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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 1971년 여름바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서성옥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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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였다.
지독한 해무가 몰려 왔다. 대화퇴(大和堆) 어장을 벗어나 울릉도 동북방으로 접어들 때까지만 해도 하늘이 흐리기만 했을 뿐 늦여름 밤바다는 평온했다. 거친 동해바다 물살을 헤치며 2박3일 조업한 제2성창호는 이미 만선이 었다. 어창이 오징어로 가득 찼다. 갑자기 짙은 해무가 몰려들자 집어등은 희뿌연 불빛만 깜빡일 뿐 휘몰아치는 안개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동북 방향으로 얼마나 더 올라왔을까, 멀리 등대 불빛이 깜빡였다. 잠이 오지 않아 선실을 빠져 나온 스무 살 청년 김형수, 그보다 두어 살 더 먹은 심원섭 등 서너 명 이 배의 선미에 앉았다. 신입 어부 열여섯 살 김춘식도 형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었다. 막 선실을 빠져 나오던 청년 박성학이 멀리 깜빡이는 불빛을 보고 선장에게 물었다.
“아바이, 저기가 어디메요? ”
“양양 인구 등대일 거야, 아직 멀었으니 그만들 들어가려무나.” 선장이 어린 어부들을 다독였다.
제2성창호는 여름 밤바다 깊은 안개를 뚫고 동북 방향으로 한 시간 정도 더 북상을 하였다. 자정 무렵이 다가왔다. 막 자정이 넘어서서 1971년 8월 30일이 되었다. 짙은 해무로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선장은 엔진을 끄고 표박(漂泊)을 결정했다. 다행히 풍랑이 심하지 않아 표박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갑자기 검은 물체가 배로 다가 왔다. 제2성창호로 가까이 다가온 배는 쾌속정으로 보이는 소형 선박
이었다.
“어디로 가는 배입니까? ”
“속초 배입니다.”
소형 선박에서 건네는 말에 선장이 답했다.
“아, 그러시면… 속초로 가려시면 따라오십시오.”
소형 선박에서 건네는 말은 완벽한 표준말이었다. 함경도 피난민 정 착촌인 청호동 마을에서 나고 자란 김춘식에게는 서울말처럼 들렸다.
성창호 선장도 속초 해경 어업지도선인 줄 알았다. 소형 선박은 북북 동 방향으로 선로를 잡았다. 어린 김춘식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 선장이 혼자 중얼거렸다.
“야, 이 뭐이 잘못 됐구마이.”
북동쪽에서 검은 트롤선 같은 배가 쏜살같이 다가오는데, 탕, 탕 소총 소리가 울렸다. 뱃전에 도롯지 인민군 모자를 쓴 사람들이 보였다.
“야, 걸라우, 걸라우.”
제일 앞에 있는 인민군 모자가 밧줄을 던지며 우렁우렁한 평안도 말 투로 명령했다. 속초 선적 고깃배 성창호 선장의 얼굴에 절망이 스치며 안색이 파리해졌다. 선실에서 막 올라오던 중견 어부 김상기는 새파랗게 질린 기관장과 건너편 검은 함정을 번갈아 보았다.
제2성창호 선원 23명은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불안감에 몸을 움츠리며 안개 속 칠흑 같은 밤바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동이 트고 한참 후 제 2성창호는 북고성 연안의 항구 장전항으로 예인되었다. 멀리 금강산 준봉들이 보였다.
장전항은 북한 해군 기지였다. 인민군 해군 대좌가 정복을 입고 성창호 선원들을 맞이했다.
“동무들 고생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오신 것을 환영 합니다.”
제2성창호 선원 23명은 금강산휴게소에서 머물면서 북측 방식의 조사를 받았고, 원산을 거쳐 평양 근처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북한 초대소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북한식 사회주의 교육을 받았다. 북한이 제 공한 인민복을 강제로 입고 맑스·레닌주의 철학을 배웠다. 학습 일정에 김일성 빨치산 항일 투쟁사가 지겹게 반복되었다. 교육대장이 건넨 꽃다발을 들고 만경대와 김형직 생가를 방문했다. 김책시 용강제철소, 함흥 비료공장, 월북한 천재 화학자 이승기 박사가 개발했다는 주체 섬유 비날론 공장을 견학했다.
가는 곳마다 북한 사람들이 몰려 나와 환영을 해주었다. 불쌍한 남한 인민들이 왔다고 손을 흔들고 울면서 맞았다. 당시 남한의 경제는 북한 에 미치지 못했다.
젊고 또리또리한 사람들이 차출되어 연단에 올랐다. 수천 군중들 앞에 서 <김일성 찬양가>를 외쳤다. 지도원 동무가 미리 써준 원고에 따라 김일성 찬양가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10개월의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어느 날, 티브이에서 7·4 남북공동성명 소식이 흘러 나왔다. 남북은 적십자 회담을 시작했다. 지도원 동무가 곧 내려갈 수 있다는 말을 했다. 티브이를 보던 속초 어부들은 속으로 환호했다. 이제 그리운 가족들과 상봉 할 수 있다고….
