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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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인천 장정이라고 불렸다. 논산에서 기초훈련을 마치기 전까지 이등병 계급장도 없는 20대 초반의 남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자대에 배치되면서 우리는 뺀질이 기수로 바뀌어 불렸다. 평균 신장 180센티미터 내외의, 수도권에서 대학에 다니다가 입대한, 이른바 조상님과 부모를 잘 만나 큰 고생 없이 살아온 인생들일 거라는 선입관을 담아, 몇몇 선임들이 한 번 비틀어 부르는 호칭이었다. 그들은 신체조건 외에는 우리가 자라온 환경과 닮은 곳이 거의 없었다. 농어촌이나 지방 소도시에서 꼴을 베거나 가축 인공수정, 그물질 등, 진짜 어른으로 살다가 온 경우가 대다수였다. 의장대의 첫 번째 조건은 우선 키가 커야 한다는 것이다. 임무는 큰 부대 단위에서 각종 행사에 동원되어 일사불란하고 멋진 동작을 선보이는 장식품 같은 것이다. 그러니 훈련이라야 줄 맞춰서 걷고, 총 돌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평상시는 부대 경비나 연병장 잔디유지보수가 전부였다. 하지만 진짜 군대는 일과가 끝나는 저녁식사 때부터 시작되었다. 날이 저물면 잠시 숨어있던 겁들이 기어 나오고, 고통은 뼈마디마다 새겨지며, 두려움은 꿈속까지 찾아들었다. 내 친구도 거기에 함께 있었다.
“아니, 아니, 이건 아니다.”
그의 마지막 목소리가 영상통화 화상이 끊어지면서 멀어져 갔다. 할 말 있다면서 잘 들으라고 낮은 음성으로 전화했던 때부터 이제 막 3개월이 지났을 뿐이다. 떨고 있었다. 구타와 얼차려와 같은 의미인 ‘뺀질이 동기 집합’을 당한 후에, 잠든 막사 보일러실에서 몰래 속삭였던 그토록 슬픈 추억이 좀비처럼 되살아났다. 중환자실이라 가족도 하루 한차례 잠깐만 허용되니 면회는 어려웠다. 게다가 친구는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싫어했다. 그러다가 그의 곁에 있던 아내와 통화 중에 친구가 나를 한번 보고 싶다면서 영상통화를 원했다. 친구는 채 5초도 안 되어 영상을 껐다. 사진으로 본 적 있는 고등학교 때 승마하던 모습이나, 군에서 화려한 견장을 단 의장 행사복을 모델처럼 소화하던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45킬로그램의 몸무게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말기 암 환자였다. 잘 들으라며 3기라는 전화를 받은 지 백일도 안 된 시점이었다.
어쩌면 그 시기, 1980년대 초, 군대는 조직부터 구성원까지 전체가 환자였는지도 모르겠다. 사회는 사회대로 아픔과 격변을 겪고 있었다. 그는 사내다웠고, 똑똑했고, 게다가 리더십도 갖추었다. 자연스럽게 동기 중에서 차기 내무반장 요원으로 발탁되어, 교육 수료 후, 하사 계급장을 달고 돌아왔다. 군대는 바뀐 것이 없었다 핍박받던 며느리 대부분이 다시 그런 시어머니가 되는 것처럼. 내무반의 악행은 그대로 대물림되었다. 친구는 그 부조리와 불행의 중심에 있었다.
병장 마지막 휴가의 첫 방문지는 당시 남한산성 부근에 있던 육군형무소였다. 그는 계급장과 초점 없이 먼 산 보는 듯한 눈동자로 나를 맞았다. 친구는 병역 만기를 코앞에 두고 후임병에 대한 가혹행위로 군사
재판 후 수감되었다. 한마디 나눌 때마다 배석한 헌병의 눈치를 봤다. 이것이 친구의 마지막 불운이며 아픔이기를 바랐었다.
출소 후, 작고한 부친의 사업체를 이어받은 친구는, 오래 알고 지내던 자기 회사 직원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나는 기꺼이 결혼식 사회를 봐줬고, 배우자들과 함께 동기 모임도 정례화됐다. 남자들끼리 친구 회사 근처 종로 뒷골목에서 자주 만났다. 전어구이나 홍어찜과 소주 한 잔의 자리들이 우리들의 지나간 아픈 흉터들을 씻어내는 중이라고 믿고 있었다. 친구의 음주, 흡연의 양과 횟수가 지나치다 싶게 늘어갔다. 늦은 밤 전화해서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했다며, 술과 담배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했다. 통화 중에 과거가 자주 송환되면서 고통도 되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친구에게는 참회와 사과의 뜻을, 동기들에게는 우리의 책임에 대하여 여러 번 얘기했다. 나는 아무도 구타하거나 괴롭히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선한 역할에 먼저 나섰고, 탈 없이 만기 제대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비겁했거나 기회주의자적인 태도일 수도 있었다. 동기 중에 누구라도 적극적으로 그 친구의 부조리한 행위를 막아서야만 했었다. 그랬더라면 친구는 남한산성에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내 일이 아니라고, 나는 직접 부조리를 행사하지 않았다면서, 우리만 평온한 내무생활을 즐긴 셈이 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가장 가까운 바다는 시화방조제가 시작되는 안산시 어느 모퉁이였다. 집에서 써 온 지방은 소주병으로 바닷바람을 눌러 놓았다. 한쪽이 가로막힌 바다를 향해 절을 올렸다. 친구의 이름이 적힌 한지가 불과 바람으로 높이 날아올랐다. 한동안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친구가 파도와 바람을 타고 이곳에도 잠시 들를 수 있기를 빌었다. 하루 전 친구의 아내로부터 문자가 왔었다.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말고, 친척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했어요. 해양 장이 허용되는 인천 앞바다에서 가족끼리만 장례를 치렀어요. 제가 유골을 조금 덜어서 남편이 늘 그리던 고향, 당진 한진항 앞바다에 보내 드렸어요.’
그리고 다음에 혹시 찾아갈 때, 참고하라면서 특정된 방파제와 바다가 실린 사진 몇 장을 첨부해 왔다.
친구는 오십 후반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상대적일 수도 있다고 아무리 양보해 봐도, 너무 이른 이별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단체대화방에서 소식을 전했다. 애도와 놀라움이 지나간 아픔과 겹치면서 혼란스러워했다. ‘누군가의 불행이 누군가의 행복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그때 알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지금 우리는 모두 함께 행복할 텐데’라는 취지의 짧은 글로 조사를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