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1월 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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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동 이의 문자를 받았다. 신병 훈련 기간에 문자라도 넣을까 하다가도 먼저 연락하겠지 싶어 차일피일 미루던 참에 받은 문자여서 그런지 속이 뜨끔했다. 나는 자동차의 시동을 걸기 전에 문자부터 확인했다.
‘훈련 마치고 유해발굴부대로 갈 듯.’
동이의 문자는 간결했다. 훈련을 마치고 배치받을 자부대가 유해발굴단이라는 내용인 듯했다. 훈련소에 들어간 게 며칠 전 같은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싶었다. 유해발굴이라는 것을 소설에서 가끔 읽었거나, 해외 발굴 유해를 송환하는 정도만 뉴스를 통해 봤기에 나는 좀 뜻밖이었다. 입대하는 날 신병훈련소에서 동이를 배웅하며 1년 8개월의 복무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라는 마음뿐이었다. 원하는 대학 진학이 어렵게 되자 바로 군대에 가겠다는 동이를 가족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행사 장소인 파주가 가까워질수록 도로와 한강을 막아선 우중충하면서도 날카로운 철책선이 자꾸 시야를 찔렀다. 뿌리를 내리듯 움직이지 않는 철책선 사이로 강물은 빛을 흘리며 끊임없이 서로를 밀고 당기며 움직이고 있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인 이즈음 분단의 상징 도시인 파주에서 평화를 주제로 열리는 DMZ문학 행사였다. 유해 발굴이라는 문자를 봐서 그런지 불현듯 DMZ에는 지금 얼마나 많은 시 신이 묻혀 있을까 하는 생각이 한기처럼 돋아 올랐다. 나는 자유로를 달려 파주로 가는 내내 목에 무엇이 걸린 듯했다.
막히지 않고 달려온 덕분에 개회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한 나는 지하 3층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행사장 입구에서 안쪽을 살폈다. 이른 탓인지 행사 도우미로 보이는 검은 색상 위를 단체복으로 입은 젊은 친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나는 등을 돌려 행사장과는 정반대의 길로 들어섰다. 행사가 열리는 이곳 파주출판단지가 낯설지 않았다. 출판 관련 일을 하다 보니 한 달에도 서너 번은 들어와야 했고, 무엇보다도 이 출판단지가 준공되어 입주를 시작할 무렵 나는 근처 일산에 살고 있었다. 그 무렵 이곳 홍보를 위한 각종 문화행사가 많이 기획되었고, 집에서 가까운 거리여서 가족들이 손잡고 주말마다 이곳을 찾은 시간이 많았다.
코로나 광풍의 뒤끝인 지금은 그때의 활기를 찾아볼 수 없지만 출판사가 빼곡히 들어앉은 이곳보다 예술가들이 상주하는 집이나 작업실이 있는 거리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편이었다. 거리의 가로수 잎사귀에는 가을이 성큼 와있었다. 나는 잰걸음으로 출판사 거리를 벗어나 예술가들의 집과 작업실,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 공연장이 모여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때 어디선가 강렬하게 들려오는 사이렌이 순식간에 주위의 모든 소음을 뒤덮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내 눈에 멀리 북쪽 방향 산등성이에서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퍼져 올라가는 것이 보였지만, 소방차는 보이지 않고 사이렌 소리만 계속 귀를 먹먹하게 찔렀다.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방향은 물류창고가 많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잠깐 서 있던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지만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이상 하게 가슴이 뻐근하면서 갑자기 몸이 불균형해져 자꾸 뒤뚱거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알 수 없는 몸의 변화에 내심 당혹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눈앞에 노란색 건물이 보였다. 나는 탄식 같은 짧은 쉼을 뱉으며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건물은 예전의 모습이었지만 외관 색상이 연두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뀌었고, 1층 실내의 종이접기로 접은 듯한 알록달록한 색감의 의자와 소파가 눈에 쏙 들어오는 빵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곳은 동이가 5살 즈음, 꽤 유명한 키즈카페였다. 입장권을 구입해 들어가 종일 놀면서 배가 고프면 잠깐 외출해서 먹거리도 해결할 수 있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키즈카페로 유치원생을 둔 엄마들로부터 인기를 끌던 곳이었다. 그날 동이는 제 누나와 함께 실내외가 모두 연두색이어서 연두 집으로 불리던 이곳에서 방방이도 타고 인형이나 장난감을 가지고 뒹굴다가 동화책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을 잊고 놀던 아이들이 오후 서너 시가 지나서야 지친 얼굴에 눈이 퀭해 나타나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렸다. 아내는 그런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근처 파스타 식당에서 허기를 채운 뒤 예술가들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오후의 햇살이 여전히 뜨겁게 느껴지는 가을의 초입이었다. 지친 아이들이 걷는 게 싫다며 투덜거려도 아내는 보여줄 게 많다며 미술관, 박물관, 공방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애들의 칭얼거림이 도가 넘으면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렸다.