제2성창호 선원 23명은, 1972년 9월 7일 속초항으로 귀환했다. 먼저 피랍된 대양호, 제3명성호 포함 5척의 고깃배와 선원들도 함께 해경의 호위를 받으며 속초항으로 들어왔다. 납북 어부 모두 인민복을 벗어 던지고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납북 어부들 모두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고, 선장과 기관장들은 내남없이 구속 실형을 받았다. 고기를 낚는 어부들도 짧게는 두어 달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로 나왔다. 반공법, 국가보안법, 수산업법 위반 죄목이었다. 긴 세월 그들은 자유롭지 못했다. 그 사슬은 그들의 전 생애를 관통하여 옭아매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2020년 12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기 위원회가 출범 했다. 열여섯 어린 어부 김춘식은 머리에 서리가 가득 내린 67세 노인 이 되었다. 그는 속초 민관합동추진단 사무실에서 진·화·위 위 원 과 면 담을 갖게 되었다. 면담 위원은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장 김정난 교수였다.
도저히 어쩔 수 없었어요, 밤안개가 엄청났어요…. 바다 안개, 해무라고 하죠. 우리는 짙은 해무 속으로 무작정 끌려갔어요. 만선의 꿈은 안개처럼 사라졌습니다.
아버지가 아홉 살 때 돌아가셨지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어요. 열다섯부터 배를 탔는데, 오징어배가 그래도 쉬웠습니다. 저인망배, 유자망배는 어린 나이에 탈 수는 없어요. 오 징어 채낚기는 혼자 낚는 일이고 꾀만 부리지 않으면 어느 정도 조과가 나오긴 해요. 선장이 봐서 괜찮을 것 같으면 태워줬습니다.
50년 긴 세월을 지나온 성창호 막내 어부 김춘식은 담담한 어조로 지난날을 회상했다.
아, 식사요? 식사는 좋았습니다. 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우수하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서도 잠자리와 식사는 잘 마련해 줬어요. 쌀밥에 고기반찬이 나왔지요. 김일성이 모든 인민들에게 쌀밥과 고깃국을 주겠 다고 했다는데 우리가 먼저 먹은 셈이랄까요.
“동무들 여기 있는 동안 잘 지내시오. 너무 걱정 마시오, 시간이 지나 면집에 갈 수 있소.”
지도원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도 김일성 주체사상 학습은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내가 팔자에 없는 철학 공부를 다 하지 않았겠소.
강당에 올라 온 강사가 맑스·레닌주의 강의를 하는데 김일성대학 교수라고 했습니다. 칠판에 판서하는 글씨가 정자체로 너무나 깔끔하고 글 한 자 틀리지 않아 지우는 법이 없었어요. 목소리도 낭랑하게 처음 과 끝까지 톤이 일정했습니다. 어린 내가 봐도 멋있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배에 서울에서 대학 공부를 한 어른이 있었는데, 전영환 씨라고, 그 분이 그랬어요. 야, 인텔리켄차다. 그 분은 나도 젊어서 배운 사람이 지만 야! 정말 멋있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돌아가셨겠지만 제가 전영환 어른께 정말 죄송한 일이 있어요, 나중에 조사 받을 때, 북에서 주체 사상 교육 받으면서 전영환 씨가 김일성대학 교수 보고 인텔리라고, 멋 있다 했다고, 제가 한 말 때문에 그 분이 더 큰 고초를 겪었습니다.
김춘식의 얼굴에 깊은 회한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김일성 주체사상 공부는 좀 빡셌습니다. 그날 배운 교시는 외워 다음 날 발표해야 했습니다. 나이 많은 어부 아저씨들은 따라가기 버거웠어요. 만경대 김일성 생가, 김형직 생가에 가면 꽃을 바쳐야 했습니다. 백 두산 천지를 인민군 복장으로, 니꾸샤꾸(륙색의 일본식 발음)를 메고 올랐습니다. 선두는 붉은 깃발을 들었습니다. 영락없이 빨치산이 된 기분 이라 민족의 영산을 본다는 설렘도 없었습니다.
제철소, 비료공장, 협동 농장 견학가면 수천 군중들 앞에서 김일성 찬 양가를 외쳐야 했는데, 협동호 선원 이승호 아저씨가 많이 했어요. 그 당시 아저씨 나이가 스물두세 살이었는데 고등학교 중퇴 학력이라 못 배운 어부들 중에서는 제법 똑똑했지요. 그래도 마구 말하면 안 되니 지도원 동무라는 사람이 미리 써준 원고에 따라 장단고저 풍월을 읊었 습니다. 어느덧 수개월이 흘렀습니다.
