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1월 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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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쩍 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어디서든 책보다는 스마트폰을 이용한 읽을거리 볼거리들이 많이 늘어난 탓이기도 하지만, 일반 대중들은 문학의 난해함을 먼저 말한다.
난해함은 소설보다는 시에서 두드러진다고 말한다. 특히나 요즘 일부 젊은 시인들의 시는 정말이지‘난 해’하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시가 언제 그렇게 우리에게 친근했던 적이 있었던가?
시는‘낯설게 하기’가 생명이다. 이미 익숙해진 시는 흘러간 유행가처럼 생명력이 없다. 시창작 강의에서 들은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좀 과장되게 말하면 「진달래꽃」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도 그렇게 쓰면? ”
문학은 울림이 있어야 한다. 한 편의 시 수필 또는 소설을 읽고 난 뒤에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는 여운, 그 울림 때문에 우리는 밤새 소설을 읽고, 서가에 쪼그리고 앉아 시집을 읽었다. 「목마와 숙녀」를읊조 리며 가을을 기다렸고, 어두운 밤 간이역에서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열차를 그리워하며 시인이 되기를 꿈꿨다. 「태백산맥」을 읽을 때는 사건의 전개보다도 각 장 서두에 나오던 그 서정 가득한 두 부서 발령을 필사하며 가슴이 울렁이던 기억, 독자들은 그런 기억 속의 작품을 찾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 익숙하므로.
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해? 하는 질문에, 그것을 왜 이해해? 그냥 느끼면 되지. 그림을 음악을 해석하고 이해해야만 음악과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야. 그림의 색조가 따뜻하게 느꼈다면 그런 것이고 음악이 고요하게 느껴지면 그런 거지, 왜 굳이 그것을 해석하고 그래야 해? 시도 읽어서 가슴이 뭉클하면 그런 것이고 아리송하면 그런 것이지.
나는 문예지나 시집을 구입하면 우선 슬렁슬렁 읽기 시작한다. 개중 아는 시인의 작품에는 좀 더 시간이 머문다 해도 그렇게 한 권의 시집 한 권의 문예지를 하루나 이틀에 걸쳐 읽는다. 그러다 보면 어떤 작품은 금세 가슴을 슬쩍 건드리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도대체 뭥미? 하기도 한다. 가슴을 건드린 작품은 페이지 위쪽을 접어두고 그렇지 않은 작품은 아래쪽을 접어둔다. 그러다 다시 읽으며 이해하는 수준으로 가면 접은 부분을 펴 놓는다. 그런데 아주 자주 시인 혼자만 아는 세계 또는 사건(?)에 너무 몰입해 아무리 뜯고 씹고 맛보아도 객관성이 없는 작품을 만나면 난감하다. 나는 서정성이 강한 작품을 좋아한다. 서정성 강하면서 이미지가 명징한 시, 그러면서 서사가 뚜렷한 시, 그러면서 늘 낯선 시, 목에 힘 잔뜩 들어간 시, 아직도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부르는 시, 기어이 훈계를 늘어놓는 꼰대들의 시는, 수필은 그냥 넣어두세요다.
난해한 시의 으뜸은「烏瞰圖」를 꼽아도 이의가 없으리라. 우스갯소리로 문학박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한 편의 시라는 말이 그리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그러고 보면 난해한 시가 그렇게 구박받고 욕을 먹어야 하는 것만은 아닌가 보다. 그 역시 우리 현대시의 지평을 넓히고, 풍부하게 하고 있으니.
시는 늘 낯설고 새침합니다. 독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