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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 베어 문 영광

한국문인협회 로고 최유혜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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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양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면을 위한 콘텐츠를 찾다가, 그 중 하나를 클릭하고는 반응을 보느라 영상 아래 댓글을 읽었다. ‘엄마가 추천해 주셨는데 영어를 못 알아 들어서 잠을 잘 잤다’엄마가, 라는 핑계가 내 가슴에 쏘옥 들어온 까닭은, 내게는 ‘엄마’같은 연인이 있었다. 어젯밤 망설임 없이 이 영상을 클릭했던 이유다.
‘오늘 세계 최고의 명문중 하나인 이 대학에서 여러분 의 졸업식을 함께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오늘 제 인생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세 가지 이야 기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인생의 점들의 연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 인생의 세 가지 이야기를’, 이 대목에서 걸려든 나  베개를 베고 수면무드로 진행하던 뇌세포들을 하나씩 흔들어 깨웠다. 낮추어져 있던 소리는 그대로 두고 첫 단계부터 놓치지 않으려 귀를 세웠다. 그렇게 듣기 시작하다가 온밤을 설 치게 되었으나 댓글을 원망하진 않겠다. 그 글을 쓴 이는 영어공부를 하려는 어린 학생이었을 테고, 한편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조각조각 주름진 연륜을 지닌 나로서는 난생 처음으로 단 하룻밤 만에 지나온 모든 과거를 돌아볼 기회였다. 영상을 몇 차례 반복해 듣다가 마지막 광고에서 건너뛰기를 누르지 못할 정도로 졸음이 몰려와 깊은 잠이 들었다. 알람 소리에 놀라 자리를 차고 일어날 수 있었던 건, 듣는 내내 가슴을 움직이던 뜨거움이 꿈속에서도 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겨우 더운 커피 한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아내의 의자에 앉았다. 환자 차트나 작성해 본 내가 겁도 없이 아내가 남긴 두터운 종이 노트 위에 펜을 들었다.
잡스는 어떻게 자신의 고난과 성공으로 채워진, 일대기나 다름없는 연설을 15분으로 요약할 수 있었을까. 역시 천재다. 그러나 당신만 터널을 지났나, 나는 더 힘든 세월을 지나왔고, 나름 성공했다고 자부한 순간도 있었다. 우연히 청취하게 된 이 연설문을 듣게 되어 영광이라 전하고 싶지만, 그는 가고 없다. 그걸 핑계로 그가 말한 주어‘I’는공적 인 자리이므로 낮추어‘저’나‘ 제 가 ’로 표기하고 상대적으로 열등감이 심한 나는‘나’라고 말하는 것으로 결코 기죽지 않겠다.
나 역시 세 가지만 말하겠다. 긴 사연 짧게. 그 첫 번째는, 장남인 나를 제일 귀여워해 주시던 아버지는 내가 중학생 때 돌아가셨고, 그때부터 새벽 신문을 배달하고 방과 후에는 내 위치가 정해진 기차역에서 잡동사니를 팔아서 어머니를 도왔다. 조부모님이 농사지어 준 채소들을 시장에 내다 팔던 어머니는 건너편에서 리어카를 놓고 장사하는 놈이 매일 노래만 부른다며 흉을 보더니 어느 날 저녁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다 팔던 채소들은 할머니가 대신했으며, 밥을 짓던 누이는 같은 마을에 사는 목수에게 시집가고, 나를 따르던 막내 남동생은 아들이 없던 작은아버지 댁에 양자로 입적했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고 부터는 역전에서 손님이 앉을 허름한 의자 하나 놓고 구두닦이를 했다. 그런 역경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고 학업에 열중한 결과 모두가 꿈꾸는 S대 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자퇴하고 입대를 했다. 군복무중 통역장교로 월남전에 파병되어 5년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 입시를 준비했다. 그 다음해 서울의 K대학 의대에 합격했다. 월남전에서 받은 월급으로 할아버지께 매월 송금하고, 일부 저축한 돈으로 학교가 멀지 않은, 휘경동에 작은 집을 장만했다. 2학년부터는 이병철 장학금을 받았고 그 액수는 가족들의 생활비까지 댈 정도였다.
의대를 마치고 정형외과에 몸담고 있던 나는 마침 자리가 빈 고향의 보건소장으로 갔다. 2년 가까이 근무하던 중 미국대사관에 이민신청을 했고, 6개월이 조금 지나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처음 응시한 캘리포니아 의사면허시험에 합격하고는 UCLA 대학병원에서 인턴을 끝마칠 무렵 개원할 곳을 소개받았다. 부부가 운영하던 소규모의 개인병원이었으나 부인의 건강이상으로 임대차 계약기간을 이어줄 의사를 찾는 중 이었다. 나로서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의사면허 하나로 융자 등 인수과정이 비교적 수월했다.
