의 민망했던 순간은 기억속의 화인과도 같았다. 춤을 끝내고 플로어에서 막 내려온 이성에게 건네는 파트너 제의는 예의가 아닌 것을 K는 모르지 않았다. 다소 이른 시간 때 문인지 그동안 서로 파트너가 되어주곤 했던 여자 회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탱고를 추고 있었다. K의 심리를 꿰뚫은 신수현이 파트너를 자처했다. 신수현은 선배 민진호의 아내였다. 급이 다른 실력 차이의 부담 때문에 순간 망설였으나 K는 목례로 감사를 표하고 플로어로 나갔다. 기본에 충실하며 동작을 즐기듯 춤을 추어야 겠다고 K는 생각했다.
신수현은 상체를 홀딩하는‘아브라소’모션에도 스스럼이 없었으나 K는 다소 조심스러웠다. K의 리드를 따라가 주는 신수현의 숙련되고 세련된 춤동작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도 충분했다. 파트너가 되어 준 신수현을 위해서라도 함께 추는 춤을 망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K는 한껏 집중력을 발휘했다. 자신의 아내와 후배 K가 몸이 밀착되기도 하며 탱고를 추는데도 단지 사교춤의 동작일 뿐으로 여기는 민진호는 담담하다 못해 평온해 보였다. K가 자신의 다리를 신수현의 다리와 엮어 고리를 만드는‘간쵸’동작과 서로 상체를 기울여 의지하는 동작인‘볼까다’에도 민진호의 표정에는 미세한 변화조차도 없었다.
은근한 기대심리는 스릴로 이어졌다. 민진호와 담소를 나누는 중에 도 K의 신경은 온통 유선경에게로 쏠려있었다. 세련된 미모에 수준급의 실력을 갖춘 유선경에게 남자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유선경은 여느 때처럼 구석진 테이블에 조용히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몇몇 남자들은 함께 춤을 추지 않겠느냐며 파트너를 제의하거나 혹 은 제의를 받게 되지 않을까, 내심 용기와 기대가 교차하는 심란한 갈 등을 겪고 있으리라고 K는 짐작했다. 그게 바로 자신의 심리상태이기도 해서였다. 하지만 누구도 유선경에게 선뜻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유선경이 무례하게 거절하지 않을 것을 모르지 않아도 만약 유쾌하게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거절당한 것에 못잖은 민망함에 사로잡힐 수 있어서였다. 그래선지 카페 대표 민진호는 남자들의 부질없는 갈등을 단숨에 접게 했다. 유선경과 파트너가 되어 탱고를 추는 민진호는 열정적이면서도 격조 있는 실력으로 춤을 리드했다. 유선경은 그에 맞춰 관능적이면서도 세련된 동작으로 수준 높은 탱고를 완성해갔다.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플로어에 고정되었다. K는 훨씬 편안해진 기분으로 탱고를 관전했다.
카페는 탱고 열기로 뜨거웠다. 유선경이 옆 테이블의 K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함께 춤을 추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선택받은 기쁨 은 내심 컸으나 K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만큼의 유쾌한 기색으 로 호응했다. ‘라 비오베테라’음악에 맞추어 두 사람의 춤이 시작되었다. 기본스텝인 바쎄 동작을 하며 K는 감정의 극명한 교차를 느꼈다. 기쁘면서도 일면 슬픔이 밀려들었고 원하는 파트너와 춤을 추고 있는 중 임에도 외로움이 등 뒤에 달라붙었다. 탱고를 사랑하는 크기만큼 우울함도 그만큼 커질 것만 같은 왠지 모를 우려가 뇌리를 스치기도 했다. 그와 같이 달갑잖은 사념들이 집요하게 정신을 흔들어댔으나 기쁜 시간의 기억으로 남기고 싶은 K의 집중력을 허물어뜨릴 수는 없었다.
