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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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수줍게 피어서 언제나 분위기를 이끌어 간다. 오래 전부터 화분을 하나둘씩 들이면서 식물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늘 꽃집에 발이 머물고 작은 화분을 데려와서 자식을 키우듯 가꾼 소중한 오랜 나의 꽃밭. 꽃대를 내밀고 만세를 부르듯 두 팔을 뻗어 올리는 새 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환하게 밝히는 이름 모를 꽃들의 이름을 알아가는 재미도 특성도 있다.
사랑초는 늘 사랑을 갈망하는지 뽑아내어도 죽은 듯 엎드렸다가 사랑한다며 불쑥 고개를 든다. 설화는 둥근 항아리 주머니를 만들어 발그레 자줏빛 잎사귀를 살그머니 내민다. 다산의 여왕은 부지런히 새끼를 치며 종족을 번성시킨다. 카툴레야는 자존감이 높은지 큰 한 송이가 소담스럽게 입을 열면 노오란 비로드 같은 꽃잎이 비밀스러운 귓속말을 하는 듯하다.
보살피는 정성을 아는지 털어주고 닦아주면 꿋꿋이 서서 흔들리다가 비를 맞으며 살랑이는 바람 불어도 내 자리를 지켜낸다. 세상을 다 가진 듯 마음이 차오른다. 햇빛을 받아먹는 힘 있어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로움도 있는 꽃.
바나나 껍질을 갈아서 체에 내린 물을 주고, 쌀을 갈아서 쌀뜨물과 먹여주고, 동양난은 소고기 핏물을 먹여주면 잎사귀가 짙은 색소로 답을 해준다. 고맙다. 새순을 내밀고 게발선인장도 마디마디 열정꽃 피워 사랑한다 말한다. 온갖 시름도 너를 보면 씻겨지고 네 잎을 만지면 사랑의 숨결을 느낀다. 빛깔과 모양과 촉감은 달라도 같이 마음을 모아 화합의 노래로 답한다.
한 포기가 꽃 피면 우리도 더욱 성숙해지며 마음은 너그러워지고 마음의 그늘도 지워져 꽃과 동화되어 환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무디어진 나를 일으키고 시간의 힘에 기대면 어느덧 쪼로롱 들려오는 노랫소리.
고향집에는 한 생을 바쳐 우리들을 다독이어 눈물 닦아준 아버지가 계셨다. 우리들이 부족하여도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고 등을 토닥이신다. 아버지는 아침이면 우물가에서 우리를 시원케 하는 초록잎이 무성한 포도나무 곁에서 펌프질로 길어 올린 물로 포도나무에게 물세례를 베풀어 주신다. “얘야, 올해도 열매를 많이 맺어라.” 벽돌이 촘촘하게 울타리를 만들어 놓은 꽃밭으로 다가가 동글 공처럼 소담스러운 다알리아 가는 대궁에는 싸리나무 기둥을 세워 넘어지지 마라 잡아주시고, 사춘기에 접어든 구슬 같은 주황색 열매가 잘 영글은 꽈리나무는 쓰다 듬어 주셨다. 어여쁜 마음을 닮은 붓꽃은 보살펴 주는 보답으로 보랏빛 꽃대 밀어 올리고, 한쪽 귀퉁이 닭장에서 꼬꼬댁 소리를 내면 엄마닭은 나란히 줄을 세워 알을 부화하는 짚으로 만든 집 속에 들어가서 차례로 들어가고 나오며 알을 낳도록 보살피셨다. 매운바람이 가지를 흔들어 마른버짐 꽃 얼굴에 번지는 날이면 오므린 잎새 닦아주며 할퀴어 찢어 진 마음은 싸안아 주셨다. 배롱나무는 가지마다 손길따라 조롱조롱 백일을 옹알옹알 읊조리며 기도의 불을 켰다.
아버지가 사업장에서 돌아오시는 저녁이면 대청마루에 자녀들이 주욱 늘어서서 “아버지 오셨어요? ”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는 팔남매를 주욱 둘러보시며 “찰떡 먹고 싶어요”한 그 말을 기억하시고 손에 든 찰떡봉지를 안겨 주신다. 두레상에 가족들이 빙 둘러 앉으면 가마솥에서 퍼온 김 오르는 보리쌀밥을 큰 놋양푼에 담아 비름나물, 메밀나물, 고추장을 넣어 이리저리 우리들의 지저귐을 비비신다. 아버지와 웃는 정겨운 하루가 달그락 숟가락의 맑은 여운이 메아리로 돌아오면 따끈한 숭융 한 사발로 쌀쌀한 겨울을 물리고 서로를 덥힌다. 밥상을 물리고 아버지 발치에 둘러앉으면 “작은 내 것을 아껴야 남을 도울 수 있다”, “사람은 버릴 수 없으니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는 오늘과 내일이 보이는 듯한 말씀 우린 귀를 세워 가슴에 기록을 했다. 아버지는 구들장을 덥히느라 장작불을 지피시고, 콩기름을 먹인 군데군데 흠집 난 안 방 가운데에 언제나 거인으로 계셨다.
황토로 다져진 꽃밭에 골을 틔워 큰조루로 물을 뿌리시던 아버지. 벽 돌을 따라 옹기종기 둘러앉아 그 안에서 피고지며 제비도 서까래에 둥지를 틀어 지지배배 입을 벌렸다. 우리는 늘 입을 벌려 아버지가 베풀어 주시는 인자한 만찬을 먹었다.
힘든 날도 고통의 순간도 아버지의 체취로 답하고 색을 빛내며 위로를 준다. 자양분이 부족한 날에도 자양분이 되어 주어 탄성을 자아낸 다. 우리들의 생각을 가라앉히고 삶을 다독이려 말없이 단아한 눈부심으로 고고한 자태로 바라봐주는 뜰의 꽃. 그렇구나. 가장 연약하여도 가장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일으키는 너는 천하를 꽃잎으로 품었다. 가녀린 여인 그 품 안에 싸이면 단물이 녹아 모두 하나로 흐른다. 완전한 정지, 잠시의 멈춤을 위해 찰칵 너를 가둔 네 젊음. 나의 계절은 언제나 가슴에서 나의 뜰에서 설렘으로 피어나고 여리디 여린 가지를 뻗으며 오늘 너만을 바라보고 너는 나를 바라보며 여린 가지 키워 간다. 아가의 눈빛을 담아 아가의 볼을 담아 아장아장 걸으며 날개로 솟아오르며 피고 또 피어나 미소를 보낸다.
예쁘고 소중하다고 쓰다듬으면 정성을 다한 만큼 예쁘게 자라주어 어여쁜 꽃들을 피운다. 이 모양 저 모양 오랜 날들이 가꾸어 놓은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할까? 무궁화는 나라를 잘 지키겠노라는 다짐을 하는데, 생각의 폭은 마음의 폭이 되어 배려를 낳아 드넓은 들판을 만들고 있을까? 많은 것을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을 꽃은 내리라고 말한다.
맑은 물을 뿌리며 내 근심을 내리고 그들 속에서 꿈을 키워 나가고 관계를 키워 나가고 제자리에 머물러 그 자리를 빛내는 인생의 스승. 곱디고운 말로 부드럽고 따스함으로 감싸주던 아버지의 꽃밭. 꽃이 지면 또 다른 꽃을 피우던 내 젊음이 고스란히 들앉은 나의 꽃밭.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남아서 가슴 가득 차오르는 기억으로 남아 오늘 내곁에서 살며시 다독이며 고개 끄덕이는 꽃.
그 사랑 가슴에서 피고지고 피고지며 동행하는 나의 동반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