‘저의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나의 인생 2막’이라고 말하는 건 어떨까 싶다.
개업은 순조로웠다. 그 무렵 유일하게 가까이 사는 사촌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구역 장로님 댁에 갔다가 서울에 사는 조카 그림이 걸려 있는데 갖고 싶을 정도라며 사진이라도 보러 오라고 적극적으로 권하는 바람에 그날 퇴근 후 동생 집으로 갔다. 동생이 나서서 국제통화를 연결해 주었고 의대 학번을 시작으로 통성명을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서울 시간을 계산해 가며 날마다 국제전화를 했고, 그렇게 1년을 오가다가 결혼을 했다. 미국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운전만큼이나 서툰 아내 에게 병원 운영에 도움이 필요하다며 한의대 입학을 설득했고, 졸업과 동시에 면허시험을 합격한 아내의 수고 덕에 양한방종합의원이 되었다. 십여 년이 지나서는 작은 땅을 사서 조그만 병원 건물을 지었다. 난생 처음 탄탄대로였다.
그 무렵, 타주에서 의사를 하는 형이 소개했다며 독감치료를 받으러 왔던 환자가 자신이 운영하는 봉제공장 종업원 등 주변 사람들을 적극 소개하던 중 우리 동네로 이사까지 와서 더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내외가 찾아와 동업을 제의했다. 일본인 밑에서 전통 스시롤을 배 운 자신의 친구와 함께 1호점을 열면 장차 열 개 정도의 체인으로 성공 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며 몇 곳의 메뉴를 가져와 보이며 성공사례를 들었다. 운영은 자신들이 맡아서 한다지만, 무엇보다 부동산 소유도 함께 하는 외식업이라 크게 의심 없이 투자에 끼어들었다. 계속되는 적자로 은행융자를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마침내 식당건물이 경매시장에서 헐 값으로 팔렸다. 내가 모르는 사이 동업자 두 사람은 이미 파산신청을 마무리한 상태였으므로 은행은 그 차액을 두고 나만을 상대로 소송을 했다. 법원판결 후 은행 빚을 혼자 떠안고 오랫동안 허덕였다. 그들은 여전히 같은 장소에서 사장과 매니저로 영업하고 있었으나 은행과 재 판 중 증인이 필요했어도 스시 칼에 목이 베일까 찾아가지 않았다. 변호사를 통해 알게 된 것은 그들은 파산신청 직전 개인 부동산을 자녀들 명의로 변경했다는 사실이었다.
‘약은 쓰지만, 저에게는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살다보면 때로는 머리를 돌로 맞는 일도 일어납니다.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이 말에 두 배로 공감한 까닭은, 삶의 원칙을 지키지 않은 탓에 또 한 차례 둔기로 머리를 맞았다. 믿었던 아내의 지인으로부터 국제전화가 왔다. 용인의 전원주택 부지를 친구들과 매입했는데, 주변이 하루가 다르게 급상승한다며 자신의 옆 부지의 평수를 대며 투자를 권했다. 아내 는 계약금과 잔금을 대납해줄 40년지기 찐친에게 송금을 연이어 했고, 등기가 마냥 미루어지자 피해자들의 고소로 인하여 기업부동산 대표는 경제사범 3년형을 선고를 받았다. 피해자 명단에 없음으로 해서 자신 은 토지를 매입하지 않았다는 실토와 함께 상당한 커미션을 챙겼던 지인은 피해자가 된 주변인들에게 금액의 1/10에도 못 미치는, 진입로조 차 없는 남해 산골의 임야로 보상을 대신했다. 대납으로 지인과 연락을 주고받다가 낚이게 된 아내의 찐친이 어느 날 국제전화로 하소연을 하자 아내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기다려 봐, 금광이면 어쩌려고.”
그때 그 사기에 너무 쉽게 연류된 것은 호화로운 설득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동업으로 잃은 것의 일부라도 보상받겠다는 과한 욕심이 부른 화였음을 인정한다.
사기가 이렇듯, 전화를 먼저 걸어오거나 과도하게 친절히 다가오는 사람의 특징처럼 화려한 언어구사와 고가의 명품 치장 덕에 구분을 못 하던 시절은 그때로 막을 내렸다.