신수현의 탱고가 강렬하고 세련되었다면 유선경의 탱고는 부드럽고 아름다우면서도 어딘지 슬픔이 깃들어있음을 K는 느꼈다. ‘까미나도’ 동작을 할 때 유선경의 눈빛에서 읽은 착각일지 모를 슬픈 그림자 때문 만은 아니었다. ‘아라스뜨레’동작을 하며 유선경의 발을 자신의 발로 끌고 가는 발끝에서도 그 느낌은 다르지 않았다. 춤을 끝낸 후에도 K의 느낌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코끝에 남아있던 유선경의 샴푸 향은 서서히 사라져갔으나 아름다운 기품 속에 비애의 그림자가 아른거린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K는 2주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는 유선경을 내심 기다렸다. 밀롱가에 오지 않는 이유가 자못 궁금했다. 지난번처럼 함께 춤을 추고 싶었다. 훨씬 나아진 춤으로 리드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여자 회원과 파트너가 되어 춤을 추었으나 유선경에게로 쏠려있는 마음은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예상치 못한 심리상태가 그리 유쾌하지 않음에도 K 는 머릿속에서 유선경을 떨쳐내지 못했다. 단지 부재가 궁금하고 함께 춤을 추고 싶은 것뿐이라며 다른 뜻이 없음을 확인하고 점검하는 자신 의 심리를 강변하듯 고개를 가로젓기도 했다.이성 회원은 플로어에서 함께 춤을 추는 파트너로 여겨야 할 뿐 그 이상 다른 감정은 갖지 말라는 경험자들의 회자 되는 조언이 떠오르기 도 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은 경각심만으로 조절될 수 없는 법이었다.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지 모를 자기절제의 붕괴가 K는 설핏 두렵기도 했다. 실제로는 이혼이나 다름없는 아내와의 별거 이후에 다른 이성에 관 심을 기울인 적은 단정코 없었다. 그러했던 K였어도 아름다운 미모와 사람을 끌어당기는 미묘한 흡인력을 지닌 유선경을 무심한 듯 지나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다른 남자회원들과 비교하여도 유선경이 좀 더 가까이 K 자신을 느끼고 있음도 무심해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카페로 들어서는 유선경과 나서려는 K는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출입 문에서 마주쳤다. 유선경은 적잖이 반가움이 깃든 눈인사를 K에게 건넸다. 반가움을 대놓고 표출하지는 않았으나 K는 궁금해하며 내심 기다렸던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렇게 지나치듯 카페를 나선 K는 연애를 막 시작한 연인 에게 밀당을 구사한 것 같은 기분마저 느꼈다. 물론 K 혼자만의 일방적인 심리작용에 불과한 것이기는 했다. 어쨌든 스치듯 유선경을 확인했 으나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는 K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유선경이 이 대로 끝내 나타나지 않을지 모를 우려를 떨칠 수 없었던 때문이었다.
유선경이 어느새 마음에 들어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음과 작위적으 로 제어될 수 없는 사람의 마음 그리고 그로 인한 파생의 고통이 설핏 설핏 두렵기도 했다. 그러했음에도 K가 당긴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나 과녁으로 향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 오랜만의 달뜬 감정이 좀 낯설고 온전히 유쾌한 것만은 아니지만 부질없는 중첩의 감정들일 뿐이었다. 자동차의 시동을 거는 순간, 어느 회원과 탱고를 추고 있을 유선경의 모습이 스크린도어가 열리듯 K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K는 탱고 카페 라썬에 가지 않았다. 볼일로 지방에 갔다가 오후 6시경에 서울에 도착했으나 곧바로 귀가했다. 종일 의식의 한줄기는 유선 경에게 쏠려있었기에 피곤을 무릅쓰고서라도 카페로 가는 게 맞으나 K 는 참기로 했다. 완벽한 착각임을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카페에 오지 않은 자신의 부재를 유선경이 어떻게 느낄지 몹시 궁금해진 것이 그 이유였다. K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혹 유선경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신을 궁금해하며 기다리지 않을까 하는 상상의 바람을 갖게 된 때 문이었다. 카페에 겨우 하루 모습을 보이지 않은 자신을 과연 유선경이 궁금해할까 하는 부질없음까지도 생각 못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K의 착각과 상상의 크기는 유선경에게로 쏠려있는 마음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일 수 있었다. 카페에서 만나면 인사를 나누고 몇 번 파트너로 함께 춤을 춘 것이 전부일 뿐임에도 K의 일방적인 생각은 굴 절도 없이 앞으로 뻗어 나아갔다. 빠른 결론을 확인하고 싶은 조급증의 덫에 걸려있음까지도 자각하고 있었으나 K는 방향을 수정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집착하지 않는 방식이라 믿고 있어서였다.
찻잔을 쥔 유선경의 모습이 K의 눈에 들어왔다. 다소 이른 시간임에도 유선경이 카페에 먼저와 있는 사실만으로도 K는 일단 달뜬 기분이 되었다. K의 바람대로 함께 춤출 것을 제의한 것은 유선경이었다. 마치 자신을 기다린 것 같은 K의 느낌은 완벽한 착각일수도 아니면 사실일 수도 있었다. 탱고 춤은 몸으로 표현하는 언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이라고 K는 생각했다. 더할 수 없는 집중력과 밀접성과 강렬함과 부드 러운 아름다움을 유선경이 온전히 춤동작으로 표현하고 있어서였다. 
유선경이‘사까다’동작인 발 사이로 발을 밀어 넣어 발을 걷어내는 데도 발의 밀어냄을 당한 것이 아닌 마치 끌어당김을 받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파트너인 유선경의 춤동작은 K에게 미혹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격조 있는 우아한 관능미를 제대로 발산하고 있는 유선경이 더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마치 유선경과 자신이 어느 연회장의 댄스 타임에서 주인공이 된 것처럼 우월한 기분마저 맛보고 있었다. 압도적으로 유선경을 리드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으나 K는 완성도 높은 춤을 위해 혼신을 기울였다. ‘포르 우나 카베사’음악에 맞춘 춤이 끝날 때쯤 K의 황홀한 기분은 최고조를 찍었다.
