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8
0
냉장고 서랍을 여니 오래된 당근에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미안했다. 싹튼 부분을 잘라 수반에 담은 뒤 햇살 좋은 창가에 뒀다. 친구 지희가 생각났다.
10여 년 전 지희는 뇌경색 발병으로 한국에 와서 수술을 잘 받고는 몇 개월 치료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병원 진료 차 다시 한국에 나왔을 때, 친구들과 만나 밤새 얘기꽃을 피웠다. 그렇게 우린 세월을 거슬러 추억을 나누며 1박 2일을 보내고 헤어졌다. 그런 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는데 점점 건강이 안 좋아졌다고 했다.
지희는 막역지우다. 대학교 입학 때부터였으니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코에 비스듬히 걸친 채 항상 책을 한 아름 안고 강의실에 보였다가 바삐 사라졌다. 교수 연구실에서 조교를 하며 동네 야학교 선생도 했다. 배려심이 많은 그녀는 조카들도 잘 챙겼다.
결혼할 날을 잡고 대구를 방문했다. 지희도 그새 결혼식 날을 잡았는데 4일 앞선 날이었다. 바쁘다 보니 차 한 잔 마시기도 힘들었고, 서로의 결혼식 참석은 못했다.
세월이 흘러 그녀는 남편 직업 따라 미국 워싱턴으로 이사 갔다. 그 후 간간이 소식을 주고받았다. 딸애가 미국 여행 때는 지희 집에서 하루 숙박을 하기도 했다. 낯선 외국 생활을 하다 보면, 한국 사람 목소리 만 들어도 반갑다며 누구든 아무 때나 방문을 환영했다. 게다가 아픈 할머니들을 열 명 가까이 모시고 요양원처럼 돌봤다. 그렇게 베풀며 살아왔다.
그런 그녀가 요양을 위해 한국 언니 집으로 왔다. 언니의 꾸준한 보살핌으로 친구는, 걷기 연습을 하며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또한 그녀 형부가 공기 좋은 곳에 전원주택을 마련해 혼자서도 운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고마운 언니 형부였다.
운동하던 중 지희가 넘어져 어깨 쇄골에 금이 가서 입원하여 치료받게 되었다. 침대 생활을 하니 몸이 더 안 좋아졌다. 갈수록 혼자 행동하기도 불편해졌다. 간호하는 언니도 지쳐갔다. 친구가 퇴원하고 열흘이 지났을까 이번에는 엎친데 덮친다고 뇌출혈로 쓰러졌다. 언니는 앞이 캄캄해 허겁지겁 119를 불러 종합병원 응급실을 찾았는데 의사는 이미 왼쪽이 마비되었다고 했다. 마음은 한달음에 쫓아가 보고 싶었지만 내 사정도 있었다. 수시로 전화했다.
“지희야, 목소리 들리나? ”
“그래.”
“지희야, 나 곧 보러 갈게” 하는데 친구는 울먹였다.
나는 일을 하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지희 생각만 하게 되었다. 그토록 몸이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지희 언니는 한방치료라도 의지해 보려 했지만, 한의사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되면 보자고 했다. 갈수록 더 위중해 가는 모양이었다. 늘 염려는 되었지만, 현실에 묻혀 잊는 때도 있어 내가 밉기도 했다. 그러던 중 언니의 다급한 전화가 왔다.
“지희가 많이 안 좋다. 언제 시간 되니? ”
바로 병문안 가야 했는데…. 그새 두 번이나 병원을 옮겼다.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었다. 요양병원으로 달려갔다. 면회에 앞서 어쩌면 마지막 이 될지도 몰라 가슴이 쿵쾅거렸다. 산소통을 끼고 있는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살이 쏙 빠져 어린애처럼 지희는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먹성 좋던 친구였는데 링거 속 희멀건 영양제로 생명을 이어왔다고 하니 마음이 아팠다.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아 보았다. 그나마 손은 따 뜻했고, 사람들도 알아보고 어눌하게나마 우리 이름도 말했다. 그 순간 지희 얼굴에 창문 틈으로 한 줄기 햇살이 비추는 듯했다. 오랜만에 가족과 친구들을 보니 감정이 복받쳐 울렁거리기까지 한다고 했다. 늦게 찾아와 미안하다며 말하고 싶었는데 눈물이 먼저 주르륵 흘러내렸다. 15분간의 면회는 너무 짧았다. 손을 꼭 잡고 다시 오겠다고 했지만, 다시 볼 수 있으려나….
햇살 받은 당근의 새싹이 싱그럽다. 당근을 바라보며 병실에서 해쓱해진 지희 얼굴에 비추던 한 줌 햇살이 자꾸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