「인간의 대지」에서‘비행조종사에게 제일 두려운 건 바위’라는 말을 어렴풋이 기억한 나는 용암으로 녹이기 전에는 끄떡없는 바위처럼 덤덤히 살기로 했던 게 그 시기였다. 그런 험한 세상 속에서도 내 인생의 2막을 온기로 채워준 사람은 아내였다. 영양실조 등의 원인으로 병이 든 어머니는 누님을 통해 나에게 연락이 왔고, 미국으로 모셔와 십여 년간을 같이 살 수 있었던 것도 아내 덕이었다. 그러다 몇 년 전, 상상 못했던 지진으로 방패삼았던 바위가 반으로 쪼개졌다. 나는 조각난 바 위에 불로 지지듯 글씨를 새겼다.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이것은 아내 에게 바치는 세 마디가 되었다.
‘저의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을 몸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저는 약 1년 전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연설문 중, 이 한 단락에서도 중간부분들을 건너, 건너뛰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소중하다 보니 맥락을 그대로 인용하다 보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A4 사이즈 노트로 100장이 훨씬 넘을 것을 염려해 함부로 생략했다.
나의 인생 3막은, 약 4년 전 20일이라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손녀 생일을 시작으로 중간엔 내 생일까지, 가족행사가 많았던 5월이었다. 아내는 퇴근시에 늘 그랬듯이 문단속을 하고는 먼저 주차장을 향해 걷고 있던 내 뒷모습을 보고는 가까이 다가와 지적했다. 운전대를 잡은 아내와 나는 걸음걸이를 보고 느낀 점과 내가 느끼는 최근의 증상에 대 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총체적인 종합검진을 위해 집 가는 길에 위치 한 대학병원 분원 응급실에 가기로 결론을 냈다.
응급실엔 환자가 별로 없어 절차가 빨랐다. 검사결과 당수치가 엄청 올라가 있었다. 몇 달 전, 내 스스로 정기적으로 실시한 피검사나 소변 검사에서는 이상이 없었는데 일단 걸음이 불편하니 맡기기로 했다. 그 즉시 입원실로 이동시키고는 수액주사를 놓고 인슐린 주사약을 투약했 다. 그 후, 입원 3일 만에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는 상황이 닥치자 당혹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공복상태에서 날마다 진행된 많은 양의 채혈과 마취생태의 내시경 검사와 전신 CT 촬영 등 온갖 검사로 시달린 일시적인 현상이기를 바라고 있을 때 담당의가 청진기도 소 지하지 않은 채 들어와 서두르듯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신장 기능이 20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식은땀이 전신에서 솟았다. 그 발언에 이어 담당의는 아내 쪽을 보며 말했다.
“그동안 호스피스 전문 양로병원으로 모시겠습니까? ”
“아니요! 집에서 모시겠습니다.”
낯빛이 몹시 어두워진 아내는 어깨가 축 늘어진 채 힘겹게 말했다. “그럼 장비가 필요할 테니 직원을 연결하겠습니다.”하고는 입원실을 나갔다. 곧이어 간호사가 들어오자 아내는 잠깐 사이 정신을 차린 듯 평소 억양으로 말했다.
“들어올 때는 걸어 들어왔는데, 인슐린을 과량 투여한 것 아닌가요? ” “처방대로 했을 뿐입니다.”
간호사는 대답과 동시에 나의 시퍼렇게 멍든 팔에서 링거를 연결한 주사바늘을 뺐다. 나는 절망감에 눈을 꾹 감아버렸다.
그런 연유로 연설문의 이 대목 또한 특별했다.
‘저는 마취 상태였는데, 아내가 말해 주길, 의사들이 현미경으로 세포들을 관찰하다 울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희귀한 종류의 췌장암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듣는 순간, 나는 박수를 쳤다. 더구나 담당했던 의사들이 검사 결과에 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에서는 반성과 원망을 번갈아했다.
아내 말이 옳았다. 인슐린 과량 투여로 내 몸의 모든 장기가 지탱할 수 있었겠는가. 그날 퇴원 직전 아내는 먼저 집으로 가서 호스피스 전문 업체로부터 배달된 의료용 침대 등 장비들을 확인하고는 아들을 시켜 우리 병원에 남아 있던 링거 세트와 필요한 도구들을 박스 채 가져 오게 했다. 그날 나는 응급차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부터 간호사들 이 교대로 와서 혈압과 혈당정도를 측정하고는 현관을 나가면, 아내는 창문을 모두 열고는 머리끝부터 발바닥까지 뜸을 놓고 그 작업이 끝나 면 혈관에 링거를 매일 꽂았다. 인슐린을 씻어내기 위해서라는 걸 짐작 했다. 그렇게 20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화장실은 물론 재활을 위해 아내의 손을 깍지 끼고 뒤뜰을 걸었다. 호스피스 요양병원 팀들이 이틀 간격에서 삼일 간격으로 방문을 줄이던 어느 날, 간호과장이라는 남자와 낯익은 여자 간호사가 함께 방문했다. 나와 마주 앉은 간호과장 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검사결과 일을 다시 해도 되겠습니다.”
