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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언덕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서현(미화)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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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너무 젊다. 수십 년 전, 당신이 즐겨 쓰던 중절모와 양복색도, 나를 안고 가던 솔잎보다 짙은 군복색도 바래지 않고 그대로 멈춰 있다. 나는 아버지도 다른 이의 아버지처럼 얼굴에 목단 꽃술 같은 주름을 남기며 늙어 가는 모습 이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육십이 넘은 나보다, 하나뿐인 당신 손주보다 젊은 서른 두살이다.
내 회상 전면엔 언덕 해지개에 서서 등 너머 석양을 가르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던 아버지 모습이다. 어린 나는 천둥 같은 목소리에 놀라고, 하늘 가득한 붉은빛이 무서워 엄마 품에서 자지러지게 울곤 했다. 일이 잘 풀릴 때는 마당 에 땔나무를 실은 우마가 들어오고, 전주시장에선 구경도 어려운 내 옷을 사 들고 왔으나, 술에 취해 언덕에서 나를 찾을 땐 뭔가 당신 뜻대로 되지 않을 때였다고 한다.
이런 아버지가 힘겨웠던 엄마는 서울 외가로 가버렸다. 네 살쯤이던 어느 날, 엄마를 찾아서 회색 양복을 입은 당신 품에 안긴 나는 내 안전선 밖인 그 언덕을 넘고 말았다. 그때부터 내 어린 시절 마디마디에 이별이란 옹이가 박힐 줄이야. 열일곱 나이가 되어 머릿속에 말뚝처럼 박힌 내가 태어난 동네 이름과 번지수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나는 혼자서 아버지의 언덕을 넘었다.
가난한 집안의 둘째로 태어난 아버지는 남다른 외모와 명석함을 지녔지만,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인 큰아버지와 달리 이상을 좇는 사람이 었다고 한다. 그날, 언덕을 넘어 서울에서 다시 만난 엄마와 아버지는 식당도 하고, 영등포에 있는 모 제과사에 근무한 기억도 있다. 하지만 그도 오래 가지 못했다.
불완전한 아버지 이상의 탈출구는 술과 도박이었다. 내가 좀 자랐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날부터 내 머리통보다 커다란 주전자를 들려주며 막걸리 심부름을 시켰다. 날마다 집안이 시끄럽더니 끝내는 엄마와 정 리를 하고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간 아버지는 삼 년 후, 내 나이 아홉 살에 위암으로 가셨다고.
당신의 삶을 들여다보기엔 내 추억은 짙고 기억은 짧다. 머릿속에 흩어진 편린을 모아보면 아버지 생은 소금쟁이를 닮았다. 물속으로 들어 가지도 못하고 맘껏 날 수도 없는, 수면과 대기의 틈새에서 세상을 향해 다리보다 짧은 날갯짓으로 비행을 꿈꿨을 아버지.
언젠가 내가 찾아오리라 믿었다던 친인척들은 정작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큰아버지는 혹여 내가 들을까 <번지 없는 주막>을 밤새 틀어 놓고 우셨다. 옆 방에서 나도 그 노래를 들으며 울음을 움켜쥐고 먹먹한 밤을 견뎌냈다. 아침상을 물린 큰아버지는 내가 태어나 살던 집과 뼈대만 남은 외가의 집터를 일일이 데리고 다니더니 방죽 둑에 앉아 내 손을 꼭 쥐며 말했다.
“기억은 못 하겠지만 네 고향이다.”
나는 내 머리와 가슴에, 푸른 멍울이 된 이야기를 풀어놨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기억하냐며 놀라던 큰아버지.
“네가 그래서 찾아올 수 있었구나. 그날 따라 노을이 짙은 언덕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게 네가 보고 싶었던 게야. 그때 내가 널 찾아 나서지 못한 게….”
후에 나를 찾아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구부린 큰아버지 어깨가 회한의 덩어리를 토해내며 한참을 일렁였다. 잔잔한 방죽물 위엔 늙은 나무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그림자 위엔 수많은 소금쟁이가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두 사람의 상념처럼 뱅뱅 돌았다.
큰아버지는 끝내 아버지를 모신 장소와 기일을 알려주지 않았다. 나를 보살피지 못한 미안함이 바위만큼 무거운데, 그 또한 내게 짐이라면서. 당신마저 돌아가시고 몇 년 후 집안의 제사를 다 모시는 사촌오빠한테 내 몫을 모셔 오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사 년 전, 아버지 기일을 알게 되어 그제야 그 이름 석 자를 내 집으로 모셔올 수 있었다. 그런데, 오십 년 만에 서른둘 짧은 생의 매듭을 풀어 버린 아버지 기일 상을 처음 차려드리는 그날, 그날은 내 아들, 하나뿐인 당신 손주의 서른두 번째 생일이었다. 시간의 우연은 당신 제사상에서, 손주 생일상으로 과거와 현재를 화해하게 했다.
내일이 네 번째 아버지 기일 상을 차리는 날이다. 
“아버지 내일은 옆에 계신 친구분들이랑 함께 오세요.”
대답 없는 당신은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어느 날은 바람으로, 어느 때는 지저귀는 새소리로, 때론 구름으로 다가와 유리창에 흩어지는 빗물로 나를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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