아, 적십자회담을 말하는군요. 그래요. 노동신문을 보게 했는데 남한 에서 북한으로 정찰 보낸 북파 대원들이 해안에서 사살된 모습이 신문에 났어요. 미제의 앞잡이랍니다. 실미도 사태도 그래서 터진 것 아닌 가요? 우리도 많이 올려 보냈고, 저들도 공작원들을 아래로 내려보내 면서, 또 우리 같이 선량한 사람들을 수없이 납치하면서도… 그러면서 물밑 작업을 한 거지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에 온 소식을 티브이로 내보내더군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가 평양에 처음 왔을 때 협동호, 명성호, 대영호, 심지어 서해에서 온 어부들도 많이 보습니다. 그러니 애초 남북 적십자회담 실무진 대화 때부터 북에서는 이를 이용하려고 마구 끌고 온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도원 동무라는 사람이 우리 보고 언젠가는 내려간다, 내려간다, 라는 말을 한 것 아니겠나,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우리가 그 다음해 7·4 공동성명 후 9월에 귀환 한 것 아닙니까? 북은 우리를 납치해 놓고는 월선한 배를 국가 보위 차원에서 나포한 것이라고 선전했잖아요. 그리고는 이제 인도적 차원에서 귀환 조치한다고 떠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춘식은 북에서 겪은 일들을 마무리하면서, 1972년 9월 7일 귀환 때의 일들을 더듬기 시작했다.
원산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오전 장전항에서 속초로 출발했습니다. 대양호, 명성호, 그리고 우리 성창호가 차례로 북 해군 함대를 따라 선단을 이루며 남방 한계선 38도 36분선에 왔을 때, 우리 해경이 선단을 인수 받았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저도 그렇고, 납북 선원들 모두 곧 그리운 가족들을 상봉할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데….
김춘식은 상기된 얼굴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속초항에 도착하면서 뭔가 싸늘한 분위기가 느껴졌어요. 아니 분위기가 살벌했습니다. 무장한 군인, 경찰들이 배와 우리를 에워쌌습니다. 부둣가에는 아버지를 보러, 남편을 보러, 형제를 보러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지만 우리는 가족을 만날 수 없었어요. 그 자리에서 모두 포승줄에 묶였습니다. 부둣가 가족들이 슬피 울었습니다. 군용 트럭에 구겨져 실려 속초시청 3층 강당에 함께 수용되었습니다.
속초시청 앞 도로 건너편에 여관, 여인숙이 많이 있었는데 5척 배, 백여 명 귀환 어부들이 한일여관, 해동여인숙, 또 무슨 여인숙에 분산 수용되었습니다. 조사는 혹독했지요. 합동신문이라 했습니다. 경찰과 보 안대에서 번갈아 들어왔습니다. 주먹으로 때리고, 각목으로 두들겨 패고, 나도 많이 맞았습니다. 엄청 때려 패더라고요. 전기고문, 물고문을 당한 사람들도 많았어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체념하고 당했습니다. 북한에서 먹고 자고 1년 동안, 비록 강제로 한 것이지만 노동신문을 보고, 공산주의 공부를 하고, 김일성 찬양가를 부르고 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반공법 위반, 당연 한 것으로 안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재심 청구를 통하여 나라가 우리를 보호해 주지 못해 끌려 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는 안개 때문에 몰랐지만, 우리 배는 어로 한계선 아래 38도 35분 02초 에서 나포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선장, 기관장, 갑판장은 모두 실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저도 구속되었습니다. 특별교육을 받은 자로 분류되었습니다. 제가 병이 나 얼마간 입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병원 입원 기간을 특수교육 받은 과정으로 못 박았습니다. 별도 교육으로 받은 지령이 무엇인지 불라고 온몸을 두들겨 팹디다, 잠도 안 재우고. 바로 구속영장이 떨어졌습니다. 그렇지 만 나이가 어린 데다 때리고 어르고 달래도 더 나올 게 없었는지 집행 유예로 출소할 수 있었습니다. 두 달 동안 시커먼 보리밥, 멀건 시래기 국 먹으며 속초 유치장에 있다가 나왔는데 참으로 막막했습니다. 배운 게 없고, 기술도 없으니 다시 배를 탔습니다.
김춘식이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1983년도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네요. 그때가 스물일곱여덟 살 때였던 가요. 갑자기 집 앞으로 검은 지프 한 대가 와서 다짜고짜 잡아갔습니 다. 잠시 조사할 게 있다고. 끌려간 곳은 보안사 서빙고분실이었습니 다. 그 무렵 배는 안 타고 울진 덕구온천 개발 현장에서 잡역부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전자시계가 유행해서 카시오 전자시계를 차고 있다가 깜박하여 온천욕장에 놔두고 나온 적이 있습니다. 아깝지만 잊고 있었는데, 보안사 요원이 접선 표시로 나둔 것으로 몰면서 누구와 어떤 접선을 했는지 신문했습니다. 갑자기 머리가 아득했습니다. 모골이 송연하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요. 아니 내가 덕구온천에 일하러 온 것도 알고 벗어 놓은 카시오 시계가 내 것인 것까지 알고 있다니, 도무 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간첩죄로 엮으려 했으나 더 나올 게 없자 회유책을 썼습니다. 너 같은 빨갱이놈을 그냥 내보낼 수는 없고, 좋게 마무리짓자며 고무찬 양죄로 하자고 했습니다. 억지로 지장을 찍었습니다. 나는 또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2년 실형을 살고 대전교도소에서 출소했습니다.