위로 섞인 말과 함께 그가 먼저 내민 손을 나는 꽉, 쥐었다. 환자 대 감독관이 아닌, 남자 대 남자로서 힘이 들어간 악수로 긴 터널을 마감 했다.
그들이 다녀간 다음날, 집 안 어디에도 내가 아팠었다는 험난한 시간 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제야 아내는 우리가 운영하던 개인병원 앞에 아무런 안내도 써 붙이지 못한 것을 기억해 냈다. 대표전화는 휴가기간 동안 그랬듯이 한인타운 보건소로 옮기고는 3개월째 단 한 번 도 체크하지 못했다. 아들이 대신 나가‘휴가 중이오니 응급시 911을 부르세요’라고 영어와 한글로 써 붙이고, 부동산 사이트에 광고를 올렸 던지 긴 공백을 끝내기 위해 적합한 세입자와 임대차 계약을 했다. 이 날로써 우리는 홀가분한 은퇴와 동시에 핸드폰을 다시 개통했다. 나를 되살리는 동안, 에어플레인 모드도 아닌, 전원자체를 완전히 꺼놓았던 탓에 우리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는 뒷담화도 들려왔지만 살아들 있기에, 남아도는 에너지라 생각하고 그들의 입방아는 무죄였다.
‘여러분의 시간은 유한합니다. 남의 인생을 사느라 낭비하지 마십시오. 타인들의 잡음에 여러분의 내면의 목소리가 묻히지 못하게 하세요.’
나는 이 말도 내 것으로 택했다. 이제 내 주변에는 선인장 가시 사이에 어렵게 핀, 몇 안 되는 꽃송이처럼 몇 사람만 남기기로 했다.
핸드폰이 개통되고 며칠 후, 새 원장으로부터 오전 시간만이라도 옛 환자들을 봐 달라는 부탁이 왔다. 갑자기 종료된 사연과 그간의 감사 인사도 써 붙이지 못함을 대신하는 의미에서 승낙하고는, 수개월 동안 봉사를 하던 중에 갑자기 코비드-19가 발생했다. 초기 대처가 미흡했던 지 미국에서는 엄청난 사망자수가 늘어갔다. 영안실도 장례식장도 문 제가 되고 있었다. 시신들이 화장장을 거치기 위해 3개월씩 기다려야 해서 냉동실에 보관하고 있다는 TV 뉴스를 보던 아내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우리 늙은이들이 코비드에 걸리면 아이들까지 문제가 되니 청 정한 제주도로 가는 건 어떨까요, 하기에 나는 코비드 걱정보다 제주도라는 말에 귀가 번뜩했다.
인천공항의 입국심사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서울에서 2주간의 격리를 마치고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다. 제주에서의 숙소는 공항 가까운 신 제주 안에 있어서 모든 게 편리했다. 아내는 렌트카를 운전해서 바다로 산간으로 좋은 곳을 잘 찍어 다니며 맛있는 것을 많이 먹여 주었다. 볼만 한 건축가의 작품도 꽤 돌아다녔다. 남들은 코로나로 조심하고 있을 때 우리는 마치 은퇴기념 여행인 듯 파란하늘과 초록바다, 멀리지평선과 파 도와 바람을 맘껏 누리기 위해 바닷가의 야외카페들도 찾아다녔다.
그렇게 잘 지내던 어느 날, 잠결에 낙상으로 머리 한쪽 부분의 심한 통증과 더불어 일어날 수조차 없이 전신이 아팠다. 사이드 테이블에 부딪친 얼굴 측면이 부어오르자 얼음 팩을 해주던 아내가 점점 심해지는 나의 신음 소리에 이렇게 물었다.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
“응! ”
아내는 119에 전화를 했고, 십여 분 사이 응급요원들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응급실에 들어가자마자 찍은 CT결과를 기다리던 중 수련의 명찰을 단 이형기가 다가와 말했다.
“뇌수술을 해야 합니다.”
아내는 CT를 오진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눈치였지만, 뇌수술이란 건 상상도 못했던 나는 소리를 질었다.