그렇게 한 시간 여쯤 걷고 있을 때였다. 갤러리에 들어가자마자 동이 가 오줌이 마렵다고 발을 동동거리는 바람에 데리고 옆 건물의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새카맣고 긴 털에 몸집이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동이가 개를 보자 까르륵 웃으며 달려가 귀엽다고 털을 쓰다듬으려 하는 순간 녀석이 펄쩍 뛰면서 커다란 입속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컹 짖었다. 그 소리에 놀란 동이가 뒤로 털썩 넘어지며 울음을 터트리자 언제 나타났는지 아내가 개를 향해 손에 든 양산을 마구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아내의 드센 기세에 눌린 개는 꼬리를 내린 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더니 골목 안으로 사라졌고, 아내는 검처럼 휘두르던 양산을 내 쪽으로 돌리며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애가 저 모양인데 당신은 뭘 했느냐는 힐난이었다.
나는 뒤늦게 동이를 일으켜 세우고 달래느라 정신이 없는 데다 대답이 궁해 막연히 하늘만 쳐다보았는데, 푸른 하늘을 낮게 날아가는 비행기 두 대가 보이고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가 얼마나 가까이 들리는지 거리의 사람들이 일순 모든 동작을 빼앗긴 듯 몸이 굳었다. 두 대의 비행기가 그 뒤를 이어 또 날아왔고 굉음은 더욱더 크고 날카롭게 귀를 파고들었다.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비행기는 계속 북쪽을 향해 낮고도 빠르게 날아가는 중이었고, 가뜩이나 겁에 질린 동 이는 새파란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푸른 하늘에 흰 띠를 남기며 날아가는 비행기만 봐도 팔짝팔짝 뛰며 좋아하던 예전의 동이가 아니었다. 얼굴에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동이를 등에 업고 일어서는데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며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터져 나왔다. “경계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국민 여러분들은 야외 활동을 자제하시고 안내방송에 귀를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계속되는 안내 방송에 불안을 느낀 거리의 사람들은 가까운 카페로 뛰어들거나, 가족들의 손을 잡고 주차장 쪽으로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동이를 업은 나는 아내와 초등학교 2학년 딸애를 다그치며 주차장으로 달려가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자유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가면서 라디오를 통해 북한의 전투비행단이 남한 영공에 침입하였다가 공군의 재빠른 대응으로 다행히 영공 밖으로 물러났으며, 경계경보가 해제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요즘은 북한이 날린 미상물체(오물과 전단) 때문에 한밤중에도 위급 재난문자를 핸드폰으로 받지만, 그때는 당장 사이렌부터 울리는 시절이었다.