격정적으로 말을 이어가던 김춘식이 잠시 쉬어가자며 물 한잔을 따랐다.
아 참, 내 이야기만 너무 했네요. 우리 배 성창호 선원 김형수 씨를 만 나보셨지요? 그 형님은 완전히 소식이 끊겨 버렸댔어요. 동해 묵호에 사는데 택시 운전을 하더군요. 김형수 씨도 72년에 집행유예로 나왔는 데 간첩 혐의로 다시 구속된 케이스이지요. 입대 영장이 다시 나왔는데 이왕 하는 군대생활 하사관 장기 복무를 신청했답니다. 입대 얼마 후 바로 방첩대가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죄목이 어마어마합니다. 군대 내 잠입하여 지하조직을 건설하려고 한 혐의였습니다. 남들은 빠지려고 난리인 군대에 북에 갔다 온 놈이 장기복무 신청하고 들어왔으니 분명 무슨 작당이 틀림없답니다. 자백을 강요하였고, 부인하고 버티면 형언 할 수 없는 고문을 가했답니다. 결국 간첩죄로 10년형을 받고 만기 복역했다고 합니다. 그 형님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내 젊음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어요. 일생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이번 재심에는 김형수 씨가 빠졌지요? 진화위에서 다음에는 그 형님 재심 절차가 꼭 진행되게 부탁드립니다. 김춘식이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배를 그만 타고는 목수일도 하다가 2000년도부터는 냉면 장사를 시 작했습니다. 함경도식 냉면 기술을 익혀 냉면 가게를 차렸습니다. 상호 는 아버님 고향 함경남도 단천군을 따서‘단천냉면’로 정했고요. 성실 히 열심히 일했습니다. 덕분에 가게가 알려지고 찾아오는 단골이 많았어요. 찾아오는 손님 중 고덕일이라고, 속초경찰서 주임 한 사람이 있었어요. 몇 년 동안 안 보이더니 갑자기 찾아와서 반가웠습니다. 나는 그 친구 집이 춘천이니 고향 근무지로 간 줄 알았는데, 계속 속초에서 근무했답니다. 고 경감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무리 내 돈 주고 사먹는 음식이지만 올 때마다 형님 사찰하는 느낌이 들어서 올 수 없었어요.”
고덕일 씨는 자신이 보안과로 발령 받고 기록을 보는데 내 자료가 있 더라고, 몰랐을 때는 몰라도 알고 나서는 올 수 없었답니다. 정보 형사 로서는 손님으로 온다 해도 마음 한자리 감시자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 고, 그래서 보안과 근무 중에는 일부러 안 온 거라며, 솔직히 말하더군 요.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나는 이제 초연합니다. 그래도 다음 재심 결과를 기대합니다.
“오랜 시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한 시대 고통의 짐을 나누어 지지 못한 것에 마음이 아픕니다. 말씀하신 내용 대화록으로 구성하여 역사 의 기록으로 남기겠습니다. 재심 공판 일에 뵙겠습니다.”
진화위 위원 김정난 교수가 먹먹해진 가슴을 추스르면서 녹음 종료 버튼을 눌렀다.
설악신문 기자 염경일은 이번 납북귀환어부 진실규명 민관합동추진 단의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염경일 기자가 만난 사람은 80대 노인 김상기였다. 노인의 말씨에는 진한 함경도 말투가 남아 있었다.
내 나이 열 살 때였습니다. 이북은 겨울이 일찍 오지요. 1951년 12월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구만요. 국군이 남하하면서 소개 명령을 내렸 더랬어요. 중공군이 동계 대작전으로 밀고 내려온다고. 그런데 외삼촌 두 분이 지난 번 국군이 북진해 여길 점령했을 때 치안대원을 했거든, 그러면 이제 인공 치하가 되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어. 그래서 우리 가족은 외삼촌들과 함께 피난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내 고향이요? 우리 고향은 함남 북청군 속후면이야. 반 농사 짓고, 반 고기 잡는 동네였어. 마을 동리에서 바닷가로 이어지는 곳에 어마어마 한 모래산이 있었어요. 아마 해안사구(海岸砂丘)라고 하지. 우리 어렸을 때 썰매를 타고 놀았지. 우리 고향 짝고치 마을 사람들 친목 모임을 ‘모래산’이라 합니다.
학교? 아, 그래요. 거기서 소학교 3학년까지 다녔어요. 속후인민학 교, 우리 마을이 창성리인데 속후면 면소재지까지는 시오리 길이었어요. 교탁 오른쪽에 김일성 사진, 왼쪽에 스탈린 대원수 사진. 김일성 장 군 노래를 하루에 세 번씩 불렀어.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아 이름도 그리운 어쩌고 아직도 기억하지. 기억이란 무서운 거야.