실상은 기대했던 시간이었으나 카페 라썬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유선경과 마주하고 있는 사실이 K는 몽환처럼 느껴졌다. 근처 커피전문점에 함께 가지 않겠냐고 유선경이 물어왔을 때 K는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서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소리 없는 웃음기를 머금고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 대답하였을 뿐이었다. 서로 호감을 느끼고 관계의 거리를 좁혀가는 시간이 얼마나 가슴 떨리도록 좋은 것인지 K는 내재되어있는 본능의 감각과 감정의 빛깔이 변하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가 보아도 아니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미인이며 어느 남자라도 이끌 릴 수밖에 없을 여성성을 지닌 유선경의 존재에 자신도 결코 무심할 수 없었음에 관해 K는 또다시 자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귓가로 몇 가닥 빠져나온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소소한 모습까지도 K의 눈에는 아름답게만 보였다. 지금 K의 기분은 지상 백 미터 상공의 애드벌룬에 올라타 있는 것보다 더 부풀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분별력의 와 해를 늘 경계하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어도 이대로라면 자기 의지력의 정상적인 작동을 확신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지난 2주 동안 미국에 다녀왔다는 유선경의 표정은 몹시 쓸쓸하고 우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K는 아무런 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들을 준비 가 되어있으니 계속하라는 눈빛으로 유선경을 조용히 응시했다. 대학 3학년이던 때 큰언니와 자신은 서울에 남고 가족들은 이민을 떠났다고 했다. 졸업 후에 자신도 가족들이 거주하는 시애틀로 갔고 서른한 살에 그곳에서 교포를 만나 결혼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후 세 살이던 아들 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선택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해놓고 유선 경은 비스듬히 고개를 떨구었다. 아마도 고개를 떨군 저 모습이 유선경의 현재 마음 상태일 것으로 K는 짐작했다. 성격 차이로 이혼한다는 것 이 참으로 무책임하고 사치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던 타인들의 스토리 가 정말 자기 얘기가 될 줄 몰랐다는 유선경은 비의 서린 짧은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K는 유선경과 시선이 교차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인 동시에 자기 숨 고르기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일 년에 두 번쯤은 시애틀로 가 아들을 보고 온다는 유선경의 가라앉 은 음성은 갈라지듯 가늘게 떨리기까지 했다. 일곱 살이 된 아들에게 그리움보다도 큰 것은 미안함이라며 자책하듯 몇 번씩이나 고개를 가 로저었다. 아무에게나 쉽게 꺼내놓을 수 없는 얘기를 유선경이 자신에 게 토로했다는 사실을 K는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이혼이나 다름없는 별거 중인 상태라며 K는 자신도 혼자인 것을 밝혔다. 유선경의 사유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과 아이가 없음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유선경은 미세하게 고개를 몇 번 주억였다. 카페 대표인 민진호 부부를 통해 알게 되었을 것으로 K는 짐작했다. 다만 비슷한 나이에 상황의 동질감만으로 유선경이 자신에게 다소 호의적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성으로서 얼마쯤의 호감을 품게 된 것은 아닐까 여기고 싶었다. 설혹 착각이라 해도 그리 허탈할 것 같지는 않았다. 뚝 끊어진 대화는 간헐적으로 이어지다가 거의 침묵 모드로 전환되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에게서는 몹시 어색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에클렉틱한 인테리어가 유선경의 분위기와 닮아 있다고 K는 느꼈다.평일 낮에 혼자서 가끔 찾아왔던 곳이라는 유선경의 말속에는 어느 이성과도 함께 왔던 적이 없었으며 K와의 동행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듯했다. 유선경이 약속장소로 정한 곳은 미사 리의 퓨전 레스토랑이었다. 밀롱가가 아닌 곳에서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이어지던 대화가 어느 순간 뚝 끊기기 일쑤여도 두 사람은 이미 익숙해진 듯 불편해하지 않았다. 올드 팝송이 흐르는 공간에서 크림 새우 파스타를 먹으며 이따금 고개 돌려 각자 강물을 바라보기도 했다. 존재하는 것은 예외 없이 전부 흘러갈 수밖에 없음을 눈앞의 강물이 보여주 는 듯했다.
