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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수국 한 송이

한국문인협회 로고 음춘야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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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수천 예래생태공원’을걷고있다.
제주 올레길 8코스다. 대왕수(大王水)는 예래동의 대표적인 용천수이며, 제주 마을 형성의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자연유산이다.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의 빨래터이며 식수를 공급해주던 곳이었다.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흐르는 물이라는 의미로 ‘큰이물’이라 부른다. 대왕수 주변에 예래생태공원이 조성되고 굽이굽이 물길 따라 산책로가 연결되어 있다. 예래(猊來)라는 말은 ‘사자가 온다’는 뜻이다. 서귀포시 예래 동의 오름인 군산(軍山)이 마치 사자가 오는 것과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유래되었다.
오랜만에 둘째딸과 제주 아들네를 내방했다.
여행 다음날, 아들 내외와 딸 그리고 나, 네 사람이 맑은 계곡물을 따라 숲길 트레킹을 하고 있다. 아침 시간이라 길은 한산하고 오직 우리 일행뿐이다. 온통 초록 일색이다. 시인이상(李箱)은「권태」에서 ‘서(西)를 보아도 북(北)을보아도 이 벌판은 왜 이렇게 죄다 푸르단 말인가. 어쩌라고 저렇게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돼먹었노? ’라고 했으나, 나는 눈이 부시도록 초록을 바라보며 마음마저 물들이고 싶다.
일행은 말없이 현무암이 깔린 잔디 길을 걷는다. 벚나무 터널 속에서 제주 휘파람새의 ‘호오 호오옷’소리를 들으며, 꽃을 따라 춤추는 나비를 쫓는다. 바람이 불지만 바람을 잊고, 길을 걷고 있지만 길을 잊는다. 그리고 나도 잊는다. 한마디 말이라도 한다면, 발길이 닿을 때부터 나를 따라 콸콸 흐르는 저 대왕수천의 맑은 소리를 못 듣고 못 볼 것만 같다. 이 자연을 해치고, 스스로를 해칠까 두려워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을 뿐이다. 끊어질 듯 아픈 허리, 찌릿찌릿한 발바닥, 콕콕 쑤시던 팔목도 씻은 듯 자취를 감추고 있다.
산자락을 휘덮은 수국과 산수국은 또 어떤가. 연분홍 진분홍 연보라 진보라 갖가지 꽃들 속에 하얀 꽃, 파란 꽃들이 꽃대궐을 이룬다.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다. 몸도 마음도 수국 속에 파묻혀 밤에도 파스텔 톤의 수국 꿈을 꿀 듯싶다. 온화하고 따스한 분위기의 꿈을. 곧 음력으로 단오(端午)다. 여름맞이 축제를 위해 청춘남녀로 돌아가 밀회를 즐길 수 있다면, 어느 누가 나의 꿈을 저지하겠는가. 우산도 챙겼지만, 비는 그치고 알맞게 흐린 날씨는 산책하는 데 더없이 좋다. 윤기 좌르르 흐르는 녹나무 후박나무 아왜나무 등을 바라보며 떨어진 매실도 대왕수에 씻어 먹어본다.
제주 대부분의 하천은 건천이다. 비가 쏟아질 때만 냇물이 흐르다가 비가 그치면 그 물은 땅속으로 스며든다. 하지만 예래동은 예외다. 용 천수가 한결같으니 항상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군데군데 대왕수천 저류지도 자리 잡고 있다. 빗물을 저장함으로써 하천의 수위가 상승하는 것을 막는 곳이다. 크고 작은 저류지는 보통 연못이다. 온통 부레옥잠으로 가득 덮여 부레옥잠 밭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왜가리 청둥오리 가 한가하게 노닐고 나무 데크 길을 따라 걸으니 무아몽(無我夢)이따로 없다.
곳곳에 정자와 물레방아도 설치돼 있다. 예래동이라고 쓰인 사자를 형상화한 조각과 신앙의 대상물인 방사탑들도 보인다. 신선이 놀고 가는 별천지 같다.
내 고향‘장절내’가 스치듯 떠오른다. 여름밤이면 동네 처녀들이 꼬불꼬불 들길을 돌아 반딧불이를 쫓으며 목욕하던 추억이 새롭다. 멱 감으러 가던 가르맛길 사이로 휙휙 날아다니던 불빛, 마치 하늘의 별빛인 양 신기했는데. 환경오염으로 대부분의 서식처가 파괴되어 멸종위기에 놓여 있지만, 이곳에 반딧불이가 캄캄한 밤을 수놓고 있다니 까마득한 농촌 고향이 잊힌 듯 그립다.
산책길을 뒤로하고‘제주 논짓물’로 발길을 옮긴다. 대왕수천의 용천 수가 태평양으로 흘러 흘러간다. 콸콸 쏟아지는 논짓물, 그 소리가 무척 경쾌하다. 용천수가 바다로 흘러가면서 천연 해수욕장이 된다. 어디 까지가 담수이고 어디가 해수인지 구별하기 힘든 제주의 담수풀장이다. 저만치 ‘논짓물 해수 족욕 카페’도 보인다.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바닷물에 발을 담근다면 피로가 저절로 풀릴 것 같다. 잠시 눈을 감아본다.
예래생태공원 6월의 수국이 못내 그리워 조천읍 ‘새미동산 수국 축제’를 찾았다. 파란 수국으로 덮인 미로를 따라 걸었다. 돌고 돌아도 색색의 수국동산이 끝없이 펼쳐진다. 생태공원의 수국보다 훨씬 다양한 색깔이다. 처음 보는 색상의 수국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동화 같은 색감과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들이 장식돼 있고 휴식공간도 잘 갖춰져 있다. 주객일체 물심일여, 황홀하고 현요하다고 할까.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가진 듯, 무념무상의 경지라고나 할까. 한편 작은 화분에 수국 묘목들이 자라고 있으니 더 아름다운 ‘새미수국동산’을이루 리라.돌아오는 길에 아라동‘한라산 남국사’에 들렀다. 일주문으로 들어서 면 두리기둥의 삼나무 숲과 진초록 차밭이 펼쳐지며, 파스텔 톤의 파란 수국이 절정을 이룬다. 온통 몽글몽글 파란 꽃송이 일색이다. 난하지 않고 소박하며 청청한 멋이 나그네의 마음마저 맑고 차분하다. 한적한 산사의 오후, 독경소리조차 청청하다.
수국은 다양한 색깔의 꽃이다. 품종도 다양하다. 그 품종과 함께 토 양의 산도(酸度)에 따라 꽃의 색이 달라지는 특징이 있다. 산성 토양에 서는 푸른빛을, 알칼리성 토양에서는 붉은빛을 띠는, 수국만의 변화무쌍한 모습이다. 수많은 작은 꽃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아름다운 하나의 큰 꽃송이를 이룬다. 그 후덕한 모습이 마치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부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부부가 한 가정을 이루고 가족을 거느리며 한 사회를 형성하듯이 말이다. 그 꽃말은 ‘진실한 사랑’과 ‘변치 않는 마음’이라고 한다.
네 사람, 모처럼 제주에서 ‘대왕수천 예래생태공원’을 산책하고, 수국을 찾아 단란한 여행을 즐겼다.
이 여름, 파란 수국 한 송이쯤 가슴속에 품고 내 마음 물들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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