“수술은 병원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은 아니야! ”
더구나 담당의가 결과를 들고 나타나기 직전 혈압약을 주려던 보조 간호사는 쥐고 있던 알약이 바닥에 떨어지자 컵에 들고 온 물만 먹이는 걸 목도하던 차에 뇌수술이라는 말에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환자에 대한 설문지를 작성하고 있던 아내는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새벽이고 아직 정상업무 시간이 아니어서 숙련된 직원들이 없는 듯해 불안하던 차에 뇌수술이라니. 두꺼운 두개골을 믿고 얼음찜질이나 하고 참았어야 했다는 생각에 후회가 몰려왔다. 산소기를 달고 중환자실로 실려 가면서는 끝내 기함을 하고 말았다. 다음날부터 체온이 오르자 링거를 통해 해열제를 투약하고 있을 때, 때마침 중환자실 밖에서는 코비드로 면회사절이라는 직원의 설명에도 간곡히 부탁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진찰하던 수련의가 문밖으로 나갔다. 수련의가 아내 에게 하는 말을 듣자니, 내 육신이 마치 도마 위에 오른 생선처럼 참담한 기분이었다. 목을 절개하는 것에 서명해 달라고, 준비했던 서류를 내미는지 아내의 항변하는 목소리가 경비원이 쫓아올 정도로 크게 들렸다.
‘감사하게도 지금은 나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본 경험입니다. 앞으로 수십 년간은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나도 다시 살아났다. 아내는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나의 상태가 오진임을 알아채고는 서울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승낙 직전 소방관은 헬리콥터가 육지로 가다가 추락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으나 아내는 일 단 섬을 떠나야 한다고 했단다. 오후 늦게 허가된 헬기를 타기 위해 중 환자실을 떠나기 직전 며칠간의 병원비로 1,470만 원을 정산해야 한다 는 규정과 함께 퇴원 수속을 진행하던 중 보훈병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수련의에게 코비드-19 검사결과를 보내달라고 하자 그제야 검사하겠다는 말에 당황했을 보훈병원 담당자는 보호자를 바꿔달라고 했고, 서울 도착 후 코비드 검사를 위해 하룻밤은 컨테이너에서 지내는 것에 동의하냐는 질문에 아내는 그것조차 감사하다고 했다.
나중에 아내가 말하길, 그 며칠간 택시로 병원을 오가며 목적지를 말 할 때마다 기사 두 분이 힌트를 주었다고 했다. 젊은 기사 분은 백미러를 보며 말했다.
“건강해 보이시는데 왜, 병원엘 가세요. 그 병원에서 우리 장인, 장모가 오진으로 돌아가셨어요.”
다음날에, 또 한 기사 분은 목적지를 듣더니 이렇게 말했단다.
“전에 대기업에서 운전했는데 모시던 어른이 연세가 드셔서 혹시라도 내려오셨다가 아프면 병원이 제일 걱정이라며 더 이상 안 내려오세요. 그래서 택시를 하게 됐어요.”
아내는 그런 어려운 말들을 내뱉어준 분들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보훈병원 입원 후 받은 검진결과 폐렴이라는 진단과 함께 입원치료를 한 결과 완치 판정을 받았다.
제주로 돌아온 우리는 도와주신 119 대원 분들께 마음을 담은 조그만 인사를 하려하자 물질적인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기에 그분들의 이름만 이라도 여쭙게 되었고, 아내는 그 즉시 제주도청의 ‘칭찬합시다’에글 을 올렸다. 그날의 글을 여기에 옮겨 쓰겠다.
제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지난 4월 16일 어둠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출동해준 소방헬기의 소방위 천경락 씨와 김규환 씨, 그리고 제주 소방항공대 구급대원 소방교 김치방 씨 덕분입니다. 특히 김치방 씨는 병 원 응급실에서 보여준 실망과 원망을 한순간에 지워주었던 것이다. 나뿐 만이 아니었다.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지면서부터 의식이 없던 환자가 극진한 보살핌을 알아차렸는지 눈을 뜨고는 방호복차람의 김치방 씨를 한동안 바라보는 것을 보면서 의술은 인술이라는 말의 실체를 깨달았다. CT를 찍은 직후 뇌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응급실 수련의 말에  ‘수술은 병원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의사이며 환자였던 남편에 이어 수련의는 ‘이제부터는 아스피린도 안 된다고, 대신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남편을 위 해 CD를 가지고 제주대학병원으로 찾아갔다. 수술은 필요 없고 아스피린 은 계속 복용해야 한다는 소견을 듣게 된 나의 선택은 서울로 가는 것이었다. 대한항공 환자담당 김수련 씨는 병원으로부터 진단서를 받아본 직 후 예약된 여러 석을 취소했고, 대신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진단서를 119 와 통화 후 팩스를 해주는 등 당황한 나를 대신해 설명해 주었다. 그 정도 의 절박한 상황에서 헬기를 허락해준 119 가족과, 하늘을 나는 동안 불편 해하는 환자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는 모습은 모든 원망을 잊기에 충분했다. 그날 밤, 자정이 넘어서야 제주로 돌아왔을 출동대원들, 하늘의 별을 보듯 땅에서 꽃을 보듯 그대들을 믿고 섬으로 돌아왔습니다. 진정 고맙습니다.