인연을 뒤따르는 고통도 세월의 바퀴에 실려 결국 멀어져 가리라는 것은 K의 경험적인 자기 위안이었다. 유선경의 비중이 의식 속에서 커 질수록 K는 성급하게도 시간의 극복에 대한 자신감을 자기세뇌 하듯 곱씹었다. 사람들의 관계가 전부 이별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나 어떠한 형태로든 이별은 대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관 계의 밀도가 매우 견고했던 타인들을 통해서도 숱하게 목도 했던 K였다. 사실 굳게 다짐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내와의 결별 이후에 이성에게 마음을 기울이거나 밀접하게 관계가 형성될 일은 없을 것으로 나름 자 신했던 K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무너졌다라고 해야 맞는 것이었으나 K는 무너진 것으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K에게 그런 의 미는 부질없는 것일 수 있었다. 목적지가 어디일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것처럼 현재 진행 중인 감정이 중단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자극적이지 않은 유선경의 편안한 격조가 K는 좋았다. 함께 마주하고 있는 달뜬 기분이 은연히 의식을 간지럽히기도 했으나 K는 일절 표 출하지 않았다. 우려와 배려의 기술이었다. 그래선지 유선경도 대체로 불편이나 부담 없이 자신을 대하고 있음을 K는 확연히 느끼고 있었다. 유선경의 단정한 감성을 간파한 K는 지금과 같은 기조를 내내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찻잔을 쥔 채로 고개 돌려 창밖을 응시하는 유선경의 옆모습이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 K는 기억장치의 셔터를 눌렀다. 찻잔을 손에 쥔 유선경의 모습은 한 컷의 화보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이미 느껴왔던 K였다.
대화 중에 이따금 조용한 미소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까지도 K 의 눈에는 매력적으로 보였다. 선입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딘지 슬픈 빛이 서려 있는 듯한 유선경의 시선을 K는 놓치지 않고 쫓았다. 셀카를 찍자는 K의 제안에 유선경은 망설임 없이 K의 핸드폰 카메라를 응시했다. K는 처음으로 함께 찍은 사진을 유선경의 핸드폰으로 전송했다. 사진을 확인하며 소리 없이 웃어 보이는 유선경의 모습이 K 는 설핏 낯설게 느껴졌다.
유선경의 문자를 받은 K는 일단 흐뭇했다. 관계의 형성을 유선경이 인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반면 새로운 일정으로 한동안 밀 롱가에 갈 수 없겠다는 내용은 K를 급격히 공허하게 만들었다. K의 허 전하고 심란한 마음은 좀처럼 전환되지 않았다. 지난주, 미사리 카페에 서 강물을 응시하던 유선경의 옆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K는 핸드폰 갤러리에 저장되어있는 사진을 클릭했다. 그런 후에 드로잉북에 사비 연필로 유선경의 그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소묘기법을 살려 섬세하게 유선경을 그려나갔다.
미술을 전공하지는 않았으나 K의 데생이나 스케치 실력은 타고난 듯 수준급이었다. 색감을 넣지 않은 검정 단색만으로도 유선경의 얼굴 특징과 분위기를 디테일하게 묘사했다. K의 집중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드로잉에 빠진 K는 흡사 무아의 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림의 완성도를 최대한 끌어올리고 싶은 집념 때문일 수 있었다.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K의 공허함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K는 그림으로 만 난 유선경을 깊게 바라보았다. 유선경도 간혹 K 자신을 떠올리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갈등하며 망설였으나 이틀 후에 K는 결국 그림을 사진 찍어 유선경 에게 전송했다. 유선경도 얼마쯤 흡족해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은 상상 이나 다름없었다. 예상과 달리 몇 분 만에 답장이 도착했다. 그림 솜씨 가 이 정도 일줄 몰랐다며 과찬을 하기까지 했다. 짐작 이상의 호의적 인 반응에 K는 일면 부끄럽기도 했고 뿌듯하기도 했다. 보냈던 그림과 받은 문자를 확인하듯 다시 눈에 넣었을 때 유선경으로부터 문자 한 통 이 또 날아왔다. 함께 탱고 춤을 추는 모습을 그려줄 수 있느냐는 물음 이었다. 유선경의 마음이 멀리 있지 않음을 느낀 K는 파트너가 되어 함께 춤을 추었던 장면들을 이내 떠올렸다. K는 알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드로잉북을 펼치기 전에 K는 눈을 감은 채 작은 움직임도 없이 잠시 요지부동했다. 유선경과 함께 춤을 추었던 순간순간의 감성들을 정수리 까지 끌어올렸다. ‘까미나도’동작을 할 때의 기억 속 장면을 그리기로 했다. 서로 마주 보며 자신은 앞으로 유선경은 뒤로 걷는 모습이었다. 자신과 유선경의 알 수 없는 관계 설정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해서 차라리 밀착되는 춤동작을 그려볼까 생각하며 K는 혼자서 멋쩍게 웃었다.
완성된 그림의 자기 만족도가 높아야 유선경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K는 그리기에 온정신을 쏟았다. 함께 춤을 추었던 순간순간의 느낌들을 기억으로 끌어내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자가최면을 걸듯 마치 그 시간 속으로 돌아간 것처럼 그런 의식상태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정말이지 사진으로 여겨질 수 있을 만큼 정교하고 생생한 느낌을 온전히 살려 표현하고 싶었다. 즐기듯 스케치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기분이 그리 가벼운 것은 아니었으나 유선경이 원한 것 때 문에 K는 힘든 줄도 모르고 작업을 전개해갔다. 급할 것이 전혀 없는데 도 K는 완성의 성취를 빠르게 맛보고 싶었다.