우리 집은 부모님, 나, 동생, 큰집 어머니, 사촌 형, 삼촌들, 외삼촌들 가족 모두 함께 내려왔어요. 친척 집에 고기잡이배가 있었지. 창이배라고 부르는 돛단배, 그걸 얻어 타고 친척들과 함께 내려올 수 있었어요. 할아버지만 남으셨는데….
그때 큰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과부된 큰어머니가 아들 하나 데 리고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어요. 큰어머님이 그랬어요.
“아버님, 날씨도 춥고 노인네가 먼 길 떠나면 위험합니다. 그랬다가 는 뭔 일이 생길 줄 모릅니다. 우리가 내려갔다가 며칠만 있다가 올께 요. 그러니까 참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버님.”
그런데 아버지와 숙부 두 분이 가타부타 아무 말 못하는 거라. 하긴, 당시는 금방 다시 올라올 수 있을 거라 모두들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어린 내가 할아버지를 보았는데 조부님이 우리를 보는 모습이 무척 슬 프더라고. 아주 간절한 표정, 애처로운 표정,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말 라고 하는 듯 두 눈이 허망할 만큼 슬퍼 보였는데…. 70년이 지났는데 도 할아버지 그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구먼.
80대 노인 김상기는 어렸을 때 일을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까마득한 옛일을 짚어 나가는 노인의 두 눈에 눈물이 어룽졌다.
우리는 남하하는 군수송선 따라 바람에 의지해 내려왔답니다. 창이 배는 큰 돛과 작은 돛으로 방향을 잡고 바람을 탑니다. 겨울바다는 추 웠고, 하늬바람 북풍은 거셌습니다. 바람이 없으면 노를 젓고요. 고성, 속초, 주문진, 삼척, 울진 해안을 거쳐 부산까지 내려갔어요. 물자를 구 하러 가끔 올라온 해안 마을에는 피난 내려간 빈 집이 많았어요. 남의 빈집에서 얼마간 살림을 차리고 살다보면 국군이 저 아래로 내려갔다 는 소식이 들리고, 그러면 또 따라 내려가고 그렇게 부산까지 따라 내 려갔어요. 부산에서의 생활은 정말 거지가 따로 없었어요. 움막살이에 먹을 게 없으니 깡통 차고 한 살 위 6촌 상우 형과 시장, 부둣가 온 데를 헤매며 다녔어요. 국제시장 대화재가 일어나고 나서는 피난민들 끼리 더 각박해졌어요.
1952년 가을경에 정전 회담 소식을 듣고는 북으로 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뭐 대번에 속초에 정착할 수는 없었어요. 다시 포항, 울진, 삼척 정라진, 강릉 주문진을 거쳐 올라왔어요. 삼척 정라진과 주문진에 서는 꽤 오래 머문 것 같아요. 창이배 주인집과 아버지, 삼촌들은 고기 잡이를 할 줄 아니까요, 큰어머니, 어머니는 부두 물량장에 나가 오징 어 배를 따고, 잡고기를 얻어 읍내를 돌면서 팔아 곡식과 바꿔 오고 그 렇게 근근이 생활하다가 부모님이 속초에 함경도 피난민들이 모여 산 다는 소식을 들었던 모양이요.
올라온 속초 청호동은 허허벌판이었어. 얼마 간 있는 해송 솔숲을 빼면 그냥 모래벌, 모래톱이었어요. 피난민들한테는 그냥 공유수면으로 보인 거야. 미군 간이 야전병원 막사 몇 채가 있었고. 미군 수송선, 나 중에 들으니 상륙함(LSD)이라 부른다는데 이 배가 아가리를 벌리면 엄청난 군수 물자가 쏟아졌어요. 쏟아진 수많은 군사물자는 모두 널빤지로 포장이 되어 있는데 미군들은 이 널빤지를 마구 버리는 거라, 피난 민들은 기다리고 있다가 이걸 얻어 모두 집 짓는 재료로 아주 요긴히 썼어요. 처음에는 임시 주택이라 움막식으로 대충 지었지만 더 올라갈수 없다는 걸 알게 될 즈음에는 본격적으로 주거 주택을 짓기 시작했지. 미군 폐드럼통, 군 목재, 씨레이션 깡통, 루핑 거적때기 모두 훌륭한 건축 자재였어요. 모래벌 웅덩이를 메워 함경도식 방 하나, 부엌 겸 마루 하나 일자집이 지어지고, 집과 집이 이어지고, 마을이 만들어졌어 요. 영흥 마을, 신포 마을, 신창, 흥원 마을, 물 건너 읍내 금호동 언덕 비탈 아래 또 한 마을, 동명동 감리교회 언덕 아래에는 단천 마을… 우리 속후면 창성리 사람들의 청호동 부락은 짝고치 마을.
정전이 확정된 이후에도 속초에는 미군정이 그대로 이어졌다. 속초, 고성, 양양의 미군정 기간은 1951년 8월부터 1954년 11월까지, 군정사 령부가 철수할 때까지였다. 미군정은 피난민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청 호동 모래벌은 대부분 국유지라 함경도 사람이 무작정 점유하며 집을 짓고 사는데 미군정은 암묵적인 동의를 했다. 정착 비용이 다른 피난민 촌에 비해 훨씬 덜든 게 이곳을 고향 마을 삼아 이름 붙이고 눌러 살게 된 큰 이유였다. 그러나 “한 발자국이라도 고향 가까이 가고 싶은 열 망”의 발로는 어떤 명분보다 앞선다.
