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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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토마토를 채소로 분류하지만 나 어릴 적 토마토는 당당히 과일에 속해 있었다. 특이 참외 수박과 함께 여름을 대표하는 과일로 이름을 날렸다.
어릴 적 시골집에는 마당 외에 열 평 남짓 되는 텃밭이 있었고, 이 텃밭은 우리 집 보물창고였고 어머니의 전용 마트였다. 여름이면 상추·쑥갓이 자랐고 오이와 감자에 보라색 가지와 청·홍 고추에 청양고추까지. 작은 텃밭이었지만 엄마의 부지런함에 계절마다 먹을거리를 내주었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 텃밭은 싱싱한 푸성귀를 제공했으며 그야말로 우리집 보물창고 역할을 톡톡히 했다. 어머니는 임종하는 그해 봄까지 텃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 덕분에 어머니가 가꾼 채소를 오래도록 어머니를 기억하며 먹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어릴 적 유난히 잔병치레가 많았다. 감기에 걸리면 편도가 붓고 고열이 나서 어머니 애를 태웠으며 해물만 먹으면 두드러기가 돋고 물집에 잡혔으며 기침을 달고 살았다.
그 덕분에 어머니는 반 의사가 되어 나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했고 어머니의 약손과 처방 덕분으로 잔병은 달고 살았지만 병원 한번 가지 않고 자랐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어느 날 배앓이가 왔고 참을성이 없었던 나는 죽어라 악을 쓰며 방바닥을 굴렀다. 이 모습을 본 어머니의 처방은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이었다. 나를 마루에 눕게 하고는 부엌에서 연탄아궁이 뚜껑을 들고 오셨다. 당시 우리 집은 시골이었지만 읍 소재지여서 연탄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연탄아궁이 뚜껑이 흙으로 된 것이었다. 지 금은 편리성에 의해 무쇠로 바뀌었지만 당시는 거의 대부분이 흙으로 만든 것이었다. 더운 여름 날씨에 배가 아파 죽어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으니 내 몸은 가만있어도 불덩이인데 뜨거운 연탄아궁이 뚜껑까지 들이대니 기겁을 할 노릇이 아닌가. 그런 나를 어머니는 자신의 무릎에 눕게 하고 내 배 위에 신문지를 두껍게 깔고 그 위에 흙으로 된 연 탄아궁이 뚜껑을 올려놓았다. 처음에는 무겁고 혹시나 화상을 입을까 무서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배는 적당이 따뜻해지고 통증은 사라지고 잠이 왔다.
그렇게 한두 시간 자고 일어나면 배는 언제 아팠냐는 듯 멀쩡했다. 그런 나에게 내린 어머니의 마지막 처방은 토마토였다. 텃밭에 반은 익고 반은 익지 않은 싱싱한 토마토를 한두 개 따서 반달썰기로 두껍게 썰어 백설탕에 재워 스테인리스 찬합에 담아 우물물을 담은 옹기 자배기에 담가 두었다가 찬기를 가득 먹은 토마토 절임을 약으로 주셨다. 지금으로 보면 약이 아니라 독이다. 토마토에는 라이코펜이라는 강력한 항산화성분이 들어 있는데 익혀 먹으면 토마토의 세포벽이 분해되 면서 라이코펜이 더 쉽게 방출되고 이로 인해 흡수가 용이해지는데 그 걸 생으로 먹었으니. 또 배앓이 후에는 찬 음식 보다는 더운 음식이 이롭다. 거기다 설탕까지 뿌려 재웠으니. 어머니가 알고는 자식에게 그것을 먹였을까. 그럼에도 나는 그 토마토 절임을 먹고 기운을 차렸고 배앓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감기에 걸려 편도가 부어 밥은 고사하고 물도 삼키기 힘들어지면 어머니는 득달같이 구멍가게에 가서 복숭아 통조림을 사오셨다. 이 역시 복숭아를 반으로 잘라 설탕에 절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한 것은 ‘황도’다. 마약이 이보다 잘 들을까. 매끌매끌한 복숭아를 꿀떡 삼키고 달달한 물을 한두 모금 마시면 부었던 편도가 가라앉고 침 도 삼키기 힘든 목에서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요즘으로 보면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 즉 위약효과다. 의학이나 간호학을 모르던 어머니가 위약효과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식을 사랑하고 고통을 나누려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모든 일에 믿음을 가지고 마주한다. 약이나 음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신이 복용하고 먹는 것을 신뢰한다면 더 빨리 치료될 수 있을 것이 다. 또한 기분을 좋게 하는 화학물질인 엔도르핀(endorphin)의 효과는 처방 진통제보다 더 강하다.
어떤 음식이 건강에 좋다고 믿고 먹는 경우, 실제로 그 음식을 먹고 난 후 더 건강해진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특정 슈퍼푸드가 피로를 줄여줄 것이라고 믿고 먹으면, 실제로 피로가 줄어든 것처럼 느낀다. 다시 말하면 플라시보 효과가 단지 약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상 전반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우리의 기대와 믿음이 실제로 우리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경우도 어머니가 나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리라는 기대감 과 어머니의 치료가 지금까지 나를 낳게 해 주었다는 심리적 요인과 과거에 어머니가 약이나 음식으로 나를 아프지 않게 해주었다는 효과를 본 경험이 가져다준 조건화가 일치했기 때문에 의사도 간호사도 아닌 어머니의 음식이나 처방이 나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반대로는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가있다. 이는 환자가 부정적인 기대를 가지면 실제로 부정적인 증상을 경험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 옛날 어머니는 텃밭의 토마토로 연탄아궁이 뚜껑으로 더러는 동네 구멍가게의 통조림의 힘을 빌려 나를 건강하게 키우셨다. 다른 집 어머니들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싶다. 하다하다 할 것이 없으면 ‘엄마 의약손’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요즘 시선으로 보면 참 어이없고 바보 같은 짓일지 몰라도 50년 전에는 그렇게 살았다. 누구나 할 것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