바람에 불과한 꿈같은 상상이어도 서로에게 이끌리는 느낌을 제대로 살려내고 싶었고 그런 마음을 그림 속에 불어넣고 싶었다. 유선경의 입 술과 볼은 옅은 붉은색으로 색조 감을 주기로 했다. 반나절 이상 오로 지 그리는 작업에 몰두하여 일직선이 되어있던 K의 의식의 빗장은 그림이 거의 완성이 되어갈 때쯤에서야 풀리고 있었다. 현재는 남이 된 사람이지만 사랑에 빠져 결혼했던 아내 외에 어느 여자에게 이토록 마 음을 쏟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K였다. 정말이지 사람의 내일 일은 어찌 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K는 새삼 깨닫고 있었다.
K는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그림을 사진 찍어 유선경의 핸드폰으로 전송했다. 기대와 유려가 동시에 밀려들었다. 나름 괜찮게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자기만족은 그뿐이었다. 평가와 결과를 기다리는 출품작가들의 기분이 이럴 것이라고 K는 생각했다. 답장을 기다린 이십 여분이 K는 두 시간쯤으로 여겨졌다. 다소 길게 작성한 유선경의 문자는 그야 말로 감동과 격찬으로 이어진 평가였다. 일순 기분이 황홀하기도 했으나 K는 이내 부끄러움을 느꼈다. 격려가 포함된 다소 과도한 칭찬일 뿐 그럴만한 수준은 아닌 것을 모르지 않아서였다.
어쨌든 유선경의 반응이 기대 이상인 것은 몹시 기뻤다. 더구나 그림을 자신에게 줄 수 없겠느냐는 유선경의 물음은 K가 원하던 바였다. 그림을 액자에 넣어 전해주려는 생각을 이미 했던 터였다. 심혈을 기울여 그림으로 유선경을 표현한 것으로서 작금의 K의 의식의 화살표는 결국 유선경을 관통하고 있는 반증이 아닐 수 없었다. 한동안 밀롱가에 올 수 없다는 유선경의 그 이유가 자못 궁금했으나 K는 묻고 싶지 않았다. 집착을 배척하는 것은 K의 견고한 관념이었다.
기억의 감각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유선경의 춤동작의 느낌을 K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함께 탱고를 추는 것은 거의 두 달 만이었다. 그리 약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한층 가까이 지내기 시작한 후로 두 사람은 파트너가 되어 춤을 추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밀롱가에서는 서로 한 걸음씩 비켜선 것 같은 포지션을 취했다.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한 것보다는 일말의 구속심리를 경계한 상대에 대한 묵계적인 배려에서였다. 좀 더 경쾌하고 강렬해졌으나 유선경의 춤동작에 깃들어있는 어딘지 모를 슬픈 느낌은 온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K는 느꼈다.
적정한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자신과 유선경과의 관 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것은 어떠한 형태의 사람 관계에서도 필요 하다는 것이 K의 생각이었다. 적절한 완급조절과 기술은 성향과 경험을 불문하고 필요한 것임을 K는 다시금 깨닫고 있었다. 어쨌든 파트너 로 유선경과의 오랜만의 춤이 사뭇 유쾌하기는 했다. 춤이 끝나갈 때쯤 K는 탱고와는 어울리지 않는 한껏 밝은 표정을 의도적으로 유선경에게 보여주었다. 당신과의 오랜만의 춤이 매우 좋았다, 라는 무언의 표현이 었다. 춤으로 교감하며 서로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는 자신의 의도적인 표현을 유선경도 읽었을 것으로 K는 생각했다.
이튿날, 두 사람은 44번 국도를 타고 양평을 지나 홍천으로 갔다. 강 가 도로변의 소공원 벤치에 앉은 K는 지난 어느 날 혼자서 이곳에 앉아 있었을 유선경의 모습을 상상했다. 유선경의 토로 혹은 고백을 K는 직감했다. 어떤 말일지 전혀 감을 잡을 수는 없었으나 필시 무언가 할 말 이 있음을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느꼈기 때문이었다. 유선경은 작은 바람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귓가로 쓸어넘기며 넌지시 K를 바라보았다. K는 묵묵히 유선경의 시선을 받았다. 유선경은 자신과 K의 관계가 지 금 상태에서 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예상 밖의 질문을 받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으나 K는 그 말뜻의 의미를 순간 간파했다. 다름 아닌 깊은 남녀관계로 진행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자칫 애증에 빠질 수도 있는 관계를 미리 점검하고 차단하고 싶은 의미로 받 아들여졌다. K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본인의 생각을 밝히고 싶은 것일 뿐 유선경도 K의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유선경은 K의 기분을 K는 유선경의 생각을 알고도 남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K는 마음의 정돈을 끝냈다. 사실 K는 유선경이 우려하고 있는 상황을 골똘히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밀 접한 관계로 발전해갈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스쳐 가듯 든 적도 있 었으나 지금 이상의 전개를 깊게 고민해본 적은 없었다. 사실 누군가와 또다시 가정을 꾸린다거나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K였다. 그 대상은 유선경도 예외일 수 없었다. 아내와의 결혼생활이 실패로 끝난 K는 솔직히 그런 부분은 스스로에게조차 자신이 없었다. 유선경이 지 금 마음속에 크게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혹 그로 인해 관계가 복잡해 지고 심란해질 수 있음을 K가 심히 우려하지 않은 것은 확고한 자기계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사람 일의 결론을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도 생각하긴 했었다.