알록달록한 의자에 둘러앉아 맛있게 빵을 먹고 있는 사람들을 들여다보면서 회상에 잠겼던 나는 얼핏 정신이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행사장으로 향했다. 그사이 태양은 두어 뺨 더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행사장을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린 입구에서 나는 핸드폰을 꺼내 동이의 카톡을 확인했으나 그 이후에 온 것이 없었다. 호우에 실종된 마을 주민을 수색하다가 순직한 해병대원 이야기로 사회가 들썩이는 시기여서 그런지 나는 영문모를 불안감이 스멀거리는 기분으로 조명이 환하게 번쩍이는 행사장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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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50여 명의 작가와 교수들이 참가하는 행사는 3일 동안 계속되었고, 나는 이틀째 소설 일부를 낭송한 후 짤막한 질의응답을 하는 순서였다. 커피나 음료, 과자를 준비해둔 탁자 앞에서 무리 지어 있는 몇몇 낯익은 작가들 가운데 윤이 손을 들어 나를 반겼다. 내가 일행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는데 시간이 되어 행사를 시작하니 모두 자리에 앉으라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식전행사가 끝나고 프로그램 일정에 따라 기조 강연과 포럼 발제가 이어졌다. 나는 제2세션 주제인 전쟁, 여성, 평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작가들은 저마다 겪고 생각한 전쟁과 여전히 존재하는 공포에 대한 담론을 진지하게 들려주었다. 그들의 언어는 바로 바로 번역이 되었고, 자료집도 있어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자리 중간쯤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행사의 가장 큰 화두는 파주 DMZ였다. 전쟁을 치른 분단국가의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해 설치한 비무장 비전투 지역인 비무장지대, DMZ. 발제자들은 빠짐없이 분단의 상징인 이곳을 언급하면서 전쟁의 실상과 아픔, 평화를 이야기했다. 자신들이 직접 겪은 전쟁 이야기와 자손들이 겪을 전쟁의 위험을 강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프랑스, 벨라루스, 나이지리아, 인도, 페루, 독일, 베트남, 타이완, 필리핀, 팔레스타인, 이라크에서 온 작가들은 개인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의 참혹함과 무서움, 냉정함에 관해 말했다. 특히 팔레스타인에서 온 작가가 가자 지구에서 겪었다는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당신은 충분히 경고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방위군.’
이 전화 녹음 메시지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 군대가 가자 지구 주거 건물을 폭격하려고 할 때 남기는 전화인데, 작가 자신도 그 전화 메시지를 받고 폭격을 당했다고 했다. 팔레스타인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동 안 나는 전화벨이 울리는 이상한 이명이 계속 들리는 것 같았다.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는 내 심장을 자꾸 압박했고, 알 수 없는 공포가 몸을 뒤덮었다.
베트남에서 온 작가의 전쟁 중에 폭격을 피해 가족이 피신한 토굴 안에서 어머니가 부르짖었다는 말은, 분절된 단어의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가슴에 박혔다.
“우린, 이제, 돌로, 쪼아댄, 계란, 처럼 되겠구나.”
고작 열여섯 살이었던 작가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지만, 집 주변에 폭격이 시작되고서야 그 말의 뜻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했다. 폭격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철들게 했고, 어른이 되게 했다는 작가는 청년 돌격대에 들어간 후에 만난 조그마한 묘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행군 중 오솔길에서 포탄에 맞거나 사고를 당해 죽은 청년들의 급조된 묘를 자주 만났는데, 그 숲길은 수풀이 무척 빨리 자라 금방 나무가 모든 걸 가리면서 오솔길은 사라지고, 그러면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어디에 있는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나는 전쟁터에서 저렇게 흔적 없이 사라져 가족들의 애간장을 녹아내리게 만드는 그들을 언젠가 찾아내는 것이 유해발굴부 대의 임무이고, 그것을 동이가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쟁이라는 단어가 피부에 확 와닿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쟁인데 그것이 언제나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다는 현실이 무섭고, 동이가 군인이라는 사실이 갑자기 두려워졌다.
베트남 작가의 기조 강연이 끝나자 잠시 쉬었다가 계속하겠다는 사회자의 안내방송이 있었지만 누구도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잠시 후 하나둘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나 음료수를 마시면 서도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현재의 전쟁과 과거의 전쟁 그리고 약 200여만 명의 사상자를 낸 전쟁을 잠시 쉬게 만드는 DMZ라는 지역의 현 장성이 무거운 분위기로 실내를 채색하고 있었다.
나는 화장실에 갔다가 커피 한잔을 들고 행사장 밖으로 나왔다. 밖은 벌써 어두워졌고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핸드폰 카톡방을 들여다보았지만, 동이의 새로운 메시지는 없었다. 나는 망설이던 답장을 보냈다.
‘맡은 바 임무를 충실하게 완수하기를.’
소심한 아버지의 소심한 답장이었다. 나는 카톡을 보내놓고 슬쩍 입술을 비틀었다. 해병대원의 일을 비롯해 일련의 군대라는 어감이 주는 자유스럽지 못한 무엇 때문에 주눅이 드는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뒤숭숭한 마음을 달래느라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좀 지체하고 행사 장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는데 카톡 도착 메시지가 울렸지만, 나는 애써 외면하고 강연에 귀를 기울였다.