필사하듯 옮겨 쓰는 내내 아내답지 않은 어수선한 글임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 당시 얼마나 지친 상태였는가를 느끼게 했다. 뒤늦은 연민 과 이것이 아내의 마지막 글이 되었다는, 가슴을 치는 전율과 함께 눈 물이 앞을 가린다.
이 글을 올리고 며칠 후, 믿기지 않는 모습으로 잠들어 있던 아내, 그 토록 힘든 줄은 상상도 못했던 나는 바보천치였다. 나의 반평생, 엄마 같았던 아내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눈을 감는다. 너무 고맙고, 너무 미안하고, 사랑해, 라고 바위에 새기 듯 또 한번 꾹꾹 눌러 삼킨다.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결혼사진 속 아내의 두 눈이 나를 이쪽저쪽 따라다녀서 액자를 돌려 세우고는 그 옆에 유골함을 놓았다.
아내 사망 당시 당연히 고향의 선산에 매장을 생각했던 나로서는, 내 가 죽은 후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둘을 함께 매장할지 아직도 결정을 못하고 있으나, 내가 어떻게 죽을지는 계획하고 있다.
고향에서 보건소장을 하고 있을 때, 돈은 벌면 땅에 묻는 거라는 사촌 형의 조언으로 할아버지 사시는 농가 옆으로 농지를 조금씩 늘려가고 있었다. 그 무렵 아버님의 친구 분이 찾아오셔서 물려받은 임야를 매수 해 주기를 부탁하기에, 토지등기 때마다 마주하는 지적계장이 고교 동창인지라 매번 민망하던 차에 양자로 간 막냇동생의 이름을 빌려서 샀다. 그러다 미국에서 자리 잡은 후, 아버님 묘지를 이장하려다 동생과 소송이 되었다. 그때 마주친 법정 분위기는 반 이상이 혈육 간의 송사라는 게 충격 자체였다. 왜냐하면 임야 사건 이전에 동생은 이미 휘경동 집을 삼켰으나, 나는 그 일로 소송하진 않았었다. 삼킨 과정은, 무역 회사 일로 출장을 왔던 동생이 휘경동 집을 팔아 안산에 땅을 사면 훨씬 가치가 있다며 위임장을 내밀었다. 영사관까지 가서 공증해주면서 당부했던 건, 집을 팔면 문간방에 살던 조카가 결혼자금으로 전세 놓은 것 갚고, 본채에 들어와 사는 막내 여동생 가족 집 마련하는 데 보태주고, 남은 것만으로 땅을 사라 했다. 그런데 매도 후 연락이 끊기고 전후 사정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터였다. 명의를 빌렸던 임야는 판결 후 선 산이 되었다. 가족 묘비를 크게 세우고, 아버님과 어머님을 합장하고, 흩어져 있던 조부모님 산소를 차례로 이장했다. 먼저 간 누님 내외도 누인 그곳에, 아내의 산소를 준비하기 위해 마을 어른들이 소개한 지관과 장의사 직원에게 상담하던 중 나이 먹을 대로 먹은, 누님의 장녀인 조카가 황망함에 눈물조차 흐르지 못하던 내 앞에서 근거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삼촌이 옛날에 이 산 나 준다고 했는데, 이장님 여기에 텐트 치고 살아도 되나요? ”
나는 갑작스런 한마디에 전신에 오싹함을 느꼈고, 아내를 미국으로 데리고 가기로 결정함으로서 모든 절차를 뒤엎고 화장장을 선택했다. 
사망 며칠 만에 받아든 유골함은 터무니없이 가벼웠다. 하루아침에 압축된 무게라니. 화장을 원치 않았을 아내의 유골함을 끌어안고 울다 지친 그날 밤, 악몽에 시달렸다. 스님들의 다비식처럼 붉게 타는 장작 더미 위에 손발이 결박당한 채, 그 조카가 화형당하는 꿈을 꾸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누님 가족을 떠올렸다. 그 조카는 내가 보건소장으로 근무할 때, 직원이 내 사무실 문을 노크하고는, ‘소장님, 손님 오셨습니 다’하면 겁이 덜컥 나곤 했던, 바로 그 매형의 딸이기도 하다. 전날 연 장을 잡히고 술을 마셔서 목수 일을 못 가니 연장 좀 찾아달라며 손 벌 린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 매형이다. 거기에다 처음엔 사정도 모르고 매형의 이름인, 박규진으로 토지등기를 한 것도 있지만 누님 사는 게 워낙 딱하여 주고 말았으나, 매형은 술병으로 일찍 떠나고 말았다.