섹스나 결혼이 목적이 되지 않는 관계가 오히려 오래 유지되고 지속 할 수 있음을 K도 부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적잖이 고민했을 유선경의 등을 토닥여주고 싶었다. 여하튼 작별을 원하지 않는 유선경의 마음을 헤아린 K의 생각은 한결 가볍고 간결해지고 있었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숱한 요인들로 인해 깨질 수 있는 확률이 비례하는 것을 익히 알고 있어서였다. 예상 못한 토로가 순간 유쾌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유선경의 종심을 알게 된 것과 적절한 때에 버튼을 누른 정돈의 타이밍에 K는 오히려 소리 없는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K는 자정쯤에 장문의 문자를 작성해 유선경에게 발송했다. 지금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낼 것에 흔쾌히 동의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마 음을 충분히 헤아리고 공감한다, 라고도 했다. 어떤 경우에도 만남을 후회하지 않을 사람들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정돈과 비움의 필요성을 새삼 깨달은 K는 원하였던, 원하지 않았던 계륵이나 다름 없던 욕망의 작은 덩어리가 미세하게 분쇄되어 한순간 불어온 강풍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기분이 되었다.
쟁취와는 다소 먼 관계였다 해도 유선경의 존재로 인해 쏠려있는 의 식의 파고가 상승곡선을 이어가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유선 경의 과단성과 조정능력이야말로 상처받지 않고 상처 주고 싶지 않은 경험적이며 결벽 적인 방어심리와 배려심에서 기인 되었을 것으로 짐 작했다. 어쨌든 어려운 시도를 마다하지 않은 유선경을 유능한 선장으 로 인정해주고 싶었다. K는 불쑥 유선경과 탱고를 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낯선 밀롱가의 사람 없는 텅 빈 플로어에서 근사하게 춤을 추고 싶었다. 그야말로 어떤 말도 필요 없이 춤동작만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깊은 잠에 빠져들지 못한 K는 새벽녘까지 뒤척였다. 예고 없이 불어 오는 바람처럼 어느 순간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은 변명일까 아니면 의지로서 조절할 수 없는 불가항력일까. 정말이지 어느 쪽이 맞다, 라고 선뜻 깃발을 들어 올릴 수는 없었다. K는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싶었다. 유선경에게 마음을 기울인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느냐고 자문자답을 했다. 단칼에 거부하듯 K는 단정의 대답을 하지 못 했다. K의 생각은 다소 길게 이어졌다. 어떠한 형태의 남녀 관계여도 늘 달콤할 수 없음은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보다는,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을 절제의 의지력이 무너진 것을 후회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상대를 미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점은 갈등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K의 생각이었다.
오히려 유선경의 선제적 컨트롤로 인해 후회할지 모를 감정의 가능 성조차 사라졌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명적인 후회를 하고 싶지 않은 유선경의 생각과 K의 생각은 결론적으로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남녀관계의 고통을 모르지 않는 K는 유선경의 선제적 정돈이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었다. 선택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상황을 감당해야 할지 모를 일이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 그래선지 한계선을 명확히 긋고자 하는 유선경의 뜻에 동의한 K의 심사는 일면 씁쓸했으나 비움의 후련함은 더 커지고 있었다.
삼전동의 퓨전 선술집에 들어선 K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입 구 쪽 테이블에 앉은 유선경이 혼자서 소주 두 병째를 마시고 있음을 확인한 때문이었다. 술이 약한 유선경은 맥주나 와인을 조금 마시기는 해도 소주를 거의 마시지 않는 것을 K는 이 전에 들어 알고 있었다. 와 줄 수 있겠냐는 유선경의 전화를 받고 오는 동안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K였다. 유선경의 취기 서린 얼굴에 씁쓸한 웃음기가 한순간 번져 났다. 생각이 바뀐 것일 뿐 애초에는 연락할 생각 없이 혼자서 내내 마 시려 했음을 K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와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굳이 빼먹지 않은 유선경은 발음이 꼬일 것을 조심했다. 그러면서 반쯤 담긴 소주잔을 집어 들었다. 취기는 돌지언정 흐트러진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K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흘렸던 침묵을 깬 것은 유선경이었다. 지 난 주말에 전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다. 오늘은 언니 집에 가 있으나 아들은 자신과 함께 있으며 전남편은 호텔에서 묵고 있다고 했다. 전남편이 이번에 한국에 나온 이유가 있다면서 유선경은 손빗으로 다소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유선경의 마뜩잖은 심사 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K는 유선경의 시선을 쫓지 않았다. 어렵게 말을 꺼내놓을 유선경이 되도록 편해졌으면 해서였다.