염경일 기자는 노인을 아련한 표정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이제 고향으로 올라가긴 글렀다고, 나를 끌고 학교로 갔습 니다. 속초국민학교, 인민학교를 폐하고 이제 국민(초등)학교로 출발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던 거라, 선생님이 묻더라고.
“너, 고향 있을 때 학교 몇 학년까지 다녔지? ”
“인민학교 3학년요.”
“그래, 그럼 넌 3학년.”
그래서 나는 3학년 학생으로 3년 어린 아이들과 동급생이 되었어요. 6촌 상우 형은 4학년으로 들어가고, 내가 속초에서 태어 난 4촌 동생들 하고는 나이 차이가 나서 상우 형하고 친하게 지냈지. 그 상우 형님 몇 해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 집 사위가 언제 집안 사람들 명절에 모인 자리에서 북청물장수 이야기를 하더라고. 박완서라는 소설가가 있는 데 그 어머니 개성에서 내려와 서울 서대문 비탈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데 북청물장수가 오기만 하면 어린 자기도 못 먹는 쌀밥과 고기반찬을 대접해서 어린 여자아이는 혼자된 어머니가 딴 마음을 먹었다고 오해를 했다네. 나중에 들으니 그 물장수 아들이 경성제대 학생이라고, 그 래서 어머니는 북청물장수에게 경의를 표한 거라고, 북청 사람들은 자 신은 주려도 자식 교육을 위해서 못할 것 없는 사람들이라고.
상우 형님 막냇동생 상락이는 이북에서 내려올 때 갓난아기였어요. 그 집 당숙모는 명태, 가자미 고기다라이 이고 온 사방을 돌아다니며, 자식 공부를 시켰는데 서울 유학 간 상락이가 어머니 고생한다고 속초 로 무작정 내려오니 회초리 쳐 서울로 다시 보냈다 하네요. 상락 동생 은 결국 단국대학교 학장까지 했지요.
청호동 실향민들은 함흥, 흥남, 원산, 단천, 흥원 사람들도 꽤 있지만 주류는 북청군 사람들이지요. 그 중 아랫동네 신포 마을이 제일 컸어요. 북청 사람들이 신포읍 출신, 속후면 출신, 신창읍 출신으로 나뉘어 있어도 북청사자놀이 행사 때는 하나로 뭉치지요.
1957년인가, 58년인가 속초 중앙시장 가설무대에 처음으로 북청사자 놀이 공연이 열렸어요. 신포 출신 김수석 어르신이 기능보유자야. 이 분이 북청 사람들을 모아 북청사자춤보존회를 창립하고 첫 공연을 한 거야. 그 분은 사자춤 앞자리를 맡았고, 애원성(哀怨聲)이라는 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폐그물을 씻고 말리고 녹, 백, 적, 홍색 으로 염색을 해 사자탈을 만들었다고 합디다.
정월대보름 북청사자놀이는 엄청 났어요. 마을마다 장정들이 횃불놀이를 하고 집집마다 돌면서 사자춤, 양반춤, 곱추춤, 무동춤, 사당춤으 로 한바탕 놀이를 하면서 집안의 조령신, 부엌의 조앙신에게 무병장수, 무사안녕을 빌어 주지요. 백수의 왕 사자를 내세워 마을과 집안의 잡귀를 몰아내는 액막이 벽사 춤 놀이지. 사자 등에 아이를 태우면 명이 길어지고 복을 받는다고 해서 있는 집에서는 너도나도 재물을 바치 며 아이들을 놀이마당에 줄 세웠다오. 어렸을 때 대보름에 펼쳐지는 사자춤 놀이는 그야말로 장관이었소.
염경일 기자는 북청사자놀이 문화를 취재한 적이 있어 이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알고 있었다. 북한의 탈춤이 봉산, 강령, 재령, 은율, 서흥, 북청 탈춤 등이 있지만, 사자무(獅子舞)의 첫 손으로 꼽히는 것은 북청 사자탈춤이다. 북청탈춤은 속초 청호동 사람들에 의해 재현, 전승되면서 1967년 국가유형문화재 제15호가 되었다.
김상기 노인의 말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노인은 보기 드문 달변가 였다.
군에 갔다 와 다시 배를 탔습니다. 1960년대까지 연근해 어업은 열악했습니다. 속초 청호동 어부들은 여전히 옛날 방식 그대로 창이배로 고기를 잡았어요. 집어등은 카바이드 가스 불을 썼고요. 그러다가 이북 출신 김태구 씨가 일본 기술을 배워 와 동방공업사를 차리고 20마력짜리 소구 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말로 아끼다마리고 불렀던 직류 엔진을 속초 칠성조선소에서 생산하는 목선에 장착하고는 먼 바다까지 조업이 가능해졌어요. 이후 동해안 연근해 어업은 획기적으 로 발전하기 시작했어요. 속초 앞바다에서는 명태, 이까(살오징어의 일 본말), 양미리, 꽁치가 엄청나게 잡혔어요. 오징어 철에는 그 이까바리 배들이 밝히는 집어등 불빛으로 청호동 건너 동해 밤바다는 밤마다 휘 황찬란했습니다.
