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파랑 달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민정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조회수36

좋아요0

“먼저 훌라후프로 몸부터 풀어볼까?”
새벽마다 운동하러 오는 할머니들이에요. 분홍 스웨터를 입은 분홍 할머니가 여느 때처럼 나를 집어 들었어요. 그래요. 나는 훌라후프예요. 이름은 파랑이고요. 여기는 도시 속 작은 운동장이에요. 중앙에는 잔디가 깔린 축구장이 있고 그 둘레에서는 트랙을 따라 달리기를 하거나 걷기 운동을 할 수 있어요. 나는 운동장 가장자리에 서 있는 느티나무 그늘에서 지내고 있어요. 느티나무 둥치에 기대어 있다가 새벽에 할머니들이 오면 할머니들에게 매달려 빙글빙글 춤을 추지요.
여기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벌써 싫증이 났어요. 날씨도 너무 덥고요. 어제도 빙글빙글 오늘도 빙글빙글 내일도 빙글빙글이겠죠. 좀 더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 없을까요? 조금 전 분홍 할머니가 잔소리를 하고 갔어요.
“어휴, 이 훌라후프가 오늘은 왜 이래!”
내가 심술을 부려서 자꾸 땅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졌거든요. 날 깨끗이 닦아주고 예뻐해주는 할머니에게는 죄송하지만요. 지겨워서 자꾸 짜증이 나는 걸 어떡해요.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아요. 달님이 너무 밝게 비추고 있어서 그런가 봐요. 아, 달님은 오늘도 싱글벙글하네요. 매일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걸까요? 하긴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데 힘들게 뭐가 있겠어요? 맛있는 것도 실컷 먹고 늦잠도 자고 시원하게 목욕도 하고…. 그러니까 얼굴이 동그랗고 저렇게 환하겠죠. 모두가 달님이 아름답다고 하지만요. 저렇게 높은 하늘에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 누군들 안 예뻐지겠어요. 나만 봐도 달님처럼 동그랗게 예쁘고 훨씬 더 크잖아요. 하늘에서 살게 되면 나도 몇 배는 더 멋질 거예요. 누가 나를 하늘로 좀 올려줬으면 좋겠어요. 분홍 할머니에게 부탁해 봐야겠어요. 분홍 할머니는 길 잃은 지렁이들을 집어서 풀밭으로 보내주는 착한 분이거든요. 
“아휴, 징그러워! 저걸 어떻게…?”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지만 할머니는 웃으며 말하지요.
“징그럽다니요. 얼마나 귀여운데요?”
이렇게 마음이 따뜻한 분홍 할머니라면 날 도와주시겠지요?
“할머니, 저를 저 하늘로 좀 올려주세요. 그냥 휙 던져 주시면 돼요.” 
몇 번이나 큰 소리로 말했어요. 하지만 분홍 할머니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느라 안 들리나 봐요. 옆에서 지켜보던 노랑이가 깔깔거렸어요. 
“파랑아, 꿈 깨! 할머니 키로는 어림없어!”
날이 점점 밝아지면서 축구장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어요. 축구를 하러 온 사람들은 할머니보다 키가 훨씬 더 크고 힘도 세 보였어요. 달님만 한 공을 뻥뻥 차고 다니잖아요. 나는 목이 터지라 외쳤어요.
“여보세요. 저를 하늘로 뻥 차주세요! 제발요!”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었어요. 내가 소리칠 때마다 자기들이 더 크게 와와 소리를 질렀으니까요. 경기가 끝나고 모두 신발을 갈아 신고 있었어요. 이때다 하고 다시 외쳤어요.
“도와주세요! 잠깐이면 되잖아요!”
그래도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왁자지껄 떠들며 가 버렸어요. 운동장은 조용해졌어요. 심심해서 하품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어요. 비둘기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는 한낮에는 이따금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에 땀을 식히며 하루를 견뎌야 하지요.
“아, 시원해!”
오늘은 이상해요. 바람이 그치지 않고 휘잉휘잉 점점 더 거세게 불었어요. 어어! 굵은 빗방울도 떨어지기 시작하네요. 아침에 할머니들이 하던 말이 생각났어요.
“남쪽에는 무서운 태풍으로 난리가 났대요.”
“곧 이리로 올라온다니 걱정이에요.”
할머니들도 무서워하는 태풍이라는 건 뭘까요?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은 바로 희철이라는 아이인데요.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마구 집어던지거든요. 한 번은 나를 들어 바닥에 패대기치는 게 아니겠어요? 온몸이 쑤시고 종일 정신이 멍했다니까요. 물론 노랑이도 희철이의 손길을 피할 수는 없었지요. 태풍이 뭔지는 몰라도 희철이보다 더 무서울까요?