일명‘목소리 소설’로 불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 장르를 개척한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벨라루스에서 살고 있는 작가 순서였다. 그녀는 수백 대의 러시아 탱크가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었고, 수십 대의 비행기가 우크라이나 도시를 폭격한 전쟁의 동원을 피해 독일로 도망친 러시아 학생의 목소리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속살을 들려주었다.
“제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이고, 아버지는 러시아인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우크라이나에서 보냈습니다. 사촌들이 거기에 살고 있죠. 어떻게 그들을 쏘겠어요? 우리는 함께 우크라이나 노래를 불렀고, 동화를 읽고,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만두를 함께 먹었어요. 전쟁이 일어난 후 아버지께 징집을 피해 러시아를 떠난다고 고백했더니 아버지는‘싸워야 하는데 도망이라니, 너는 배신자야!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야’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반역자입니다.”
마치 남과 북 형제들이 총부리를 맞댄 한국전쟁의 실상을 고스란히 증언하는 기시감마저 들었는지 여기저기 들려오는 탄식이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이제는 일상이 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폭격으로 하루아침에 집과 삶의 터전을 잃고 울부짖는 그들의 모습이 SNS에서 급속도로 퍼지는 중이었다. 아이와 여성들이 참혹하게 죽고 시신이 유린 되는 사진과 영상이 여과 없이 쏟아졌고, 그 트라우마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었다.
작가는 곧이어 돈을 받고 전쟁에 투입된 러시아 군인의 목소리도 들려주었다.
“거짓말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많은 돈을 약속받았고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아내와 두 아이가 있는 저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계약과 동시에 20만 루블을 받았습니다. 두 달간 전장에 있었는데 아내에게 모피코트를 사주었고, 아내는 친구들에게 자랑했습니다. 아내에게 금반지도 사주었습니다. 물론 두려웠어요. 제 친구가 폭격에 찢겨 조각난 채 나무에 걸려 있는 것을 처음 보았던 그날, 저는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정복자처럼 굴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의 집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가져갔습니다. 냉장고, 세탁기, 전기 주전자. 한번은 아내가 전화해서 딸아이가 내년에 학교에 가야 하니 노트북을 가져오라는 겁니다. 그래서 노트북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어깨를 다쳐 제대했습니다. 저는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전장에 가라 했고, 저는 갔습니다.”
나는 작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얼마 전에 지인이 보내온 유튜브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선에서 숨진 채 뒹구는 군인들의 참혹한 시체가 담긴 장면이었다. 값싼 가죽 부츠를 신고 웅크린 채 죽은 군인 시체 곁에 떨어진 파란색 리본(우크라이나군이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밴드 컬러)이 오랫동안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들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크라이나군 3만 명, 러시아군 5만 명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지만 저마다 축소 혹 은 과장되었다고 우기는 모양이었다. 러시아 군인의 시체 밑에 지뢰를 설치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포로를 잔인하게 참수하는 장면과 피해자의 비명이 고스란히 담긴 SNS가 떠돌았다. 서방의 전문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국전쟁을 닮아가는 중이라고도했다. 1129일 전쟁 동안 군인 사망자 약 100만 명, 민간인 사망자 100만 명 합계 약 200만 명의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을 닮아가는 중이라니….
나뿐만 아니라 2세션 주제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모두 질린 듯한 얼굴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제3차 세계전쟁을 목전에 둔 것 같은 암울한 기운이 감돌았고, 깊은 숨소리만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강연과 발제가 모두 끝나고 장내 정리를 한 후 이 자리에서 저녁 식사를 한다는 사회자의 말을 들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또다시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
행사장 주변은 시커먼 어둠에 잠겼고 바람은 더욱 거칠어지고 있어다. 나는 천천히 행사장 밖 보도블록을 따라 걸었다. 야경을 찍으려는 것인지 카메라를 손에 든 서너 명의 사람이 밝은 조명이 흘러나오는 행 사장 주변을 맴돌았다. 보도블록이 끝나는 곳에 조그만 웅덩이가 보였다. 연꽃을 비롯한 수상식물을 키우는 곳 같은데 가을 가뭄 때문인지 물이 메마른 곳에 핀 갈대 몇 무더기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들은 전쟁과 죽음의 이야기 탓인지 그곳이 어쩐지 파헤치다 만 무덤처럼 느껴졌다. 나는 갑자기 쫓기듯이 핸드폰 카톡방을 열었다. 이곳저곳 단톡방에 올라온 글이 제법 보였지만 나는 동이의 카톡부터 찾았다. 그사이 새로운 카톡이 도착해 있었다.
