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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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산책길에서 기다란 나뭇가지만 보여도 화들짝 놀라는 일이 잦아졌다. 날씨가 따뜻해지니 겨울잠 자던 뱀들이 따뜻한 햇볕을 쏘이려고 산책 나오는 일들이 많아졌는지 자주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바닥엔 지난가을 떨어진 마른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있어, 무심코 길을 걷다가 사르륵 소리가 나서 쳐다보면 마른 낙엽 위로 뱀이 기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면 순간적으로 놀라 몸이 얼어붙게 되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날 정도로 심장 이 두근거리면서 진정이 안 된다. 뱀 색깔도 마른 낙엽색이라 사르륵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라, ‘이쯤에서 산책을 그만둬야 하나’하는 갈등까지 하게 만 든다.
얼마 전에도 초록뱀을 보고는 기겁하여 나도 모르게‘야, 저리 가! ’라고 소리 지르고는 그만 심장이 떨리며 눈물까지 나왔다. 아주 가는 뱀이라 사르륵 소리는 안 들렸지만, 대신 초록색이라 갈색 낙엽 위로 기어가는 모습이 두드러져서 눈에 확 띈 것이다. 기다란 뱀을 보기 전에 도마뱀을 맞닥트릴 때만 해도, 나를 보고는 아주 짧은 다리로‘다리야 나 살려라’하고 꼬리를 흔들며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서‘그래도 쟤는 내가 무서워 도망을 가는구나’ 하며 약간은 귀엽다는 느낌까지 잠시 들었었다. 하지만 이젠 기다란 뱀을 보고 나니 공포 때문에 산책길이 두려워지며 바짝 긴장까지 하게 된 다. 그래서 방어용으로 스틱을 가지고 다니며 바닥 위 낙엽들을 두들겨 뱀이 비켜 가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스틱을 이용해 힘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느라 내가 땅을 두드리거나 나무를 치는 행 동을 보고는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나의 무서움을 견디려면 어쩔 수 없는 행동인지라 남의 눈치 볼 겨를이 없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엄마 무릎에 동전 크기만 한 큰 구멍이나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구멍이 왜 났는가를 물었는데 언제라고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여하튼 오래 전에 뱀에 물려서 그리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뱀에 물리면 그런 구멍이 생길 수도 있나 보다 하며 무심코 넘겼는데, 지금 생각하니 뱀에 물리는데 왜 그런 구멍이 생겼을까 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얼마나 심하게 물렸으면 상처 가 그리 깊었을까 생각하니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에는 진달래가 지고 잎이 나면서부터 영산홍과 철쭉이 앞다투어 피고 있다. 게다가 황매화까지 덩달아 노란색으로 물을 들이고 있으니 산책길이 여간 신나고 즐거운게 아니다. 황매화는 홑겹과 겹겹이 있다. 홑겹황매화는 꽃잎이 다섯 장으로 겹황매화에 비해 마치 코스모스 처럼 하늘거리는 것이 참으로 청초해 보인다. 그래서 홑겹황매화가 참 이쁘다고 생각을 했다.
반면 겹황매화는 꽃송이가 장미꽃처럼 겹겹이 나 있어 꽃만 보면 색만 같을 뿐, 황매화가 맞는가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홑겹황매화는 꽃 잎이 몇 장 안돼서인지 색바램이 유독 심해 보인다. 처음에는 청초해 보이는 모습이 좋아 홑겹황매화가 더 이뻐 보이더니 바랜 모습을 보고 나니 장미꽃을 닮은 겹황매화가 더 이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겹 황매화도 바래기는 마찬가지다. 어쨌든 영산홍이나 황매화나 활짝 핀 모습이 화려하기는 하지만 색이 바래버리는 단점을 가지고 있어 가는 세월은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영산홍이나 철쭉 외에도 산에는 한창 키 작은 보라색 각시붓꽃들도 피어 있어 눈을 즐겁게 만들어 준다. 여느 때와 달리 붓꽃이 이렇게나 이뻤나 싶을 정도로 마음을 빼앗기기 일쑤다.
한때는 꽃창포와 붓꽃이 똑같아 누가 꽃창포고 누가 붓꽃인지 헷갈리는 일이 잦았었다. 하지만 나는 꽃창포보다 붓꽃에 마음이 간다. 붓 꽃 중에서도 키다리 붓꽃보다는 키가 작고 아담한 각시붓꽃이 훨씬 매력적이란 생각이 든다.
들에는 각시붓꽃보다 훨씬 난쟁이인 제비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어 마음이 참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적에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냐 물으면 일관되게 보라색이라고 말하곤 했을 만큼 보라색을 참 좋아했었다. 그런데 커서는 보라색이 명을 단축하는 색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보라색을 좋아한다는 생각을 바꿨다. 하지만 나이가 든 지금도 보라색에 눈길이 가는 걸 보면 좋아하는 색을 억지로 바꾼 것이 아닌가 싶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좋아하는 꽃이나 색상도 바뀌게 되는데, 그것도 인지상정이지 싶다. 청초하면서도 매혹적인 백합을 미치도록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백합 향은 또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언젠가부터 백합을 멀리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가 개량 백합 때 문인 것 같다. 토종 백합은 향이 은은해서 향을 따라 고개가 절로 따라 가게 되는데. 개량 백합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향이 강하고 독하다. 이웃에서 개량 백합을 복도에서 키우고 있어서 그곳을 지나갈 때면 그 향이 너무 독해 숨을 참거나 코를 막고 후다닥 지나간다.
지금은 어느 수목원에서 보았던 가느다랗고 긴 목을 하늘거리며 하늘하늘 피어 있던 양귀비한테 홀딱 반해서 양귀비가 제일 좋아하는 꽃 이 되어 버렸다. 얼마나 이쁘던지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봤었다. 절세 미인 양귀비라더니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편적으로 나는 작은 꽃에 눈길이 가는데, 작은 꽃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무심하게 피어 있는 야생초를 관찰하게 되는데, 자세히 다가가서 보면 정말 작은 꽃이 얼마나 앙증맞고 이쁜지 모른다. 정말 사랑스럽다.
잎이 난초를 닮은 붓꽃을 보니 오래도록 연락이 끊긴 난초란 이름을 가진 친구가 생각이 난다. 딸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다는 푸념을 들은 뒤부터 연락이 끊겼는데, 어찌 지내는지 참 많이 보고 싶다.
‘무심한 친구 같으니라구! ’
지금이라도 연락을 해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계단을 내려오다 무심코 발밑에 떨어진 겹황매화가 눈에 들어온다. 납작해진 꽃을 보니 책갈피에 끼워 말리던 시절이 그리워서 한 장 한 장 주워들었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가서 에델바이스를 말려 액자로 만든 기념품을 샀던 기억도 솔솔 묻어 나온다. 에델바이스는 겨울에 피 는 꽃이라고 해서 여태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고산지대에서 잘 자라는 식물로, 겨울을 이기고 차가운 눈을 뚫고 나오는 여름철의 꽃이 라고 해서 놀랐다. 그런데 왜 한 번도 에델바이스를 본 적이 없을까?
이참에 장 구경을 가든지 아니면 인터넷 검색을 하든지 해서 나도 한 번 에델바이스를 키워 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