날이 어두워지면서 빗줄기는 더 거세지고 바람까지 휘몰아쳐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어요. 우르릉 콰쾅! 천지가 흔들리며 내 몸까지 부서질 것 같은 큰 소리가 나더니 번쩍 한 줄기 빛이 비쳤어요. 말로만 듣던 천둥 번갠가 봐요. 몸이 달달 떨렸어요. 노랑이를 불러봤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어요.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또 우르릉 쾅! 소리에 이어 번쩍 번개가 쳤어요. 바람에 날려갈까 봐 안간힘을 다해 버텼어요. 그때 갑자기 가로등이 모두 꺼져버리는 게 아니겠어요? 이제 온천지가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해졌어요. 다시 번쩍 번개가 치며 노랑이가 휘익 공중으로 날려 올라가는 것이 보였어요. 
“노랑아, 조심해!”
분홍 할머니가 묶어주고 간 끈이 끊어졌나 봐요. 내 몸도 휘청휘청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공중으로 떠오르며 뱅글뱅글 돌아가는 거예요. 정신없이 바람에 휩쓸려가다가 단단한 벽 같은 곳에 세게 부딪치고 말았어요. 너무 아파서 비명도 나오지 않았어요.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다 다시 무엇엔가 머리를 세게 부딪치며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눈을 떴을 때는 비바람이 그치고 온 세상이 환하게 밝았어요. 어! 내 몸이 공중에 둥실 떠 있는 거 있죠. 축구장이 저 아래로 내려다보였어요. 야호! 드디어 내가 하늘로 올라왔나 봐요.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 아시죠? 결국 내 소원을 태풍이 들어줬네요. 이렇게 고마운 태풍을 할머니들은 왜 무섭다고 했을까요? 나는 소리쳤어요.
“태풍님! 정말정말 고맙습니다!”
운동장에는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요. 노랑이는 멀리 날아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상해요. 나랑 같은 하늘에 있는 해님이 왜 저렇게 까마득히 높아 보이죠? 잠깐! 이건 또 뭐죠? 내 몸 사이로 삐죽하게 솟아 있는 이것은...? 앗, 내 몸이 느티나무 가지에 걸려 있네요. 바로 아래에는 부러진 가지가 축 늘어진 채 덜렁거리며 매달려 있고요. 나는 이미 멀리 가버린 태풍을 향해 소리쳤어요.
“에이, 이게 뭐야? 제대로 좀 올려줘야지!”
더 힘센 태풍이 오면 나를 진짜 하늘로 올려 줄 수 있겠지요? 나도 조금만 더 높이 올라가면 달님처럼 멋있게 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면 저 아래 있는 것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며 부러워하겠죠? 엄청나게 센 태풍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너무 간절하게 기다리려니 뱃속이 간질간질하고 메스꺼워졌어요.
그때 나뭇잎 스치는 소리에 섞여 말소리가 들려왔어요.
“할머니, 나뭇가지들이 많이 어질러져 있어요. 공놀이를 못할 것 같아요.”
“그렇구나, 태풍이 지나가면서 운동장이 엉망이 됐네.”
분홍 할머니예요. 노란 모자를 쓴 처음 보는 꼬마와 같이 왔어요. 태풍을 무서워하던 할머니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나는 반가워서 큰소리로 인사했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운동장 입구에 서서 둘러보기만 할 뿐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어요. 그때 까치 한 마리가 잔디밭에 날아오더니 콕콕 벌레를 쪼아 먹었어요. 까치를 지켜보던 꼬마가 할머니에게 물었어요.
“그런데 할머니, 호랑지빠귀라는 새는 밤에만 다닌대요. 캄캄해서 안 보일 텐데 벌레를 어떻게 잡아먹어요?”
“호호, 달님이 숲을 밝혀 준단다.”
“달님은 밤에도 일을 하네요.”
“그뿐인 줄 아니? 길을 잃고 울고 있는 아기 고라니를 집으로 데려다 주는 것도 달님이 하는 일이란다.”
“정말요? 달님이 그렇게 일을 많이 하는 줄 몰랐어요.”
나도 저 꼬마와 같은 생각이에요. 그렇지만 분홍 할머니가 하는 말이니까 맞겠죠? 할머니와 꼬마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어요. 까치도 날아가고 운동장에는 뜨거운 햇볕만 내리쬐고 있었어요. 하루 종일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심심한 하루였어요.