피붙이에 대한 쌓이고 쌓인 서운함으로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 조카로부터 계속 오는 카톡은 소리끔을 했다가 모아지면 삭제하고 국제전화번호는 차단을 눌렀다. 그 후유증으로 어쩌다 초인종이 울리면 카메 라를 설치한 아들 덕에 화면을 확인 후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 꿈쩍 않은 버릇이 생겼다.
아내 생전에, 우리 부부는 몇 십 년을 자동차 한 대로 출퇴근했고, 핸드폰도 하나, 개인 컴퓨터도 하나로 생활했기에 나는 기본적인 것을 제외하면 기계치에 가까웠던 걸 이것저것 누르다 보니 많이 발전했다.
아내의 친구가 농담처럼 붙여준 아내의 별명, ‘문서 없는 노비’를떠 올리자니, 맞는 말이 되었다. 금테항아리 안에서 쉬고 있는 아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작업으로 조용히, 그래서 거의 모든 이메일 과 카톡, 전화까지, 저음일 뿐 아니라 삭제나 차단을 누르는 것이 이제 는 일상이 되었다. 어느 날엔가는, 아내의 지인이 식사 한번 같이 하자 는 문자를 보내와서, 받자마자 회답했다. ‘과체중으로 다이어트 중이 오니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찍어 날리고 보니 그건 내 스타일이었다. 이처럼 모든 이의 기억 속에 아직도 아내가 살아 있는 건,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세계 인류에게 내린 극한 처방인 비대면, 그 발상 덕 분이기도 하다.
비대면 덕에 시끄러워진 애플 기기들의 다양한 콘텐츠로 우울증 치료약 없이도 잘 지탱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아내의 소지품을 정리하다 노턴 사이먼 미술관 회원증이 손에 잡히는 순간 붓을 완전히 꺾은 줄만 알았던 아내에게 그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싶은 마음에 바로 간 적도 있다.
주차를 하고는 낯설고 서툰 진입로를 통과해 티켓 구입이 아닌 회원 전용 줄에 섰다. 창구 앞에 진열된 팸플릿을 하나 뽑아 펼치고는 전시 장의 구조와 내용을 대충 파악한 나는 14세기부터 순서대로 전시장을 돌기로 맘먹고 발을 떼었다. 전시실로 들어선 나는 시대를 잘 보여주는 사실적 그림들과 그 옆에 작게 써진 화가의 이름과 생애, 그리고 작품 이해를 위한 글들을 하나씩 읽어 갔다. 교과서에서 본 듯한 그림들도 제법 있었다. 16∼17세기 전시실을 지나서 19∼20세기 전시실을 들어 서고부터는 간단히 이름과 생애, 제목 등 한두 줄만 읽었다. 미술관 분 위기가 익숙해질 즈음 벽면 중앙에 커다란 화폭이 눈에 확 들어왔다. 쓰레기를 줍는 노인을 맞닥뜨리는 순간 어디선가 본 듯해 한참을 마주 하는데 마침내 기억이 떠올랐다. 아내의 핸드폰에서 수많은 사진들을 삭제하다가 누구지, 했던 이 사람. 액자 속의 그림만 찍은 상태여서 이런 대단한 인물인 줄은 상상도 못하고 삭제해버렸던 이 사람. 아내는 어떤 연유로 그 많은 인물화 중에, 조금 전에 지나온 렘브란트의 자화상도 아닌 가난한 이 노인을 핸드폰 속에 저장했던 걸까. 넝마주이 노 인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나는, 당신을 연모한 내 아내를 기억합니까, 라고 작은 소리로 묻고 싶었다. 화가의 이름을 확인하려고 옆으로 다가 갔다. 에두아르 마네(프랑스, 1832∼1883), 캔버스에 오일. 그러면 83- 32=51세에 사망. 다시 몇 발짝 물러서서 지친 모습의 노인을 올려다봤다. 어린 시절 굶어본 나는, 내 아내가 엄마였다면 훔쳐서라도 먹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배고픈 노인을 위해 지폐 몇 장을 놓고픈 충동을 겨우 면하고 돌아섰다. 이어지는 벽면을 따라 작은 전시장에 들어서자 드가의 조각들과 파스텔화가 다수였다. 서서히 지쳐가는 나는 천장이 유독 높고 넓은 전시실을 지그재그로 관람하다가 추상화를 만나면 이 해가 어려워 액자틀만을 보며 설렁설렁 지났다. 그러다 강열한 색상의 여인 앞에서 잠시 멈추었을 때 제법 연륜이 있어 보이는 남자 경비원이 내게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책 읽는 여인은 피카소의 애인이고 저 창가의 남자는 피카소랍니다.” 나는 보답으로, 엄지 척과 함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시실을 옮겨 지나다가 눈에 익숙한 반 고흐의 자화상을 만난 순간, 미술시간에 배웠던 그의 독특했던 생애가 떠올라 암산을 했다. 37세(1853-1890)에 사망, 그의 작품 몇 점을 연달아 보았다. 