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지만 그럴 수 없다면서 유선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들을 생각해서 다시 합치자는 남편의 설득이 전 혀 와닿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과 아이 아빠의 관계는 변화될 수도 회복될 수도 없다고 했다. 눈앞의 아들을 보면 가슴이 미어지고 한없이 괴롭지만 조금도 내키지 않는 재결합을 그 이유만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했다. 안될 것을 알기에 일말의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다면서 유선경은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은 갈등조차도 부질없을 만큼 이미 확정된 방향을 바꾸려 한다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 것이냐며 반문하듯이 K에게는 들렸다.
K는 끝내 침묵하겠다고 생각했다. 전남편과의 일이기도 하지만 딱히 해줄 수 있는 말도 없어서였다.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싶을 때는 누군가 묵묵히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기에 자신은 단지 그 역할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전남편의 제의에 유선경의 마음이 바뀔 가능성이 제로인 것과 직면한 괴로움이 비례하지 않는 것은 순전히 자식 때문인 것을 이해하면 될 일이었다. 전남편과의 관계와는 무관한 것이라면서 유선경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했다. 서울에서 계속 지낼 것이며 이렇게 서울에서 마시는 술이 좋아서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K는 유선경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유선경은 술 잔을 들어 올리며 오늘 밤의 마지막 술임을 밝혔다. K는 유선경의 끊고 맺음이 왠지 낯설었다.
K는 유선경의 춤동작이 더할 수 없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유선경이 예약한 논현동의 탱고 카페는 온 적 없는 밀롱가였다. 유선경은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적극적인 움직임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K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춤을 리드하며 유선경의 춤을 받쳐주었다. 얼마 전의 상 상이 비슷하게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에 K는 미묘한 기분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낯선 밀롱가의 텅 빈 플로어에서 유선경과 탱고 춤을 추고 싶었던 상상이었다. 하지만 열정적인 춤동작으로도 온전히 가려 지지 않는 유선경의 어딘지 모를 비의 서린 눈빛을 K는 놓치지 않았다. K는 그것의 실체를 직감할 수도 제대로 추론할 수도 없었다. 도무지 알수 없는 내면의 격랑을 가라앉히려는 혼신의 몸짓이 아닐까 하는 정도 의 짐작만 할 뿐이었다.
탱고 음악이 거의 끝나가고 있음에도 유선경의 격정적인 춤동작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마치 절정의 불꽃이 순식간에 꺼져버릴 것을 우려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아브라소’동작을 하며 K와 유선경의 상체는 밀접하게 홀딩상태가 되었다. 그때 찰나와도 같은 한순간에 유선경이 K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K로서는 일말의 예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당혹감을 느꼈으나 K는 겉으로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K는 달리 의식하지 않는 기색을 애써 보여주려 했다. 의도가 어 떠하든 유선경의 순간의 행위에는 그러한 바람도 담겨있을 것으로 K는 순간 느꼈기 때문이었다. K는 일단 탱고 춤의 엔딩에 집중하고 싶었다. 
유선경의 언니라고 밝힌 낯선 여자의 전화를 받은 순간 K는 불온한 시간을 직감했다. 6개월 전에 논현동의 밀롱가에서 함께 춤을 추었던 그날 이후로 K는 유선경을 볼 수 없었다. 그 후로 유선경의 핸드폰 전 원은 내내 꺼져있었다. 몹시 궁금하기도 했으나 관여할 수 없는 어떤 사정이 있을 것이라 여기며 어느 날 혹 연락해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K였다. 의도적으로 애써 유선경을 잊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나 공백의 시간이 흐를수록 존재감의 무게도 조금씩 줄어들었던 것은 사 실이었다. 그리움이 쌓여 갔으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집착으로 변질이 될 수 있음은 경계했다. 그리움과 허탈하고 부질없을 뿐인 집착은 별개였다. 만남을 예감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이별도 다르지 않아서 결국은 사람이 좌우할 수 없는 영역임을 K는 오래 전에 깨달았었다. 만날 수 없었던 시간이 한 달 두 달 흘러가면서 어쩌면 유선경을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얼핏 들기도 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후회한 다 해도 달라질 것도 없지만 K는 유선경을 만났던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는 않았다. 관계로 인해 파생되는 고통은 오로지 자기 감내의 몫으로 극복해야 할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형태와 시기의 문제일 뿐 대개 언젠 가는 도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그러했다. 다만 관념과 직면한 고통은 별개였다. 유선경의 현재 상황을 단정할 수는 없으나 스쳐 가는 수많은 생각들로 인해 외출을 준비하는 K의 마음과 몸은 몹시 무겁기만 했다.
