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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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나의 외갓집은 나주군 왕곡면이었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벌건 황토 땅을 안고 사는 동네이다.
방학 때 외갓집에 가려면 골목길이 어찌나 질퍽거리던지 신발은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흙 묻은 신발을 들고 꽁꽁 언 맨발로 집에 가면 외할머니께선 언 발을 아랫목 이불 속에 꼭꼭 눌러 녹여 주셨다.
그런데 생강은 황토 땅이 제격이란다. 마루 밑에 굴을 파서 그 속에 생강을 묻고 행여 바람이 들세라 판자로 덮고 그 위에 몇 겹의 가마니로 덮어둔다. 지게에 물건을 잔뜩 짊어 진 장사가 온 동네를 “상고 왔소”하고 외치고 다니면 할머 니께선 손짓하여 머슴 아재에게 소쿠리를 주시면 아재는 마루 밑으로 들어가 소쿠리에 반도 안 되는 생강을 담아 나온 다. 나도 궁금해서 마루 밑으로 고개를 숙이면 할머니께선 질색이시다. 가시내가 들어가면 부정 타서 생강이 썩거나 얼어버린다며 얼씬도 못하게 하셨다.
소쿠리에 담긴 생강을 들고 장사를 불러 비누, 생선, 이모 화장품 등 별의 별것을 사신 것을 보고 나는 궁금해 왜 돈을 안 주고 생강을 주냐고 물으면 할머니께선 대답대신 너 있을 때 장사가 와서 맛있는 걸 만들어 주니 다행이라며 쪼글쪼글 주름진 얼굴로 흐뭇해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외갓집 동네는 가을이 되면 바쁘다. 추수하랴 얼기 전 생강 저장하랴…. 생강은 뿌리를 따서 굴 속에 저장하고 뿌리는 무를 납작하게 썰어 굵은 멸치를 섞어 한 솥단지 끓이면 밥반찬으로 제격이다. 또 토하젓 담는데 뿌리를 잘잘하게 썰어 갖은 양념에 버무려 부뚜막에 며칠 삭혔다가 뜨거운 밥에 비벼먹는 모습이 너무 맛있게 보여 나도 한번 먹어 봤는데 토하 냄새가 역겨워 먹지 못했다. 잎사귀는 겨울 김장때 동치미 마개로 쓰이는데 잎사귀에서 우러난 톡 쏘는 동치미 국물에 고구마를 삶아서 같이 먹으면 그 맛 또한 일품이다. 지금 아이들은 그 추억을 알 수나 있을련지….
이러한 생강은 음식으로도 버릴 데가 없지만 돈의 가치도 대단했다. 외삼촌은 시골에서 꽤나 공부를 잘한 모양이었다. 광주에 있는 S중학교에 합격했을 때 초등학교 교문에 S중학교 입학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이 몇 달을 과시했단다. 그 뒤 광주에서 6년의 결실은 대단했다. 서울대 법학부에 합격을 했으니 난리 아닌 난리가 난 셈이다.
동네잔치에 가야 한다는 어머니의 성화에 겨우 따라 나섰는데 멀리서 들리는 꽹과리 소리에 어머니는 흥이 나셨는지 내가 뒤따라오든지 말든지 바쁜 걸음으로 가셨다. 동네 입구에 광목을 찢어 만든 현수막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었다. 나도 들뜬 기분으로 할머니 집 마당에 들어서니 닭을 몇 마리나 잡았는지 커다란 가마솥에 삶고, 돼지고기는 삶아 소쿠리에 건져 큼직큼직하게 썰어 이 방 저 방 나르시면서 “우리 아들 판사 되면 돼지 잡세”하시며 우리가 온 줄도 모르셨다. 한참 만에 나를 보신 할머니께서 손짓하셨다. 가니 거름 포대를 찢으시더니 동네 분들의 축하 물품을 외울 수가 없으니 적어야 한다며 부르셨다.
“함평댁 계란 두 줄, 금동아재 산닭 3마리, 시종아재 쌀 한 자루, 영암 댁이 생강 한 소쿠리.”
계속 부르셨다. 나도 신이 나서 적었는데 생강이 제일 많았다. 그 뒤 할머니 말에 의하면 그날 들어온 생강 팔아 외삼촌은 생각지도 못했던 하숙생이라는 호사를 누리며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할머니네 생강농 사는 외삼촌 학비에 보탬이 적잖이 되었으며 할머니는 새끼 돼지도 기르셨다. 생강 팔고 나락 팔아 어렵게 졸업시켰으나 돼지는 끝내 잡지 못했다.
두 번 실패의 쓴잔을 마신 삼촌을 보신 할머니 “나도 이제 늙어서 일도 못하겠다”하시며 취직을 권유하셨다. 취직이 되어 시골에 인사 오신 삼촌을 보신 할머니“판사 되기가 그렇게도 어렵더냐? ”하시며 눈물 섞인 한숨을 속으로 쉬셨다.
자기중심의 고집과 고지식함을 버리지 못하는 삼촌은 할머니의 마음을 서운하게 한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톡 쏘는 생강처럼 성격이 매서웠다.
고급 공무원인 삼촌이 명절 때 기차와 버스 갈아타고 황토 골목길 겨우 빠져 나오신 걸 보신 할머니, “그 흔한 택시 타면 누가 죽기라도 하냐. 광주에서 대학 나온 ○○는 광주서부터 택시 타고 오더라”하고 못 마땅해 하셨다.
동네 친척들은 무슨 구세주라도 만나러 오는 듯 아들, 딸들 이력서 손 에 쥐고 한손엔 삼촌이 좋아한 토하젓도 가지고 와서 헛기침 몇 번하고 취직 부탁할라치면 두말 못하게 거절하신다. 이럴 때면 할머니는 괜히 미안해하시며 막걸리 잔을 돌리시고 삼촌 눈치만 보셨다. 그 뒤부터 삼촌은 명절을 피해 잠깐 왔다가곤 하셨다. 이런 태도에 못마땅하신 할머니, “생강 팔고 나락 팔아 가르쳤더니 저만 사람인갑네”하시면서도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나는 삼촌의 승진 발령이 신문에 나올 때면 오려서 할머니께 꼭 갖다 드렸다. 글씨도 모르시면서 밥을 짓이겨 방문 봉창에 부치시고 삼촌이 나 보신 듯 “장하다, 내 효자 아들. 내 말 듣고 취직했어야”하시면서도 판사가 더 좋은데… 하시는 것만 같은 아쉬움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듯했다.
할머니께서 세상을 뜨시던 날 동네 골목은 각처에서 보내온 조화로 가득했는데 꽃향기보다 할머니네 톡 쏘는 생강 냄새로 가득한 듯했다. 살아계실 때 이런 호강하셨으면 주름진 얼굴이 활짝 펴졌을 텐데…. 아마 저세상에서도 아시고 내 아들 내 아들 하시겠지.
동네 어르신들 한 마디씩 하셨다.
“손바닥만 한 이력서 한 장 안 받아 주더니 이 많은 꽃은 웬일이여! 아따 멀리서 보내온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되지. 참말로 판사보다 낫네 그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