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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까머리 때의 항심과 21세기 공존의 꿈

한국문인협회 로고 장재선

책 제목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1월 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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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런 거 쓰면 안 된다.”
윤리 교사가 나에게 나지막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 고교 2학년 때였다. 그때 동료 학생들이 수학여행 떠났는데, 나는 가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으나, 대세에 따르지 않는다는 사춘기 항심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아이들이 없는 교실에 혼자 등교한 나는 칠판에 무언가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쓴 것 중 하나가‘용비어천가를 외며’라는 제목의 시조이다. 용비어천가 중‘고성(古聖)이동부(同符)하시니’등의 구절이 중국에 사대한 것이라고 보고, 당시 군사정권이 자신들의 집권을 미국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윤리교사가 우연히 복도를 지나가다가 그걸 본 것이다.
그 1년 전인 1학년 봄에 나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학교와 하숙집을 오가는 등하굣길에 매일 눈물을 뿌렸다. ‘불효부모 사후회(不孝父母 死 後悔)’를 절감하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썼다.
그런 1년이 지난 후 2학년 때부터는 학과 공부에 신경을 써서 반에서 수위를 차지했다. 그만큼 겉으론 모범생이었는데, 속으론 저항감이 가득한 청춘이었다. 하숙집의 대학생들로부터 군사정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내 시 노트엔‘시대의 어둠’이 스며 있었다. 물론 정치적 인식이 깊어서가 아니라 질풍노도 시기의 항심이 커서였다.
그 시절에 고전과 국어를 맡았던 선생님은 내 글쓰기를 격려하셨다. 선생님은 교지를 만들 때 나에게 학생들이 쓴 글을 뽑도록 했다. 내 안목을 인정한 셈이다. 나는 선생님의 권유로 교지에 시와 콩트(짧은 소설)를 함께 실었는데, 시엔 한글로, 소설엔 한자로 이름을 표기했던 기억이었다.
그 즈음에 나는‘당사자(當事者)’라는 제목으로 단편소설을 써서 신문사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당선을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탈락한 것에 대한 상심 탓인지 그다음부터는 단 한 번도 신춘문예에 투고하지 않았다.
고3 때 나는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대입에만 몰두하는 학교 교육에 대한 염증을 핑계로 성적 관리를 소홀히 했다. 졸업 무렵엔 동료 학생들에게 설문지를 돌려서 “문예반을 없앤 학교가 잘못했다”라 는 결과를 얻어냈다. 그 설문 결과지를 교장에게 직접 전해서 담임교사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대학을 정치외교학과로 진학한 것이다. 고교 때 즐겨 읽은 시집『태양의 돌』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가 외교관이었기 때문이다. 더 큰 이유는 출세욕이었다.  외무고시 등에 합격하면 대입 때 입었던 자존심 하락을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대학에 들어가니 단 하루도 최루탄이 터지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런 싸움터에서 출세를 지향하는 공부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어정쩡하게 고시 관련 책을 끼고 살았으나 공부가 될 리 없었다. 그러다가 민족 사상과 전통 수련을 접하게 됐다. 천부경, 한단고기, 영가무도, 단전호흡 등이 그 세목이다.
그 와중에 문학책을 즐겨 읽었고, 소설평과 콩트를 대학신문에 싣기도 했다. 대학 잡지엔 윤동주 시에 관한 논문을 게재했다. 아버지에 대해 쓴 산문이 전국대학생기독교문학상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문학가보다는 사상가를 꿈꿨다. 재야 역사, 동양철학, 생명사상 등에 심취하고 관련 동아리 활동을 했다. 중용을 지키는 사람이 되라는 뜻의‘중헌(中軒)’이라는 호를 이때 얻었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다. 대학을 졸업한 후 당시 언론고시라고 불렸던 시험을 쳐서 신문사에 취직했다. 그 후 사상가와는 먼 길을 걷게 됐다. 현실의 잡사를 매일 다루며 자신의 꿈이 뭐였는지 잊었다. 그러면서도 문학작품을 읽고 간간이 소설 습작을 끄적거렸다. 이런저런 자리에서 행사용으로 시문을 써서 읽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인이 되기 위한 등단 과정에 신경 쓰지 않았다. 신문사에서 문학 담당을 할 때도 공식 취재 이외에 문학인 모임에는 나가지 않았다. 심판이 주전 선수로 뛰겠다는 격으로 여겨져서 스스로 저어했던 것이다.
그래도 문학인에 대한 열망을 잠재우지 못했던지 30대 초입에 처음으로 단편소설「긴 호흡의 노래」를 문예지에 발표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작품이 민족 사상과 전통 수련을 공부한 바탕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현재 초고 상태로 있는 장편소설「이로운 사랑」도 그렇다.
시집『기울지 않는 길』도 어쩌면 같은 맥락에 있는지 모르겠다. 제목에 드러나듯 이 시집의 큰 주제는 공존이다. “세상의 모든 말들과 말사 이의 불통을 잊고/ 우리는 여기서/ 노래하고 춤추자”(졸시「사마르칸트 음악제에서」부분).
공존은 한국 전통 사상의 고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시 언어에 녹여내려고 했다.
이 시집엔 어머니, 아버지를 일찍 잃은 자의 비탄도 담겨 있다. 동시에 현재 내 곁에 함께 하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다. 비탄과 사랑이 내 시집에 함께 흐른다.
이보다 먼저 나온 시·산문집『시로 만난 별들』은 이른바 문학성과 대중성의 조화를 꿈꾼 책이다. 한국 현대 대중문화사에서 빛나는 인물들에 관해 운문으로 쓰고 산문으로 풀어냈다. 고 최은희, 최불암 선생부터 걸그룹‘소녀시대’까지 내가 만난 스타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대중문화와 순수문화를 접목한 시도라고나 할까.
이 작업은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다. 서울지하철 승강장에 게재하는 시「전국노래자랑 송해」도 그중 하나이다.
요즘 나는 문명 전환 시대의 지구 곳곳을 시 쓰는 자의 시선으로 들 여다보고 있다. 내 글 속에서 동양과 서양 정신의 융합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길 바란다.
또 하나, 21세기를 사는 한국인의 일상을 담아내되 그걸 종교, 철학의 깊이와 넓이로까지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런 내용을 지루하지 않게 펼쳐내기 위해선 익살, 유머의 형식을 많이 빌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정보사회로 들어선 후 폭압적 권력의 내용과 형식도 바뀌고 있다. 그걸 예민하게 포착해서 저항하는 것이 시 쓰는 자가 할 일이다. 그래서 나는 까까머리 고교생 때 시에 담았던 항심을 요즘에도 자주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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