석촌호수 부근의 커피전문점에 먼저 와있던 유선경의 언니는 눈을 약간 내리깐 채로 계속 머뭇거리며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테이블 주 위로 감도는 불온하고 무거운 기운에 K의 불안하고 초조한 기분은 눌릴 수밖에 없었다. 2주 전에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밝히며 이 윽고 유선경의 언니가 입을 열었다. K는 자신도 모르게 단발의 비명 같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추론했던 여러 경우의 수 중에 정말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충격으로 K는 머릿속이 하얘지고 아찔한 어지럼 증을 강하게 느껴야 했다. 6개월 전에 유방암 초기판정을 받았으나 수 술이 잘 되어 완치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주변 조직으로 급속하게 전이 되면서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상태가 빠르게 악화가 되었다고 했다. 유선경의 언니는 그렇게 말해 놓고 고개를 옆으로 떨구었다. 더 이상의 설명은 의미 없을 뿐이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K의 뇌리에 기억의 퍼즐이 완성됨과 동시에 그대로 부서지며 파편 조각이 되어 박혀 들었다. 관계의 전개를 미리 차단 하듯 지금 이대로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했던 홍천강변에서의 토로와 논현동의 밀롱가에서 탱고 춤이 끝나갈 때쯤 섬광처럼 빠르게 순간의 입맞춤을 해왔던 이유를 K는 지금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필시 진단을 받은 직후였음을 K는 짐작했다. 유선경이 말하지 않는 한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그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는 것이 K의 가슴을 한없이 저리게 했다.
유선경의 언니가 건네준 것은 그림 액자였다. 자신이 떠나면 K에게 전해달라 당부한 것이라 했다. K는 집으로 돌아와 선물포장지를 풀어 액자를 꺼냈다. 유선경의 언니로부터 그림 액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K 는 자신이 그려 유선경에게 주었던 드로잉 그림을 생각했다. 빗나가지 않은 직감이기는 했으나 그림은 2점이 아닌 3점이었다. 낯선 액자는 환 하게 웃고 있는 K 자신의 얼굴을 그린 드로잉 그림이었다. 그림 하단에 는 흘림체로 유선경이라는 이름이 쓰여있었다. K는 자신을 떠올리며 그림 그리기에 집중했을 유선경의 모습을 상상했다. K는 정수리에서 등을 거쳐 발뒤꿈치까지 감전이 연결된 것처럼 몹시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어쩌면 아주 힘에 부친 투병 시기 중에 그렸을지 모를 생각이 들어서였다.
상당히 수준급으로 보이는 그림 실력에 K는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미사리 카페에서 찻잔을 쥔 채 강물을 응시하던 그림, 함께 탱고 춤을 추는 그림 그리고 유선경이 K 자신을 그린 것까지 3점의 그림을 펼쳐놓고 K는 길지 않은 시간을 거슬러 회상에 잠겼다. 조용히 미소짓던 아름다운 유선경의 모습이 떠올랐고 잔잔한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는듯 했다. 해일처럼 그리움이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유선경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설혹 다시 볼 수 없다 해도 유선경이 살아만 있다라고 한다면 정말 뛸 듯이 기쁠 것 같았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런 슬픔도 고통도 없이 행복하기를 K는 간절히 기원했다. K는 자신이 그린 그림 속의 유선경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며 짧은 인연의 작별인사를 건넸다.
K가 밀롱가를 찾은 것은 거의 두 달 만이었다. 유선경의 언니로부터 유선경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후로 탱고를 추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서였다. K는 낯익은 여자 회원과 파트너가 되어 춤을 추었다. 짐작했던 대로 이전처럼 탱고의 열정이 솟지도 감흥이 느껴 지지도 않았다. 함께 탱고 춤을 추게 되는 파트너가 혹 유선경으로 여겨지는 혼돈을 느끼지는 않을까 했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오히려 파트너로서의 역할이 표가 날 만큼 미진하여 상대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까 우려해야 할 정도였다.
K는 가까스로 춤을 끝내고 밀롱가를 나섰다. K는 근처의 커피전문점으로 들어갔다. 밀롱가가 아닌 곳에서 유선경과 처음으로 만났던 곳이 었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몹시 달뜬 기분이 되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졌다. 아무래도 더는 탱고를 출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조금 전 에 어느 여자 회원과 함께 추었던 춤이 어쩌면 마지막일 것 같은 예감 이 들기도 했다. 아니 격정적인 춤동작을 보여주며 짧은 순간의 입맞춤을 해왔던 유선경과 함께 추었던 그날의 탱고가 왠지 마지막이었으리라는 생각이 굳어질 것 같았다. 절대 작위적으로 단정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감흥 잃은 허상의 몸짓이 K는 정말 내키지 않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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