덜커덩 끼익! 아직 어두운 새벽에 무슨 소리일까요? 운동장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 트럭에서 아저씨 두 사람이 내렸어요. 
“혀엉, 무서워어. 어엉어엉!”
“울지 마아, 달님이 도와주실 거야아.”
길 한복판에서 지렁이 형제들이 울고 있었어요. 트럭에서 내린 아저씨들은 운동장 청소를 하려나 봐요. 지금 바로 도망치지 않으면 지렁이들은 아저씨들의 발에 밟히고 말 거예요.
‘달님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내가 도와줘야 해!’
나는 지렁이들을 향해 소리쳤어요.
“잘 봐. 동쪽 느티나무 가지에 커다란 파란색 달님이 걸린 거 보이지? 그 달님이 나야. 나를 보면서 이쪽으로 와! 아니, 진짜 달님은 아니고, 캑캑!”
자꾸 기침이 나는 데다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지렁이들이 못 알아들었나 봐요. 아저씨들이 절컹덜컹 연장 내리는 소리가 내 가슴을 퉁퉁 치는 것 같아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어요.
“이쪽이라니까! 느티나무 있는 쪽! 파랑 달!”
나는 너무 답답해서 온몸으로 나뭇가지를 쾅쾅 두드리며 소리쳤어요. 그래도 지렁이들은 내 말을 못 들었어요. 더 큰 소리를 내야 하는데 어떡하죠? 아휴, 어떡하죠? 잔디밭에 짐을 다 내려놓은 아저씨들이 연장을 하나씩 집어 들었어요.
“사람들이 오기 전에 어서 끝냅시다.”
한 아저씨가 갈퀴를 들고 이쪽으로 걸어왔어요. 지렁이들은 죽을힘을 다해 기어가지만 너무 느려요. 이제 아저씨가 몇 발자국만 더 떼면 콱 밟히고 말 거예요. 크, 큰일 났어요. 나는 내 몸을 더 크게 흔들기 시작했어요. 나뭇가지와 부딪치며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났어요. 이럴 때 바람이 좀 더 세게 불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형, 우리 이제 늦었나 봐! 엉엉!”
동생 지렁이가 울음을 터트렸어요.
“안 돼! 지렁이들아, 포기하면 안 돼!”
나는 있는 힘껏 몸을 더 크게 흔들었어요.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찔끔 났어요. 아저씨의 뭉툭하고 투박한 신발이 지렁이들 바로 앞까지 다다랐어요. 한 걸음만 더 떼면 끝장이에요.
“안 돼에에에에!”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아래로 뛰어내렸어요. 투두둑 부러져 매달려 있던 나뭇가지가 함께 떨어지는 바람에 엄청나게 큰소리가 났어요. 땅바닥에 너무 세게 부딪쳤는지 머리가 빙빙 돌았어요. 아저씨가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연장을 떨어뜨렸어요.
“어이쿠, 웬 훌라후프가 나무 위에서 떨어지지?”
바로 옆에서 지렁이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휴우, 살았다. 형, 빨리 숨자.”
정말 다행이에요. 진짜 큰일 날 뻔했어요. 아저씨가 연장을 다시 주워들며 나를 보고 한마디 했어요.
“하하하, 보름달이 완전 찌부러졌네.”
나 보고 보름달이래요. 나도 모르게 히쭉 웃음이 나왔어요. 나는 나뭇가지에 쓸린 상처가 너무 쓰리고 아파서 몸을 펴지도 못하고 가만히 누워 있었어요. 하늘로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요?
“아직 새것 같은데 다시 펴서 쓸 수 있으려나?”
아저씨가 나를 집어 들어 느티나무 둥치에 기대어 세워두고 갔어요.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해서 하늘을 쳐다보았어요. 아, 동쪽 하늘에 달님이 나타났어요. 그런데 달님이 이상해요. 나처럼 몸 한쪽이 푹 들어간 모습이에요. 홀쭉하게 야윈 달님은 얼굴빛마저 창백하고 푸르스름해요.
“달님! 어젯밤에 달님도 엄청 고생하셨나 봐요.”
달님은 밤새 무슨 일을 했을까요? 저렇게 야윈 걸 보면 나보다 더 힘든 일을 했나 봐요. 분홍 할머니 말이 정말 맞았어요. 달님도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사는 건 아니었네요.
“태풍님! 이제 나 하늘로 안 올려줘도 돼요! 이젠 달님 안 할래요.”
그런데 좀 이상해요. 내 몸이 찌부러지고 피부도 따끔거리지만요. 몸안에 무언가 시원하고 부드러운 것이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아요. 
“그래, 나에게는 나만의 할일이 있을 거야!”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