‘폭발물제거부대로 갈 수도 있음. 어떤 곳이든 임무에 최선을 다하겠 음. 충성! ’
폭발물제거라는 단어를 보자 내 가슴에 철커덕 수갑 채우는 금속성 소음이 박혔다. 근처 나무에 앉았던 까마귀 한 마리가 까악까악 울며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폭발물제거라는 것이 흔히 말하는 지뢰 제거를 뜻하는 모양인데, 유해발굴단만큼이나 엉뚱한 느낌이었다. 동이에게 다시 문자를 보내나 어쩌나 망설이는 사이 머리에서 발목지뢰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밟아서 폭발하면 발목 절단 수술을 해야 생명을 건질 수 있다는 발목지뢰에 관한 사건은 잊을만하면 뉴스에서 언급하곤 했다.
동이는 공군 지원을 희망하면서 1종 운전면허를 먼저 땄다. 공군에 입대하는데 운전면허증이 왜 필요하냐는 내 물음에 공군 운전병이 그나마 편한 보직이라고 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했더니 친구들과 군대 관련 사이트에 들어가 자세하게 알아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군에 지원한 동이는 신체검사에 걸려 징집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곧장 육군에 지원했고 운전면허증이 있으니 수송부대에 가지 않을까 내심 예상했었다. 폭발물이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나는 손이 떨리고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훈련소에 아는 사람을 소개해 줄 테니 통화하면 동이의 자대배치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선배의 말을 거절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맡은 임무에 충실하라고 동이에게 보낸 문자가 터무니없는 위선 같았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몰라 웅덩이 앞에서 마냥 서 있다가 행사장으로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자리 정리를 한 탓인지 내가 앉았던 원탁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나는 바닥에 버려진 듯이 내동댕이쳐진 내 가방과 자료집을 들고 어디에 앉아야 하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윤이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동년배인 그가 나를 생각해 자리를 만들어 둔 모양이었다. 윤이 앉은 자리에는 국내외 작가와 평론가, 교수 10여 명이 둘러앉아서 음식이 담긴 접시를 앞에 두고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접시에 몇 가지 음식을 담아 자리에 앉은 내가 건배용 와인으로 입안의 껄끄러움을 씻겨내고 있을 때 옆자리의 윤이 지나가듯이 말했다.
“사망한 해병대원 사건 파장이 만만찮은 모양이네.”
그 이야기를 하던 모양이었다. 지난 7월, 폭우로 피해당한 마을에 대민지원을 나와 실종자 수색 중이던 해병대원이 급류에 휩쓸려 실종되었다가 14시간 만에 사망한 채 발견된 사고가 수사 과정에서의 외압논란으로 번지고 있었다. 동이가 입대한 후에 일어난 일이라 그런지 나도 모르게 계속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얼마 전에 아들 입대했다고 했었지? ”
“신병 훈련 끝내고 자대배치 받아 갈 모양이야.”
“세월 참 빠르구먼. 어디로 간데? ”
“글쎄….”
나는 말끝을 얼버무리며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을 입안 가득 욱여넣었다. 어쩐지 유해발굴단이니 폭발물제거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빠져나오지를 않았다. 전쟁과 살육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이곳에서 동이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내 심사를 알아챘는지 윤도 더 묻지를 않고 빈 잔에 맥주를 채웠다. 나는 꾸역꾸역 음식을 입안에 넣고 씹으며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감정을 공유하는 친밀함 속에서 고독의 기분이랄까? 이상하게 뭐라 쏘옥 집어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어 두려웠다. 세계 각국에서 온 시인 소설가들이 마주 앉아 전쟁의 부당함에 목소리를 높이는 분단의 땅에서 국민의 의무를 위해 군에 간 아들의 자대 배치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내 모습이 혹시 배신의 몸짓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며 이상한 무기력이 나를 눌렀다. 나는 거푸 맥주를 들이켰고, 윤은 말없이 잔을 채워주었다. 그런 나와 윤을 흘끔흘끔 쳐다보던 교수이자 평론가로 꽤 알려진 강 교수가 잠깐 대화가 끊어진 틈을 재빠르게 파고들었다.
