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1 2024년 9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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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좋다.
잠에서 깨어나 커튼 사이로 스며든 햇살을 살며시 보면서 숨을 크게 들이쉬니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참 좋다. 이렇게 또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분께 기도를 올리고 나면 나도 모르게 산뜻한 의욕이 샘솟으니 더욱 좋다.
아직 변호사 현업에 종사한다고는 하지만 일감이 적당히 줄어 이곳 양평으로 내려와 살면서 재택근무를 주로 하니 오늘 같은 날 출근을 하지 않아도 돼서 참 좋다. 거실에서 실내 체조를 간단히 하고 나서 아내가 방금 텃밭에서 직접 채취한 블루베리와 부추 등으로 만들어 주는 상큼한 주스를 마실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마당으로 나와 보니 얼굴은 해님의 다사로운 미소와 바람의 상쾌한 간지럼을 느끼고, 귀는 뒷산에서 보내오는 새들의 지저귐을 들을 수 있어서 참 좋다. 화단 곳곳에 아내가 정성 들여 가꾼 백일홍, 벨가못, 백 합, 노발리스 장미, 한련화, 수국 등이 눈 비비며 환하게 웃어 주니 더욱 좋다.
면도 거품을 얼굴에 바르고 거울을 보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그래도 눈동자가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있어서 참 좋다. 남에게 건강을 뽐낼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별 지장 없이 할 수 있을 만큼은 될 것 같으니 더욱 좋다.
아침 밥상에 앉아 갓 지어 낸 밥과 국에서 피어오르는 구수한 내음을 맡으며 아내의 음식 솜씨가 항상 내 식욕을 고르게 지켜줌을 고마워할 수 있어서 참 좋다. ‘짠순이’소리를 들으면서도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사과나 굴비, 해삼 같은 먹을거리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아내와 함께 산다는 것은 더욱 좋다.
돈은 항상 부족하긴 한데 그래도 누구에게 손 벌리진 않고 약간 절약 하여 성당에 헌금도 하고 조금은 남을 도울 정도가 돼서 참 좋다. 가까운 친척 사업을 도와준다고 했다가 짊어진 은행 빚 원리금을 매달 갚아 나가는 것이 부담은 되지만 그로 인해 일을 놓지 않고 계속할 수 있어서 오히려 더욱 좋다.
2층 서재에 올라가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작게 틀어 놓고 야옹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어제 못 마친 수필의 마무리 작업을 할 수 있어 참 좋다. 사무실에서 보낸 일거리까지 간단히 끝낸 다음 베란다로 내려와 아 내와 함께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의 윤슬을 내려다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니 더욱 좋다.
강 건너에 소대장으로 월남에서 대침투작전 중 적의 기습 폭격으로 전신에 파편이 박히고도 천운으로 살아난 군대 동기가 사는데, 오늘도 그 내외와 만나 가성비 좋은 양평 맛집에서 점심을 함께할 수 있어서 참 좋다. 전상(戰傷) 후유증으로 갖은 고생을 겪는데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장로로서 신앙심이 깊으며, 보험회사 중역을 지낸 뒤 시골서 노인회장을 맡아 온갖 어려운 마을 일들을 적극 도와주는 이 친구에게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어서 더욱 좋다.
집에 돌아와 가볍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몸이 한결 개운하고, 아래 층 거실에서는 아내가 손자 녀석에게서 온 전화를 받으면서 마냥 즐거워하니 참 좋다. 기특하게도 손자가 검도 대회에서 우승한 것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자기도 반장인 누나처럼 공부도 열심히 해서 고모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기로 할머니한테 약속했다니 더욱 좋다.
딸이 사준 내 발에 꼭 맞는 운동화를 신고 산책길에 나선다. 약간 경사진 당너머길을 따라 걸어 내려와 오빈교 아래 물소리길을 거쳐 양근 성지 앞을 지나 양강섬으로 가는 부교(浮橋)를 건너 공원을 한바퀴 돌고 돌아오는 코스는 걷기에 참 좋다.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사고가 명료해진다. 오늘은 생각지도 않게 머릿속이 가지런히 정리되면서 그동안 나를 애먹였던 다음 주 재판이 있는 사건의 어려운 쟁점에 대하여 밝은 길이 보이니 더욱 좋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간단히 한 후 아내가 정성 들여 차려준 갈매기살 구이, 상추쌈과 된장찌개로 저녁을 먹으니 밥맛이 꿀맛이라 참 좋다. 싱크대에 하루 동안 쌓인 식기들 설거지와 주방 청소는 내 몫이다. 집 안팎 일은 아내 혼자 거의 다 하는데, 이것이라도 남겨 두어 하루에 한 가지는 아내를 꼭 도울 수 있도록 해주니까 더욱 좋다.
설거지가 막 끝나갈 때 핸드폰 진동음이 울린다. 교통사고를 냈다고 하는 다급한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상세히 그 법적 처리 절차를 설명해 주자 그쪽도 흡족해하며 고마워하니 마을변호사로서 제대로 일을 한 것 같아서 참 좋다. 내일은 인천지검 강력부장으로 근무할 때 함께 일 했던 검찰 후배들과 오찬 모임이 있어 서울에 가야 하는데, 마침 의료 소송을 한 건 의뢰하겠다는 분이 있어 오후에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으니 모처럼 ‘현역’으로서 활기 있어 보일 것 같아 더욱 좋다.
아내와 약속한 대로 전에 보았던 옛날 영화를 한 번 더 본다. 영화에 관한 한 아내와 나는 취향이 거의 일치하여 항상 함께 볼 수 있는 것이 참 좋다. 오늘은 브래드피트의 앳된 모습도 다시 보고 로버트레드포 드 감독과 함께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오롯이 사랑할 수는 있음’ 을 되새길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밤이 깊어 자야 할 시간이다. 오늘 하루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았었나,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는 않았었나, 그중에 버릇이 된 것은 없었나 반성할 수 있어서 참 좋다. 오늘 하루를 나에게 허여해 주심에 감사드리며, 이제는 내가 바라는 무엇이 이뤄지게 해달라기보다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마음을 갖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모든 것이 참 좋다.