화가의 어머니 초상화를 바라보는 데, 액자 속에서는 비록 웃고 있으나 초록색 낯빛이 마치 내 얼굴색인 양 서로에게 짠한 마음이 들어 이내 돌아서 전시실을 나왔다. 기력이 소진되어 특별전시관 등은 생략하고는 조각이 있는 정원을 천천히 둘 러보는데 끝자락에서 야외 카페가 만났다. 바로 여기가 아내의 쉼터였 을 거라는 감이 왔다. 아내가 마셨을 뜨거운 디카페인 커피를 한 잔 사 가지고 파라솔 밑에 앉았다. 커피를 아내의 자리에 놓아주고는 탁자 위 에서 두 손을 깍지 낀 채 연꽃을 바라보느라 커피는 혼자서 식어 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 눈에 띄는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고 있는데 마침 퇴근하던 아들이 전화를 했었다.
“아빠, 어디세요? ”묻기에 주유소인데 간판이 싱클레어라니, 헤르만 헤세의「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가 왜 여기에서 나오니, 하고 아들 에게 말하자마자 돌아온 대답이라니, “그렇게 많은 책을 읽으신 분이 왜 지옥에서 사세요. 친구 분들도 만나고 그러세요.”한다.
아들은 내가 혼자되어 돌아왔을 때 집 안 여기저기에 본인이 설치한 카메라를 통해 애비를 감시하고 있었으리라. 그런데, 지옥이라!
네가 지옥을 봤어, 라고 차마 묻지 않았다. 때마침 14∼16세기 전시 실에서 본 지옥과 천국들을 떠올렸었다. 작고한 화가들은 그림만으로도, 대화 필요 없이 조용히 느끼는 것만큼 누릴 수 있어서 좋았다. 아내 역시도 그래서 회원증을 만들었나 보다고 생각했었던, 그날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그 미술관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는데, 노턴 사이먼은 그 많은 컬렉션들을 남겨두고 어찌 눈을 감았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슴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그 외에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어제는 유독 아내의 빈 자리가 커서 아무것도 챙겨먹지 못한 채, 아내의 흔적 가득한 집 안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에어컨도 틀지 않은 무덥던 한낮에 아내 이름으로 국제우편이 배달되었다. 봉투를 뜯자 첫머리에‘원고청탁서’였다. 어떤 방식으로 통보할까 하고 반나절을 고심해도 해답을 못 찾아 난감한 채 생각은 밤 까지 이어졌다.
반수면 상태에서‘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식 연설’을거 듭 반복해 들으면서 내 기억의 점들을 하나하나 불러낼 수 있었다. 그러다 끝내는 내 이야기를 써서 아내 이름으로 정리하고픈 갈등의 불씨가 되었고, 오늘 아침 본격적으로 글을 쓰다가 연설문의 부분, 부분을 다시 듣는 순간 내린 결론은 원고청탁 매수에 맞추기로 한 것. ‘가슴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 외에는 모든 것이 부차적인 것’이란 말도 내 방식 대로 해석하고 주저하지 않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계기가 된, 거의 20여 년 전 음성을 뒤늦게 나마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이 필연 이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스티브잡스가 시작부분에서‘영광입니다’라고 한 것처럼 벅찬 감정들의 유효기간이 몇십 년만이라도 길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털어내기 위해 펜을 쥔 채 창밖의 넓은 허공을 올려다본다. 하얗게 뭉쳤던 구름들이 서서히, 아주 서서히 흩어진다. 흩어져 사라지는 그 길이 가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보다 멀리, 아주 멀리, 400만년 동안 죽은 1,000억 명이 넘는 그들 속으로 조금 먼저 간 아내가 남긴 영광의 잔여분을 허락도 없이 충실하게 누린 하루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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