“출발 당시 챙긴 복장 때문에 간부들과 병사들은 단순 대민 지원인 줄 알았는데 다음 날 새벽 상부에서 물에 들어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간부들이 직접 들어가 보니 물이 깊은 것을 알고 안전 수칙에 장화를 신고 물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니 물가에 가면 전투화를 신어야 한다고 변경 요청하지만 묵살되었다던데, 결국 그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어요.”
“강 교수는 어떻게 그리 잘 압니까? ”
강 교수 옆에 앉은 굵은 뿔테안경을 쓴 젊은 작가가 물었다.
“우리 둘째가 군대에 가 있어요. 곧 제대하지만 여간 신경 쓰이지 않는다니까요? 요즘 제 일과가 아들 군대 보낸 부모방 카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처 모르는 정보가 쫙 깔렸어요.”
나는 그제야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들이 만든 카페가 인터넷 공간에서 성행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 교수는 그동안 군대에 아들을 보낸 엄마 처지에서 알게 된 해병대원 관련 보따리를 부지런히 풀었다.
“그 동네 사람들이 내성천은 모래 강이라 그렇게 들어가면 위험할 거 같아 계속 지켜봤는데, 느닷없이 간부가 뛰어와 119에 신고해달라고 하더라는 겁니다. 그가 보기에는 그곳 바닥이 계곡처럼 갑자기 3미터씩 빠지는 곳이고, 그 아래가 뻘이어서 강가에서 도보 수색을 해야 했는데 왜 위험하게 가운데까지 들어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는 거니 다. 구명조끼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이전에 위험천만한 구역에 장병들을 억지로 밀어 넣는 바람에 이런 사고가 생겨버린 거예요.”
강 교수는 목이 마른 듯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젊은 작가가 한마디 거들었다.
“젊은 군인의 희생은 물론 안타깝지만 중요한 쟁점은 수사 외압이 있었는지와, 있었다면 그런 지시를 한 인물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입 니다.”
젊은 시인의 말에 강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조심조심 술잔을 비웠다. 그때 술 대신 물만 마시던 나이 지긋한 출판사 대표가 쥐어짜듯이 뱉었다.
“해병 수사단장이 국방부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게 문제지….” “외압이 들어왔는데 그럼, 그냥 따라야 합니까? ”
강 교수가 힐난하듯이 대꾸하자 출판사 대표는 흥분으로 붉어진 얼굴을 바투 쳐들었다.
“외국에서 온 작가들 이야기 못 들었어요? 전쟁하는 군인은 명령에 복종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우리가 전쟁 중입니까? ”
“그래도, 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 해, 복종….”
“새파랗게 젊은 군인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무슨 그런 소리를 하세요.” 강 교수가 마치 제 자식이 죽은 듯 강팔라진 얼굴로 대들자 핏대가 불거진 출판사 대표도 덧대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로 완벽하게 빙의한 강 교수의 시퍼런 서슬을 본 윤이 해외 작가들도 있는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자며 달래고 나섰다. 그때 우리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키가 큰 아프리카 시인이 술잔을 든 채 일어났다. 곁에 앉은 통역자가 시를 낭송하고 싶어 한다는 시인의 의사를 일행에게 전달하자 여기저기서 좋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인의 시 낭송이 막 시작될 즈음 기다렸다는 듯이 진동음이 울리는 핸드폰을 잡아챈 나는 얼른 카톡방을 열었다.
‘특수기동지원여단 112….’