꽁치 배도 많이 탔는데, 보리 피는 봄부터 앵두 익는 6월 초까지 꽁치 산란기라 그 시절 손꽁치를 엄청 잡았어요. 손꽁치가 뭐냐고요? 손으 로 잡는 꽁치를 말하는 거지요. 산란기에 꽁치는 바다풀에다 알을 낳는 데 그 습성을 이용합니다. 꽁치가 떼 지어 다니는 곳에 배를 세우고 어부들은 뱃전에서 톳같은 바다풀을 손에 쥐고 살랑살랑거립니다. 산란 하러 바다풀에 꽁치가 비비적거리면 양손으로 낚아채는 거죠. 의외로 쉴 새 없이 잡힙니다. 잔인하다고요? 미끼낚시로 올리는 거랑 뭐 별반 다를 게 있나요. 1990년대 초반까지는 그렇게 많이 잡았습니다.
이제 함경도 음식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북청 지방은 겨울이 길어 김 치를 좀 싱겁게 담가 먹습니다. 고춧가루도 적게 쓰고, 젓갈도 많이 안 넣어요. 대신 명태, 대구를 툭툭 토막 쳐 생김치 사이에 양념으로 넣어 둡니다. 한겨울 땅에 묻어 둔 김장김치는 쨍할 만큼 톡 쏘고도 담백합니다. 그래서 김치 국물에다 국수를 말아 먹으면 그렇게 상쾌할 수 없어요.
20년 전쯤 갯배 선착장 근처 슈퍼가 드라마에 ‘은서네 집’으로 나오 더니 관광객이 청호동으로 더 몰려오기 시작했어요. 오징어순대, 아바 이순대, 가릿국밥(함경도 식 돼지국밥), 함흥냉면이 실향민 토속음식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어요.
북청 바닷가 사람들은 겨울에 명태 간으로 ‘애장’을 만들어 먹어요. 청호동에서도 명태 할복하고 남은 내장으로 뭐든지 해먹었지요. 갓난 아기로 내려 온 상락 동생도 그 맛을 잊지 못해 속초에 오면 애장만 찾 습디다. ‘통심이’는 명태 내장을 긁어내고 녹두, 김치, 두부, 돼지비계 를 섞어 넣어 만든 명태순대를 말하는 건데, 겨울에 밖에 매달아 뒀다 가 쪄 먹습니다. 기가 막히는 맛입니다. 그 옛날 옆집 숨소리까지 들리 는 오막살이집에서 고향음식을 해먹었어요. 어떻게든 해먹었어요.
50년 날들이 무던히도 흘렀네요. 여름 밤바다 안개 끼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그날 안개는 유독 심했지요. 엔진을 끄고 동틀 때까지 기 다리는데 자정 지날 무렵 갑자기 북한 군함이 들이 닥쳐 우리를 끌고 간거라.
솔직히 내가 내려온 사람이잖아. 그게 내심 더 걱정이 되었어요. 모르는 사람은 내가 이북 고향이라도 다녀온 줄 아는데 그때는 고향 생각 보다는 솔직히 집에 있는 가족 걱정이 더 컸어요. 가장이 없는데 생계 가 당장 막막할 거고….
지도원 동무라는 사람이 질책하듯 물었습니다. 우리를 왜 버리고 내려갔냐고, 그 사람들은 속초 지역 정보를 너무 잘 알고 있었어요. 내 나 이 그때 서른둘이었는데 여태껏 강한 함경도 억양을 그대로 쓰니 대번 월남한 사람임을 알아채고 고향, 언제 어떻게 내려갔냐고 꼬치꼬치 캐 묻더구먼요. 우리 남한 사람 말로 아오지탄광 갈 반동분자인 게지, 그 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열 살짜리가 뭘 알겠습니까? 아버지가 제 손을 잡고 가자니까 배 타고 따라 내려간 거지요.”
나는 그 사람들이 잘 차려 주는 밥상도 싫었고…, 선전이라고 생각했 으니까요. 그 사람들이 매일 매일 되풀이 하는 학습도 그냥 건성건성 따라했습니다. 그리고는 속으로“이게 다 거짓말이다”하면서 때워 넘 기듯 하루하루를 견뎌냈습니다. 속초 부모님, 마누라, 아이들 생각하면 서, 언젠가는 내려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귀환하여 부모님, 마누라도 못보고 끌려가 겪은 두 달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북한 억류 1년 간 생활의 업보라고 생각하고 모 진 고통 이겨 냈습니다.
