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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속의 꽃

한국문인협회 로고 정찬경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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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선생님과「인연」으로 첫 인연을 맺었다.
성심학원, 춘천, 소양강의 가을 풍경, 아사코와의 세 번의 만남, 스위트피, 목련, 연두색 우산이 떠오른다. 동화처럼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이 투명한 수채화처럼 그려진 글이었다.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던 이 글을 읽으며 수필이 이런 글이구나 생각했다. 수필은 그렇게 사람과의 인연을 묘사하고 자신의 느낌을 진솔하게 옮겨놓은 글인가 보다 했다. 이후 선생님의 이름과‘수필’이란 낱말은 하나가 되어 나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난 지금 일조각에서 펴낸『금아문선』을펼쳐들고있다. 한자로 된 皮千得 隨筆集, 琴兒文選이라는 표지 글자에 한참 눈이 머문다. 1980년에 처음 발행되었고 이 책은 1995년에 두 번째로 찍어낸 책들 중 하나다. 붉은색, 오렌지색, 흰색이 칠해졌고 가운데에 회색 소라 하나가 그려져 있다. 뒷표지에는 조가비 하나가 있다.
맨 앞장에 “엄마께”라고 쓰여 있다.
그 다음 장에는 희곡의 일부를 적어 놓았다.

깊고 깊은 바다 속에 너의 아빠 누워 있네
그의 뼈는 산호 되고 눈은 진주 되었네
-셰익스피어「태풍」1막 2장 에어리엘의 노래

이어서 신판을 내는 것에 대한 소회를 적어 놓았다. 원래『산호와 진 주』라는 책에 시와 수필이 함께 있었는데 수필만을 모았다 말한다. 그 리고 이어 말한다. “아름다움에서 오는 기쁨을 위해 글을 썼고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 발표했다. 이 글은 내게 어쩌다 오는 복된 시간의 열매 들이다.”
이어지는 서문에서 그는 산호와 진주 같은 글을 쓰고 싶었지만 해변의 조가비와 조약돌을 주워 모았을 뿐이라 한다. 그리 예쁘지 않은 아이에게 예쁜 이름을 지어주듯이 조약돌과 조가비를 ‘산호와 진주’라 부르는 것이라 한다.
첫글로「수필」이라는 수필을 만난다. 수필은 청자연적, 학이고 난이며 청초한 여인의 뒷모습. 오래 전에 읽었고 가끔은 다시 읽곤 했던 이 「수필」을 『금아문선』에서 다시 한 번 읽는다. ‘나는 수필가’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정독을 한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다가 자를 대고 붉은 줄을 그어본다. 손끝과 가슴이 가볍게 떨려온다. 위대한 작가가 친필로 써 보낸 편지를 받아 읽고 있는 기분이다.
선생님은 글「수필」에서 수필을 다면적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하기보단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 은 마음의 산책이며 그 속에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다. 수필의 색깔은 온아우미(溫雅優美)하고 비둘기빛이나 진주빛이다.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비단인데 이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써지는 것이다. 차로 비유하면 그 방향 (芳香)을 잃어서는 안된다. 수필은 독백이며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낸다. 그래서 독자에게 친밀감을 준다. 연꽃 모양의 청자연적의 꽃 잎 중 하나를 살짝 꼬부려 놓은 건 마음의 여유이며 이처럼 균형 속의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이다. 수필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내 안에서 차분히 가라앉으며 정리되는 느낌이다. 감사하다.
1910∼2007. 선생님은 지금 남양주 모란공원에 잠들어 있다. 무덤가에는 선생님의 시「너」가 새겨져 있다.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 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는 너

작고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떠오른다. 그 새는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산뜻한 빛깔과 맑은 지저귐으로 긴 여운을 남긴 채 어디론가 날아간다. 새는 깃털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지만 선생님은 우리에게 이토록 귀한 작품들을 남겨주고 갔다.
「오월」을 다시 읽어본다.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 하얀 손가락의 비취 가락지’가 오월이라 했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이라 했다. 「오월」 을 읽은 후 오월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고 했던 선생님은 그토록 좋아하던 그 오월 속으로 빠져나가 긴 여행을 떠났다.
생전의 어느 방송 인터뷰에서‘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글로 표현하고 그걸 나누는 걸 평생의 기쁨으로 알고 살았다’했다. “나의시는자연 의 아름다운 것,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아름다운 것, 이것을 추구하는 것이 내 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늘에 별을 쳐다볼 때 내세가 있었으면 해보기도 한다.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살아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해본다. 그리고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 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
작품「만년(晩年)」의 인상 깊은 구절이다. 사랑을 하고 간 사람…. 잔잔한 감동과 온기가 밀려온다. 글과 문학, 수필과 시, 이 세상과 사람과 자연만물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온전히 사랑하다 가신 선생님….
문학은 금싸라기를 고르듯이 선택된 생활 경험의 표현이며 문학의 본질은 언제나 정(情)이라〔작품「순례(巡禮)」중〕말한 피천득 선생님! 그는 우리들의 마음속 아늑한 정원에 피어 있는 스위트피며 목련이자 백합이다. ‘아사코’라는 꽃은 세월이 흘러 시들고 말았지만 ‘금아 피천 득’이라는 우리 마음 속의 꽃은 결코 시들지 않으리라. 고아하고 청초한 이 꽃은 오히려 그윽한 향기를 온 누리에 은은하게 퍼뜨릴 것이다. 바라보는 이들의 가슴을 언제나 따스하고 촉촉하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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