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9
0
밤마실을 나왔다. 초여름인데도 밤공기가 서늘하고 상쾌하다. 올해는 서풍이 아닌 북풍이 불어서 미세먼지도 없고 공기도 시원하다고 한다.
내 발끝은 자연스럽게 동네 마트로 향한다. 밤늦은 시간에는 할인 행 사를 하여 싼 맛에 구매하는 재미가 있다. 먼저 과일을 진열한 곳으로 간다. 형형색색 원색의 과일들이 마치 수채화 파레트에 담긴 물감처럼 화사하다. 몇 해 전만 해도 외국 여행지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열대 과일들이 보인다.
과일에도 국적, 모양, 빛깔이 다양한 다문화 시대가 왔는가 보다. 먼 이국땅에서 물 건너온 수입 과일들이 친근하게 보인다. 바나나, 망고, 용가, 체리, 골든 키위, 망고스틴, 파파야, 아보카도…. 알록달록 천연 색깔의 과일들은 저마다 특유한 맛과 모양을 뽐내며 당당하게 앉아 있다. 근데 이 많은 수입 과일 중에 유독 마음을 잡아당기는 과일이 있다. 거인이 샛노란 손바닥을 부채처럼 펼치고 손가락이 여러 개 있는 꼴.
바나나.
1970년대 중반 초등학교 시절에 남도 소도시에서 살았다. 시내 중앙 시장에 가면‘특수과일’간판을 붙인 크고 고급스럽게 보이는 과일가게가 있었다. 옆집 과일가게와는 달리 파인애플, 바나나와 같은 신기한 과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 앞을 지나면 자연히 발걸음이 멈춰지고, 비싼 가격표를 붙인 과일들을 물끄러미 구경만 하였다.
‘도대체 이 비싼 과일들은 누가 사 먹는 것일까? ’
어린 마음에 누가 이런 과일을 사 먹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 시절 바나나는 내게 동경의 대상이며 매력적인 과일이었다. TV 프로그램 < 밀림의 왕자 타잔>에서는 원숭이가 바나나를 맛깔스럽게 먹는 장면이 있었다. 나도 원없이 저 바나나를 먹고 싶다며 원숭이를 부러워하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사 온 우리 집 마당에는 바나나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당연히 여름이면 바나나가 열릴 줄 알고 엄청나게 고대하였다. 그러나 해마다 잎은 무성하게 자라는데 열매는 달리지 않아 실망하였다. 그 후로 바나나는 동화책 속의 예쁜 공주님이나 부잣집 딸이 먹는 과일이라며 포기해 버렸다. 바나나는 TV 화면이나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환상의 과일이었다.
열대우림지역에서 자라는 바나나가 한국에서 열매를 맺기는 만무하다. 요즘은 기후 온난화 현상으로 한국에서도 재배가 가능하다고 하니, 지구의 환경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중학생이었던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나니 내 책상 위에 낯선 누런색 봉투가 놓여 있었다. 벌어진 봉투 입구를 살짝 열어 보니 노랗고 탐스런 바나나 네 개가 들어 있었다. 그림에서 본 것과 같은 바나나를 들고 방방 뛰면서 소리지르며 얼마나 좋아했는지. 며칠 전에 서울로 출장을 가셨던 아버지가 간밤에 두고 가셨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가끔 출장을 가시면 회사에서 받은 출장비를 아껴 우리 사남매를 위한 선물을 사 오셨다. 이번에도 식사와 숙박 시설을 저렴한 곳으로 이용하시고 남은 여비로 사오신 모양이다. 그런데 비싸고 귀한 바나나가 너무 아까워 빨리 먹지도 않고 동생들과 핥아가며 조금씩 조금씩 베어 먹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 덕분에 바나나에 대한 환상은 사라지고 나도 바나나를 먹어봤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잠시 마트 자판에서 봉지에 든 바나나를 살펴본다. 필리핀에서 비행기 타고 건너온 바나나 봉지에는 할인 스티커가 붙어 있다. 오동통한 바나나가 6개 달렸는데 큰 사과 한 개보다 싼 가격이다. 그 시절, 서민들에게는 귀하고 비싼 과일이 이제는 값싸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신세로 변했다.
바나나 봉지를 이것저것 들어가며 살까 말까 망설인다. 예전에는 우유와 바나나를 믹서기에 드르륵 갈아서 즐겨 마셨다. 요즘은 혈당을 조절해야 해서 바나나를 사가도 잘 먹지 않는다. 껍질에 주근깨가 생기고 검게 변할 때까지 손이 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도 나는 바나나 작은 뭉치를 들었다. 점박이가 되기 전에 먹거나 남편에게 양보하면 되니까.
샛노란 미모의 바나나는 과일의 귀족이었지만 지금은 소박한 평민이 되었다. 그래도 평민으로 내려간 바나나가 더 친근하고 정이 간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생각하며 바나나를 사오셨다. 가격이 비싸니 많이 못 사고 한 개씩 맛만 보라고 사 오셨을 거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시골 남도까지 한나절이 넘게 걸리는 장거리 출장길이었다. 자식들을 위해 여비를 아끼며 귀한 바나나를 사서 품에 끼고 오셨던 아버지!
아버지의 사랑처럼 샛노란색이 점박이가 되어 검게 변하고 익어 갈 수록 맛은 더 달콤해지는 바나나! 아흔이 된 연세에도 늘 변함없는 사랑을 주시는 아버지처럼 바나나는 검게 늙어도 여전히 단맛이다.
나는 오늘도 바나나 한 입을 베어 물며 그날을 추억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