“우리 부친이 공산주의가 싫어서 온 가족이 내려온 반공 집안이요.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선장하고 모의해서 북방한계선을 넘어 가겠습 니까? ”
경찰의 신문에 나는 그렇게 답변 했습니다만, 별 소용없었어요. 집행유예, 두 달 속초 유치장에 수감되어 살다가 풀려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집사람이 부모님 모시고 여러 번 왔던 모양입니다. 아들 보려고, 남편 보려고 몇날 며칠 와 봤지만 소용이 없었겠지요. 귀환 어부 면회 절대 금지였으니까요. 
“이 새끼 봐라, 이 새끼 그 새 빨갱이가 다 되었네.”
경찰이 그런 말 하면 다음에 온 보안대 요원도 똑같은 말을 했어요. 나는 수조에 거꾸로 박히는 물고문, 관절 꺾이는 고문을 당했어요.
그래서 출소 후 오랫동안 후유증에 시달렸답니다. 처음에는 몸에 드러 나는 상처가 없어 집사람이 내심 안심을 하는 눈치더라고요. 그러다가 계속 기우뚱 기우뚱 걸으니 집사람이 눈치를 채고 왜 그러냐 하면서 울 기만 했지요. 애들 엄마 울화증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어요. 오래 전 먼 저 세상 떠나고 말았어요. 세상 짐은 그 사람이 더 많이 졌던 것 같아 미안하고도 슬픕니다.
김상기 노인은 비교적 담담한 표정으로 진술을 마무리했다. 오히려 염경일 기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2023년 8월 16일 오전 10시. 춘천지방법원 속초지원 201호 형사 법정 이 개정되었다.
옷을 단정히 갖춰 입은 김춘식, 김상기, 심원섭, 박성학이 각 피고인 석에 착석했다. 방청석에는 가족들과 김정난 교수, 염경일 기자, 납북 어부 진실규명 민관합동추진단 하광윤 단장, 진화위 강원지역 간사 등 여러 관계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지원장 박형범 부장판사가 우배석, 좌배석 판사와 함께 법대 위로 입 정했다. 3명의 법관은 피고인석과 방청석을 향하여 고개 숙여 인사를 하였다. 법정에는 팽팽하게 당겨진 침묵이 흘렀다.
재판장 박형범 부장판사가 나직하나 강단 있는 목소리로 판결 주문 을 낭독했다.
“2023 재고합 1호 반공법, 국가보안법, 수산업법 위반 사건. 피고인들은 무죄.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의 요지를 일간신문에 각 공시한다.” 이어서 납북 귀환 어부인 피고인들이 국가기밀 탐지·수집 및 찬양·
고무행위를 하였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1972년 당시 받은 판 결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으면서 이번 재심 사건의 무죄 판결 이유를 차분하게 읽어 내려갔다.
재판장은 사법부의 일원으로 지난 날 선배 법관들의 오류를 뒤늦게 바로잡게 되었다며, 너무 늦어 죄송하다며, 피고인들에게 사과와 위로 의 말을 했다. 그제야 피고인석의 노인들은 오열하기 시작했다. 지난 공판 기일 검사의 무죄 구형으로 예상을 한 판결이지만 그 선언은 노인 들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김정난 교수, 염경일 기자, 하광윤 단장은 일어나서 법대를 향하여 인사를 하며 재판부에 경의를 표했다.
일행이 법정을 빠져 나올 때 신축한 속초법원 청사 흰 벽면에 여름 햇빛이 비추어 하얗게 빛났다. 한 여름 절정을 지나 햇살이 그렇게 따갑지는 않았다. 청사 앞에서 간단한 인터뷰 후, 모두들 자축하는 자리로 향하면서 차량에 나누어 타고 있었지만 김상기는 일행에서 빠져 나왔다. 법원에서 내려오는 길을 지나 수복탑(修復塔)으로 향했다.
법원 아래 7번 국도와 시내로 향하는 도로가 교차하는 동명항 길 가에 세워진 수복탑. 미군정 시절에 세워졌다가, 1983년 수해 때 부서져 다시 세운 이 탑은 40년 세월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보따리 하나를 끼고, 어린 아들 손을 잡고 북녘을 향하여 손짓하는 모자상(母子 像). 망향의 한(恨)은 그대로였다.
김상기는 수복탑에 새겨진 글귀를 눈으로 읽으면서 먼 먼 고향마을 모래산을 떠올렸다. 노인은 한낮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래 오래 탑 주위를 서성거렸다.
“뼈에 저리도록 허구한 고된 날들 본시 살결 고운 북녘 아낙네 얼굴에 주름 고이기로서니 항시 머리 위에는 넓고 넓은 푸른 하늘이 열려 있기에 모진 풍파 욕된 세월에도, 북으로 북으로 고향길 더듬는 다리 비록 가냘프지만 성난 해일 거센 폭풍에 깊이 쌓이는 모래밭 헤쳐 가며 걸음걸음 내딛는 날들에 오늘도 동해 갈매기 노래 엿듣노라면 불현듯 아롱진 향수가 담뿍 어리는 그 길 쉬지 않고 가야만 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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