갑작스레 끊긴 듯한 카톡 글을 한참 들여다보던 나는 그때부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추위를 느꼈고 어떤 짙은 그림자에 싸인 느낌이었다. ‘죽을 듯한 진흙의 땅을’부르짖는 시인의 목소리도 갑자기 막중한 무게에 깔려 신음하는 것 같았고, 나 역시 그 무게에 짓눌려 자꾸만 옆으로 쓰러질 듯하고, 머릿속에는‘특수기동지원여단 112…’에 관한 궁금증만 증폭되었다. 그러면서 추위가 나를 완전히 잡아먹고, 모든 시간이 멈추어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나는 머릿속을 온통 점령한 그것을 붙잡으려고 허우적거렸다. 나는 멀어지고 있었다. 파주의 밤을 수놓은 수많은 목소리와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발목지뢰에 잘려 나간 발목이 허공에서 행군하는 장면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되풀이했다. 발굴된 유해 조각들이 피와 눈물을 흘리며 행군하는 장면이 화면처럼 떠올랐다가 구겨지면서 내 머릿속은 하얀 금 같은 것이 죽죽 그어졌다.
“어지간히 먹었으면 이제 일어납시다. 오늘 마지막 일정을 보러 가야죠.”
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저녁 만찬을 마친 일행이 오늘 행사 마지막 순서인 생명 기원퍼포먼스 굿을 보러 행사장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나는“그래 해야지, 이 땅 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200만 명이라는 데…”라고 취한 듯이 중얼거리면서 일행 사이에 섞였지만 이내 걸음 속도를 줄이다가 슬쩍 뒤로 빠져나왔다. 나는 저만치 멀어져가는 일행을 보며 기자들이 기사를 송고하던 책상 앞에 주저앉았다. 때마침 아무도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 카톡방을 열어 조금 전에 봤던‘특수기동지원여단 112…’, 문자를 자꾸 곱씹는 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그럼 나 는 이제 무엇을 할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강박관념이 나를 옥죄었다. 나는 머리를 좌우로 크게 흔들며 핸드폰 검색 사이트를 열어‘특수기동지원여단 112’라고 적었다. 예상과 달리 검색 결과는 금방 눈앞에 나타났다.
‘특수기동지원여단은 대한민국육군 지상작전사령부 직할 공병여단이다. 112공병대는 지뢰제거 전담부대로 비무장지대 내 화살머리고지 와 유해발굴 작업 현장과 후방지역 방공기지 등에서 지뢰제거작전을 수행 중이며 국내 최초로 무인 원격화 지뢰제거 장비를 도입하였다.’
내 눈앞에‘지뢰제거전담부대’라는 글자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지금도 DMZ 어딘가에서 동이가 복무할지도 모를 부대 선임 대원들이 지뢰제거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이트 구석구석을 훑으며 특수기동지원여단 112공병대에 관한 글을 찾아서 읽던 나는‘만일 통일이 된다면 비무장지대네 지뢰제거를 하게 되는 부대입니다’라는 문장을 되풀이해 읽고 또 읽었다.
잠시 후 핸드폰 검색창에 다른 검색어를 치려던 나는 움찔 놀라서 재 바르게 주위를 훑었다. 강 교수가 많은 정보를 얻었다는‘아들 군대 보낸 부모방’이라는 곳에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 앞섰지만 어쩐지 지금 여기선 그래서 안 된다는 알량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알량한 생각… 평생 그것에 짓눌려 애면글면 살아왔나 싶어, 나는 가늘게 떨리는 손끝에 힘을 잔뜩 넣어 검색어를 입력하려고 애썼지만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순간 나는 파주에 온 것이 후회되었다. 파주가 아니고, 이 시간이 아니었으면 나는 거리낌 없이 필요한 정보를 비롯해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 심정을 조금이나마 공유했을텐데 싶으면서 어쩐지 억울하기까지 했다. 종잡을 수 없는 마음으로 갈등하던 나는 겨우 검색창을 닫고 생명기원 퍼포먼스가 열리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생명기원 퍼포먼스 행사는 이미 끝나고 촛불도 꺼진 상태였다. 도로와 인도 구분 없이 비추고 있는 가로등에서 흘 러나오는 희뿌연 빛 아래를 걸어서 숙소를 향해 가는 사람들 행렬이 어쩌면 죽은 자들의 행렬 같다고 느끼면서 나는 사전에 공지받은 숙소로 찾아갔다. 윤이 숙소 입구 오른쪽에 있는 흡연실에서 일행 두어 명과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입구에 검은 칠을 한 커다란 문이 달린 건물 속 소는 1인 1실이었다. 계단을 걸어 같이 올라온 윤이 맞은편 방으로 들어가며 잠시 후 맥주 한잔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삼십 분 후 로비에서 만나기로 하고 숙소에 들어왔다. 예술성을 강조한 외관과는 달리 실내는 출장을 온 비즈니스맨들이 혼자서 하룻밤을 지내기에 맞춤했다. 나는 꽉 닫힌 창문을 활짝 열었다. 3층이어서 서 그나마 시야가 좀 트였고 멀리 하늘의 별이 희미하게나마 빛나고 있었다.
나는 별을 보며 동이를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쯤 전역 때까지 생활해야 할 부대에 도착해 잔뜩 긴장한 채 짐을 풀고 잠자리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제야 나는 어느새 군인이 된 동이와 온전하게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내 머릿속 동이는 늘 다섯 살에 머물러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대했던 대학입시 점수가 나오지 않자 군대에 가겠다는 동이를 데리고 백담사에 올랐던 날이었다. 동이는 밖보다는 안을 좋아하는 비활동적인 성격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이런저런 캠프에 보냈지만 거의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짐을 싸 들고 돌아오고는 했다. 왜냐고 물으면 그냥 친구들과 있는 게 어색하고 적응이 안 되면서 숨쉬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런 동이가 재수를 해보기도 전에 군대부터 가겠다 고 하니, 그 이유라도 듣고 싶어 백담사에 갈래? 하자 의외로 순순히 따라나섰다.
완연하게 푸르른 봄이 점령한 백담 계곡을 걸어 내려오면서 나와 동 이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말수가 적고 묻는 말에만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동이는 그렇다고 쳐도, 나도 평소 말이 많지 않아 맹숭맹숭하게 주변 경치를 배경으로 사진 몇 장 찍으며 물이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계곡을 걸었다. 거의 중간쯤 와서 쉼터 의자에 잠깐 앉았을 때 전투용 비행기가 푸른 하늘을 쪼개며 빠르게 날아갔다. 비행기를 쳐다보던 동 이가 건너편 수목이 우거진 산등성이로 눈길을 돌리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웃 나라는 전쟁 중이라는데… 우리나라는 모병제가 될까….” “글쎄….”
나는 모병제라는 단어에 당황해하면서도, 대답이 궁해서 얼버무렸다. 동이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면서 덧붙였다.
“군대부터 갔다 오면 재수하는 데 편할 것 같아서….”
동이는 내가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이, 그래서 통보하듯이 말하고 겅중겅중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날 우리가 계곡에서 나눈 이야기는 그것이 전부였다.침대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우선 씻어야겠다 싶어 시원한 물로 샤워를 했지만 좀처럼 정신이 맑아지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에서 어린 동이의 사진을 찾아 들여다보았다.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다섯 살 동이의 사진은 파주에서 찍은 것이었다. 걷는 게 힘들다며 얼굴을 온통 찡그리면서도 입에 문 아이스크림을 흘리지 않고 탐욕스럽게 핥아먹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옆을 지나던 사진작가가 찍어 보내준 것이었다. 양해도 구하지 않고 동이의 모습을 몇 컷 찍은 사진작가는 아래위 모두 해병대 전투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그가 내게 명함이 있으면 달라고 해서 주었더니 이틀인가 있다가 그 사진을 보내왔었다.
오랫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던 나는 다시 카톡방을 열고 오늘 동이가 보낸 카톡을 마치 원고 교정 보듯이 꼼꼼하게 읽었다. ‘훈련 마치고 유해 발굴부대로 갈 듯’, ‘폭발물제거부대로 갈 수도 있음. 어떤 곳이든 임무에 최선을 다하겠음. 충성! ’, ‘특수기동지원여단 112…’. 그러면서 나는 동이의 하루를 생각하고, 나의 하루도 생각해 보았다.
문자를 골똘히 들여다보던 나는 지금 이곳이 DMZ가 멀지 않은 파주라는 사실을, 지금 우리는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 휴전 중이라는 사실을, 이 모든 사실을 지금에야 안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떠밀리듯이 인터넷 검색창으로 들어간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들 군대 보낸 부모방 이라고 입력하기 시작했다. 파주의 시간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팔레스타인, 베트남, 벨라루스에서 온 작가의 말은‘평화문학축전 자료집’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